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Adam Driver as ‘Unlovable’ Guys
<라스트 듀얼(The Last Duel)>(2021, 감독: 리들리 스콧)
<아네트(Annette)>(2021, 감독: 레오 까락스)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어로는 사랑받고 빌런은 미움받는다. 허나 매번 그렇지는 않다. 과거의 상처, 여린 성정, 별로 안 ‘나쁜’ 유머감각 따위의 ‘lovable’한 요소로 팬을 잔뜩 거느린 판타지 픽션 속 빌런들이 있다. 일관성 있는 예를 들자면, MCU의 로키, AHS 시즌8의 마이클 랭던, 그리고 스타워즈 시리즈의 카일로 렌. 카일로 렌, 이 어둠의 축을 연기해 인기를 얻고, 결국 수많은 팬들의 눈물을 쏙 뺀 배우가 바로 아담 드라이버다. 그는 올해, 시대적 흐름을 훌륭하게 따른 ‘위대한’ 남성 감독들의 작품에서, 이성애규범적 권력을 지닌 폭력적 남성성을 제대로 입었다. ‘사랑받는 빌런’이 아닌 ‘좋아할 수 없는unlovable 남자들’이 되었다.
<라스트 듀얼>(2021)은 한 사건에 대한 세 사람 각각의 입장을 담음으로써, 당시 삭제되었던 한 여성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배우들은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성격과 깊이로 연기한다. 아담 드라이버의 배역은 자크 르 그리, ‘사건’의 가해자다. 장과 자크는 주위에 벽을 쳐 놓고 타인의 소리를 듣지 않는 남자들이다. 장이 고지식하고 다혈질이어서 그렇다면, 자크는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 그렇다. 장의 벽은 무식하게 단단해서 다 튕겨내고, 자크의 벽은 독성 화학물질로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죄 녹여버린다.
단순한 장의 필터는 제 용맹함과 의로움을 강조하며 자크를 그저 재수 없고 탐욕스러운 배신자로 그려 놓는다. 본인의 필터를 거친 자크는 보다 풍부하게, 재수 없다. 스스로를 미화하는 방식에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즘이 비친다. 늘 침착하고 이성적이며 때론 재치 넘치고 대담하다. 모든 순간 옳은데, 융통성마저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서 흔들리나, 그 비극에 고민하고 후회하는 모습조차 멋들어진다. 차분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연기 역시 ‘멋지다’, 멋지긴 한데, 우습다. 아담 드라이버는 묘하게 꾸며낸 뉘앙스를 풍기며, 겸손을 가장한 자아도취의 톤을 적절하게 입는다. 마르그리트의 시선이 그의 실체를 정확히 꿰뚫는 순간, 관객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한다.
내내 스스로에 취해 있어, 상대의 저항을 보고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 마르그리트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두 사람의 기억에서 거의 유사하다. 큰 몸으로 상대를 가두고 잔뜩 차오른 숨을 몰아쉬는 모양이 위협적이고도 추하다. 괴로워하는 마르그리트에 이입함과는 별개로, 그 흥분이 너무 적나라해 두 번 다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폭력적인 연기를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불쾌감은 아니었다. 사실,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 돌이키다, ‘세상에 아담 드라이버였잖아’, 하고 퍼뜩 깨달았다. 두 배우의 연기는 훌륭했고,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완성했다.
자크 르 그리는 뻔했다. <아네트>(2021)의 헨리 맥헨리는 보다 복잡하게 꼬여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고, 어떤 생각에 빠져 있고, 또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서서히 드러난다. 짓궂은 스타, 매력적인 남자,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여성을 학대하고 아이를 착취하며 사람을 죽이는 인간이기도 했다.
작품 초반 아담 드라이버는, 헨리의 매력을 설득하는 와중 어떤 ‘가능성(1)’을 암시한다. <메기>(2018), 구교환은 성원의 유약하고 사차원적인 사랑스러움 속에 쌔-한 구석을 숨겨 놓았다. 아담 드라이버는 헨리의 시니컬하나 따스한 재치 가운데 ‘심연’을 언뜻 내보인다. 먹던 바나나를 짓이겨 담배를 끄는, 앞서 걷는 앤의 어깨를 움켜잡는- 제스처의 형태도, 돌이켜 보면 다 복선이었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거울을 보며 잽을 날릴 때, 밤길을 바이크로 달리며 앤의 ‘죽음’들을 떠올릴 때, 술에 취해 창가에 서 있을 때, 그는 멍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후에 ‘지휘자’의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는 순간과 닮아 있는 무표정이다.
공연을 마친 앤을 찾아온 헨리는,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눈에 경계심을 내비치고는 바로 헬멧을 내린다. 익살스럽게 스텝을 밟아 앤에게 다가가더니, 착 달라붙어 쭈그려 앉는다, 헬멧을 올리지 않은 채. 그가 공연에서 떠는 위악은 모두 공포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퍼블릭의 관심으로 먹고살면서도, 때론 그들을 견디지 못하는, 그걸 제멋대로 유머러스하게 눙치는 헨리의 캐릭터가, 그 짧은 제스처로 드러난다.
작품이 공식적으로 헨리의 캐릭터를 뒤집는 건 ‘Six Women’ 씬이지만, 헨리 본인이 뒤집히는 결정적인 씬은 라스베가스 쇼다. 어딘가 곤두선 채 “사랑이 날 병들게 한다”, “도둑이 농담을 털어갔다”는 둥 투덜댄다. 이전에 그 투덜댐은 시니컬한 컨셉,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분위기는 쇼의 매력으로 여겨졌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게 했다. 이번엔 관객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와이프킬링 조크’를 하며 아내를 낯부끄럽고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 깎아내린다. 그 연기는 저질스럽게 훌륭하다. 결과적으로 그가 깎아내린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아담 드라이버는, 탁월한 코미디언이다. 무해한 즐거움을 선사할 수도 있고, 이렇듯 웃음을 강요하며 불쾌감을 떠안길 수도 있다.
불안정한 상태로, 헨리는 마이크를 던지며 쇼를 끝내고, 관객들은 충격의 비명을 지른다. 명장면이 이어진다, ‘You Used to Laugh’. 무대와 관객석, 헨리와 퍼블릭의 대립이다. 성큼성큼 퇴장한 헨리는, 껍질을 벗기려던 바나나를 한 손으로 콱 으깨 쓰레기통에 던진다.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다시 내리며 후드를 뒤집어쓴다. 굳은 뺨에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분노가 있는데, 눈빛에 두려움이 섞여 있다. 무대로 올라가 스탠드를 넘어뜨리고, ‘왜 웃지 않느냐’고 화낸다. 백스테이지와 스테이지를 신경질적으로 오간다. 뱃심과 콧소리가 꽉 뭉쳐 탁하게 고조된 목소리가 악의 가득하게 휘몰아치며, 관객들이 부르는 야유의 합창과 어우러진다. 마지막 구절 “Big old prooooooblem!”에 이르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탓에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헨리가 내뿜는 “분노의 불길”은 압도적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과 지은 죄를 직시하기 두려운 나머지 제 무덤을 파고 있으며,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사실 깨닫고 있음을, 아담 드라이버는 이해하고, 넌지시 드러낸다.
자크와 헨리, 둘 다 여성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자기중심적 인물들이나, 시대 배경만큼이나 그 기반은 다르다. 자크 르 그리는 ‘순수한’ 나르시시스트다. 저 잘난 맛에 산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없다. 타인의 마음과, 행동에 담긴 의미를 제 입맛대로 끼워 맞춘다. 애초에 모든 인간이 수단이다. 폭력에 대한 인지 자체가 없으므로, 성폭행을 섹스로 착각한다.
헨리 맥헨리의 기반에는 자기혐오가 있다. 약혼을 하고도 “앤이 날 사랑하는 이유가 뭘까”라고 중얼거리고, 롯폰기 씬에서는 “왜 여자들이 내게 끌리는지 모르겠다”고 노래한다. 진심이고, 그래서 위험하다. 자격지심이 분노로 뻗치고, 컨트롤하지 못해 폭력을 부른다. 이성은 버리고 감정적으로만 끊임없이 의심하며 내면으로 파고들다, 그 방향을 타인에게 돌려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한다. 가장 불안할 때, 그는 가장 위협적이다. 저지른 일들은 돌아와 파괴적 자기혐오를 낳는다.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다시 심연을 들여다보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고, 결과적으로 비슷하다. 제 잘남에 취해 있는 자크와 제 못남에 취해 있는 헨리. 타인은 안중에 없다. 이들은 악마가 아니다. 낡은 세계가 키운 ‘평범하게 나쁜’ 남자들이다. 아담 드라이버는 ‘그런 남자들’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보기보다 단순한 자크의 얕은 속내를, 끝없이 어둡고 배배 꼬인 헨리의 ‘심연’을, ‘나쁜남자’의 매력으로 미화돼 왔던 그들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행동 방식을, 작품에 맞는 톤으로 까발린다.
그러나 다시, 헨리의 캐릭터에는 자크에겐 없는 입체성이 있다. 그가 앤을 바다에 빠뜨린 후 중얼거리는 “There’s so little I can do.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에서, 자크가 마르그리트를 강간한 후 뱉는 “We couldn’t help ourselves.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요.”가 떠오른다. 자크가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면, 헨리의 말은 자기 최면이다. 범죄자의 비겁한 변명이지만, 때문에 오히려 나름의 ‘가능성(2)’이 있기도 하다. 그것을, 아담 드라이버는 마지막 두 ‘곡’에 담았다.
<아네트>의 경우 거의 모든 대사가 sing으로 이루어져 있다. 항상, 뮤지컬 영화 속 연기는 ‘다르게’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했다. 음을 붙여 대사를 하면 되는 것도 아닐 테고, 노래를 한 곡 뽑으면 되는 것도 아닐 테다. <숲 속으로>(2014)의 안나 켄드릭이나 <레 미제라블>(2012)의 아론 트베이트처럼 노래를 전문적으로 잘하는 배우가 아닌 이상, 기술적인 부분은, 몰입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면 족하지 싶다. 아담 드라이버의 보컬은 기교가 적고 음색이 뚜렷해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접근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Somehow 아담 드라이버는, ‘잘’한다는 감탄보다, 더 중요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매번, 순간의 감정을 풍부하게 전달하는 톤으로, 배우가 아니라 씬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었다.
아담 드라이버의 목소리는 굵고 둔한데, 비음이 섞여 있어 날카로운 데가 있다. 노래하는 보이스는 때로는 가성이 섞여 곱고, 때로는 익살스럽고, 때론 새되게 고조되는데- 특징은 그대로 남아 있다. ‘We Love Each Other So Much’에서는 곱고 몽환적인 보이스로 사랑에 취한 상태를 드러낸다. ‘You Used to Laugh’에는 짙고 탁하며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투로 발작적 분노를 담는다. ‘All the Girls’는 둔하게 휘청거리다 우울하게 붕 뜬 채 마무리한다.
‘Stepping Back in Time’에는 비장한 회한이, ‘Sympathy for the Abyss’에는 차분하고 슬픈 깨달음이 있다. 앤이 죽은 후, 그리고 ‘지휘자’를 죽인 후, 아네트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랠 때에는 없던, 진심이 있다. 비록 들통난 후에야 하는 사죄이고, 앤과 아네트에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으나, 자체로 의미가 없진 않다. 과거의 죄는 지울 수 없더라도, 적어도 앞으로는, 제 속으로 파고드는 대신 주위를 둘러볼 것이다. 그 ‘가능성(2)’을, 아담 드라이버는 아주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죄수복을 입은 헨리가, 검붉은 뺨을 긁는다. 무척 지치고 약해 보이는 건 분장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을 원망하는 아네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견디다, 절박하고 부드럽게 꽉 끌어안는다. 제지하는 교도관을 어깨로 밀쳐낸다. “Can’t I love you?”, 힘이 하나도 없는 소리로 반복해 묻는다. 거절당하자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넨다. 내리깐 눈, 그 밑의 주름, 약간 비틀어진 채 벌어진 입. 피로와 체념이 어른거린다. 멀어지는 아네트를 향해 속삭이는 “Goodbye Annette.”는, 울먹임으로 꽉 잠겨 있다. 그렇게 딸을 영원히 떠나보내고, 멍하게 굳은 채 천천히 문에서 멀어지다, 슬쩍 카메라를 응시한다. 완전치 않은 발성으로 나직하게 뱉는다, “Stop watching me.” 그대로 천천히 걸어가, 등을 보인 채 벽을 짚는다. 드라마틱하게 울지도 않고, 말이나 움직임에 힘을 주지도 않는다. 두드러지는 제스처 없이 무기력하게 절망한다. 아네트의 씬이었고, 헨리는 초라하게 남겨져야 했으므로.
그 조심스러움은 적절했다. 배우는 연기하는 캐릭터에 몰입해야 하지만, 작품의 의도를 해치는 방향으로 파고들면 곤란하다. 물론 그 부분은 연출과 편집의 영역이기도 하다. 허나 메시지를 이해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배우와 함께라면, 이토록 깊은 장면이 탄생한다.
<아네트> 오프닝, 노래하는 두 주연 배우의 얼굴이 대조되어 흥미로웠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기본적으로 예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아담 드라이버에겐 웃음기가 없었다. 캐릭터에 이입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본인이 노래할 때 가장 편안한 표정이 아닐까 싶었다. 아담 드라이버 얼굴의 기본값은, 입을 꾹 다문 무표정이다. 그 무표정으로, 그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된다. 작품이 인물에게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해 독특하게 자리를 잡는다.
새삼, 그는 신기한 배우다. 개성이 뚜렷한 신체, 인상, 음색을 지닌 채, 다양한 인물을 연기해 왔다. 과묵하고 자상한 버스 운전기사, 귀찮은 듯 좀비를 때려잡는 경찰, 재능 있고 재수 없는 힙스터 예술가, 엄격한 눈빛의 신부, ‘보통’이 아닌 바텐더, 소년의 눈동자를 가진 악당까지. 자타 공인 ‘핸섬가이’ 자크 르 그리와, 스스로 못났다고 여기는 ‘악동’ 헨리 맥헨리를, 머리카락을 비슷하게 늘어트리고, 비슷한 시기에 연기했다는 거 아닌가. ‘~주로 이러한 역할을 맡아 왔던 그가 올해 개봉작에서 색다른 얼굴을 보여 주었다~’며 ‘연기 변신’, ‘반전’ 따위의 키워드로 글문을 열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으나, 이내 접었다. 그의 폭은 원래 넓었다.
그러나 이토록 ‘정이 가지 않는’ 역할에 집중한 시기는 또 처음이기도 하다. 2019년, “It is Adam Driver’s world we’re all just living in it 여긴 아담 드라이버의 세상, 우린 다 그냥 얹혀살고 있는 거야”이라는 문구가 적힌 밈이 떠돌았다. 인기가 정상을 찍은 지금 대체 왜, 아담 드라이버는 굳이 이런 남자들이 되기로 한 걸까. 단지 타이밍이 맞았을 수도 있겠다. 허나 그가 리들리 스콧과 연달아 두 작품을 함께 했으며, <아네트>의 제작에도 참여했다는 사실들은, 그가 감독과 작품이 전하려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라스트 듀얼>은 ‘자크’들의 세상 속 마르그리트의 이야기였고, <아네트>는 ‘헨리’들의 세상 속 아네트의 이야기였다. 2021년 현재, 아담 드라이버는 그렇게, 역할을 통해, ‘지금은 이런 남자들의 세상 이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영원히, 스타가 아닌 배우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최근 GQ 매거진에 “Adam Driver Doesn’t Care If You Like Him아담 드라이버는 당신이 자길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 글을 써야 했기에 부러 읽지 않았지만, 제목만 보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사랑이 하나도 안 담긴 눈빛을 보내던 크리스를 보고, 벤 위쇼를 약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리틀 조>(2019) 감상에 적은 문장이다. <라스트 듀얼>과 <아네트>를 본 나는, 자크 르 그리와 헨리 맥헨리를 끔찍해하며, “자길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이 배우를,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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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rape scene)인티미시 코오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ior가 현장에 있었고, 리들리를 비롯한 모두가 케어해 주는 게 느껴졌다. 아담과는 항상 리스펙이 있었다. 서로 불편함이 느껴지면 바로 손을 들어 말했다. 촬영 현장은 아주 ‘안전한’ 곳이었다.”
-조디 코머, 유튜브 ‘Grazia UK’
https://youtu.be/I9W_ef8Gl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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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드라이버는, 본인의 연기를 스크린에서 보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하며(‘않’이 아니라 ‘못’. 모 토크쇼에서 진행자가, 알면서도 동의 없이 그가 나온 영화 장면을 틀었을 때, 굉장히 불안해했다.), 설거지를 하던 중 오스카 노미네이션 소식이 담긴 전화를 받고는, ‘음 그거 굿 뉴스네’ 하고 다시 설거지를 했다며 덤덤하게 말하고, 기자들이 가족에 대해 물으면 애정은 표시하되 프라이버시라며 정중하게 선을 긋고, 코믹콘이 무서웠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이미지 메이킹이라기엔 너무….) 그런 사람이, 작품을 위해 기꺼이 노력해 나쁜 놈을, 판타지 속 멋진 빌런도, 무시무시한 악마도 아닌, 현실적으로 평범하게 끔찍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이, 더 참을 수 없이 멋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