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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Jan 11. 2022

심달기는 다, 알아서 한다.

심달기


 


<최선의 삶>(2019, 감독: 이우정)

<더스트맨>(2020, 감독: 김나경)

Feat. <세 마리>(2018, 이옥섭), <메기>(2018, 이옥섭), <인써트>(2018, 이용수)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세 번째인가, <메기>(2018)를 보았을 때였다. 한데 모여 한 점을 바라보는 환자와 의사들의 무리 속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 흥미로운 균형의 사이드에 숨어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만 보였다. 특별한 제스처 없이 그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삐딱한 실루엣에서 ‘나는 심달기요’ 아우라가 듬뿍 흘러나왔다. 내가 그의 낯을 익힌 작품은, 역시 2X9필름작인 <세 마리>(2018). 독특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구교환의 에너지에 맞설 정도의, 묘한 개성이 있었다.


몇 년 후 <최선의 삶>(2019)을 보고, 놀랐다. 약간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글을 읽으며 상상했던 아람이, 상상하지 못한 생생함을 지니고, 거기 있었다. 역시 굉장했던 방민아가, 강이가 그러했듯 흔들리고 망설이고 요동쳤다면, 심달기는 아람이 그러했듯, 그냥,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온 세월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겪은, 그리고 겪은 것에 비해 훨씬 깊은 것을 아는 이의 모습이었다.



<최선의 삶>(2019). 왓챠피디아.


아람에게만 있는 능청스러운 제스처들은 심달기만의 것이기도 했다. 입을 아 벌리고, 혹은 얼굴에 수건을 턱 올리고 잠든 모양, 잠이 덜 깬 채 이를 닦는 모양, 강이의 다리를 베고 누워 과자를 주워 먹는 모양. 빤히 응시하는 눈, 등을 쓸어내리는 야무진 손, 의자에 앉아 빠르게 흔드는 다리. 제 키보다 훨씬 큰 매트리스를 들고 도도도 걷거나, 허리를 접고 미적미적 계단을 오르거나, 옷에서 수박을 꺼내 손날로 어설프게 팍 내리치거나 할 때, 그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아람으로서 존재했다.


서거나 앉거나, 자세가 바를 때가 거의 없다. 흔들리거나, 어딘가에 기대 있거나, 칭얼대듯 몸을 비튼다. 뭔가를 이리저리 살피기도 한다. 주워 온 물건, 훔쳐 온 지갑, 혹은 그저 먼 곳. 말을 꺼내기도 한다. 주로, 발음이나 톤이 일정치 않게 웅얼웅얼 뱉는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투로 무거운 내용을 털어놓을 때, 강이는, 관객은, 그가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듣게 된다.


<최선의 삶>(2019). 왓챠피디아.


소영이 매트리스에 웅크리고 있는 아람을 툭 친다. 아람은 일어나, 벽에 삐딱하게 기댄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운 탓인지, 부어 있는 눈에 물이 어린다. 허공을 응시한다. 입이 우그러지며 울먹임이 섞인, 날 듯 말 듯한 소리가 나온다. “벗을 때까지 맞았어." 괜찮냐고 묻자, 추스르고 삼키듯 눈과 몸을 함께 돌리며, "추워."라고 툭 던진다. 입은 여전히 일그러진 모양이고, 눈가는 붉다. 심달기는 터트리거나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말을 한다. 아람이 그렇다. 그날 밤, 아람은 ‘그 오빠’를 만난다며 재킷을 걸친다. 말에 특유의 애교가 섞여 있다. 그가 정말로 아프지 않은 듯 보이기 때문에, 듣는 이는 아프다. 괜찮아져야 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이제 다 괜찮은 걸까. 거울을 들어 살피고, 아직 아물지 않은 입술을 칠하는, 등이 꺼지자 빠르게 손을 흔드는 동작이, 태연하다. ‘어떻게 다 좋겠어’라는 그의 마음을, ‘사랑하면 싸우는거야’라고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그의 들뜸을, 감히 부정할 수 없다.


소영의 독재자 같은 매력과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에너지가 아람에게는 있다. ‘아람이 말하면 뭐든 다 믿게 된’다. “뭐긴 두부지.” “뭐긴 야옹이지.” 힘이 잔뜩 들어간 소영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절실한 아람의 것을 이기지 못한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투덜대듯 조용히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에 말려든다. 눈물까지 훔쳤다가, 다음 순간 가볍게 털고 밝게 일어난다. 아람은 타이르듯 ‘상투적으로 어른스러운’ 말들을 늘어놓곤 한다. 스스로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견디는 방식이고, 틀렸다고 말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음을, 관객은 자연히 새기게 된다.


<최선의 삶>(2019). 왓챠피디아.


늘 ‘아무렇지 않던’ 아람이 화낼 때는, 소영이 멋대로 집에 전화했을 때다. 주로 옆, 뒤, 혹은 앞으로 기울어 있던 몸을 꼿꼿이 펴고 중심을 잡는다. 똑바로 노려보며, 소리 역시 꼿꼿이 편다. 높이지는 않는다. 차분한 힘을 입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니컬하게 비웃고, 걱정하다, 별안간 소리를 지른다. 문에 머리를 찧으며, 울먹이는 눈으로 강이를 본다. 거절당하자, 계단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멍하게 앞을 응시한다. 벌어진 입을 일그러뜨리고, 허공을 향해 속삭인다.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정말 죽을 뻔했던 아람은, 이후 상처를 차갑게 드러내며 소영을 누른다. 소영이 학원에서 배운 연기를 자랑하는 내내 가만히 노려보더니, 예의 ‘스토리텔링’을 시작한다. 말투는 부드럽지만, 눈빛은 사납다. “연기하는 애가 인생을 뭘 알겠냐.” 비웃음을 흘리고 눈을 굴리며 자리를 뜬다.


여기저기 찢어진 얼굴로, 아람은 아빠와 귀걸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힘을 빼고 웅얼거리듯 늘어놓다 피식 웃음이 샌다. 고개가 천천히 흔들리고, 이번에는 눈물이 샌다. “집에 있으면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상처가." 무엇이든 별 일 아닌 듯 늘어놓는 심달기의 얼굴엔,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있다. 무언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 모양은 매번 조금씩 다르고, 늘 태연하고, 그래서 엉망이다. 아무렇지 않게 상처 가득한 얼굴로 돌아올 때마다 아람은, 마음 한 조각을 잘라내고 빈 곳을 헛웃음으로 채우는 것 같다.


<최선의 삶>(2019). 왓챠피디아.



강이, 소영, 아람. 각기 다른 온도를 지닌 그들은, 뒤섞였다가, 찢어졌다. 누군가는 데이고, 누군가는 제 온도를 잃었다. 아람은 주로 따스하다, 갑자기 서늘해졌다. 창틀에 앉아 사탕을 문 채 앞뒤로 흔들리며 던지던, “목욕탕 갈래? 그래 더 자라.” 아람은 그 길로 강이를 버린다. 일상적이고 태연한 뒷모습, 거기엔 언제든 훌쩍 떠나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쓸쓸함이 있었다. 심달기가 조그만 등에 단단히 업은 아람의 최선은, 만만치 않았다. 감히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주제넘게도, 이 배우는 대체 몇 번의 삶을 산 것일까,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더스트맨>(2020). 왓챠피디아.


그중 하나가 모아였을까. <더스트맨>(2020), 모아는 벽에 그림을 그리며 등장한다. 인기척을 느끼자, “깜짝이야.” 하고 투덜댄다. 그냥 놀랐을 뿐이다. 타인을 별로 의식하지는 않는다. 다시 작업에 집중하는 뒷모습이 꼿꼿하고 야무지다. 경찰을 피해 달리는 중엔 긴장이 앞서지만, 숨어 있다 태산을 다시 마주치자 약간 부끄럽다는 듯한 웃음기가 돈다. 샛길을 가르쳐 주자, 조심스럽게 문을 스윽 밀어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눈에 모험을 즐기는 어린이 같은 장난기가 있다.


같은 장소에서, 둘은 다시 맞닥뜨린다. 태산도 모른 척 숨었으니, 똑같이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딱히 낯이 두꺼워서 그렇다기보단, 다가가 인사하는 것이, 모아에게는 당연한 듯하다. 적당한 붙임성이 있다. 안면만 있는 사람을 대하는 쭈뼛거림까지 정확히 첨가해, 심달기는 모아의 몸에 밴 해맑은 예의를 힘들이지 않고 드러낸다.


그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모아는 전과 다른 빛으로 반짝인다. 벽화의 의도를 강조할 때는 눈도 함께 끄덕이듯 커지고, 목소리에도 주위를 끌어들이는 신이 묻는다. 그들은 그림으로 통한다. 함께 하는 활동에 집중하다 보니, 별 대화 없이 긴장이 풀린다. 이제 모아는 태산을 아저씨라고 부른다. 발음을 대충 흘려 ’아저씨’ 보다는, ‘아즈시’에 가깝게 들린다. 어느새 그의 태도엔, 낯선 상대에게 두어야 하는 거리, 차려야 하는 예의보다, 공유하는 순간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이를 드러내며 흐흐 웃는 와중, 난간에 몸을 잔뜩 기대고 있는 모양이라니.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을 듯한 천진함이다. 아람과는 다른, 평범하게 티 없는 분위기다.


<더스트맨>(2020). 왓챠피디아.


별안간 지하도로 찾아와, 우리 오빠 옷을 다 가져왔다며 즐겁다는 듯 웃고,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스스럼없이 라면을 먹는 모습. 그러한 행동이나 전개 자체를,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힘, 모든 걸 다 자연스럽게 만드는 힘이 심달기에게 있었다. 붙임성과 예의만 있을 뿐, 거리감이나 꺼리는 낌새가 전혀 없어, 대단하다거나 특이하다는 감상도 얹지 못하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보게 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산의 주위를 빙빙 돌며 살핀다. 냄새까지 맡는다. “제가 준 옷 입었네?”라는 뭔가 어긋난 반존대도 이상하지 않고, ‘대박~’ 따위의 유행어도 희한하게 맛있다. 그런 그가, 태산의 날 선 말을 듣고 스스로 멀어지는 순간은 아프다. “내려주세요, 이제 더 안 올게요.” 담백하지만 상처가 울리는 목소리. 그래도 여전히,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건네는 건 모아다. 꾸준히 문을 두드릴 줄 아는 이. 거침이 없어 오히려 거북하지 않은 에너지가 그에겐 있다.


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는 진지하게 머뭇거리고, 그늘이 들어선다. 눈이 처연하게 껌벅이고, 입술이 살짝 앞으로 나온다. 다음 순간 활짝 웃어버려도 위화감이 없다. 진지한 순간도 장난스럽게 바꾸고, 그러다가도 차분하게 집중한다. “아저씨가 길에서 자는 거 싫어요.” 모아는 예상치 못한 박자에, 나직하게 말한다. 단어와 단어는 머뭇거림 없이 이어지지만, 그 사이에 조심스러운 진심의 무게가 느껴진다.


<더스트맨>(2020). 왓챠피디아.



태산은 화자의 위치에 있지만, 혼자 있을 때조차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태산의 시야에 들어오며 처음 등장했던 모아, 그의 존재에 익숙해지고 나면, 관객은 오히려 종종, 모아의 솔직한 시선을 통해 태산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홀로 해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모아는,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태산을 잡지 못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굴린다. 이후 해묵은 상처를 꺼내놓는 건 태산 자신의 몫. 먼지 위에 나타난 제 모습을 보고 미소 짓는 장면을 끝으로, 모아는 역할을 다 했다는 듯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심달기의 모아는 작품에 생기와 균형을 불어넣었다. 제스처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나직한 우지현의 태산과, 때로는 다른 톤의 소리를 내며 화음을 이루고, 때로는 같은 멜로디로 움직이며,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더스트맨>(2020). 왓챠피디아.



투덜대는 말투, 인상을 쓰고 집중하다 확 밝아지는 눈가. 시무룩한 ‘네’ 마저 재미있다. 흑백영화 <인써트>(2018), 버거워 보이는 카메라를 들고 ‘별 거 없는’ 곳을 찍는 미라의 움직임을 담는 것만으로도 화면은 다채로워진다. 심달기는 그렇다. 늘, 최고로 자연스러워지는 법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다. 없는 색도 불러내고, 무엇과도 어울리며, 빈 곳을 정확히 찾아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채운다.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최선의 삶>) 아람은 그렇게 다, 알아서 했다. 심달기도 그렇게 다, 알아서 한다.


 


+

<세 마리>(2018) 속 심달기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해 아쉽다. 영화제에서 본 후 재관람 기회가 없어 기억이 너무나 어렴풋했다.


++

물론 태산과 모아는 다시 서로를 찾아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스트맨>(2020). 왓챠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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