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 아에넬 (Adele Haenel)
<언노운 걸(La fille inconnue)>(2016, 감독: 뤽 다르덴, 장-피에르 다르덴)
<디어 스킨(Le daim)>(2019, 감독: 쿠엔틴 두피유)
<120BPM>(2017, 감독: 로뱅 캉필로)
<원 네이션(Un peule et son roi)>(2018 감독: 피에르 쉘러)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의 삶을 영화를 통해 ‘보이게 만드는’ 다르덴 형제. 이들이 픽션을 구성하는 방식은, 철저히 계산해서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다. 웅장한 음악과 화려한 색 대신 일상의 소음과 필터 없는 화면을 통해 눈과 귀를 비워냄으로써, 답답하게 꽉 차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래서 내 취향이 아니다, 라는 말은 이들의 작품에 하기가 꺼려진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리얼리즘, 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해서 낯익은 배우 대신, 낯설기 때문에 실재하는 느낌을 부여하는 얼굴들을 등장시키기도 하며, 알려진 배우들도 최대한 평범하게, 주변에 있을 듯한 모습으로 담는다. <언노운 걸>(2016) 속 제니, 아델 아에넬이 그랬다. 허나 새롭고 강렬했다. 어디서 온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프랑스에선 세자르 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상을 받은, 핫한 배우였다. 진한 눈썹과 눈 때문에 언뜻 투박하고 강해 보이는데, 눈 밑의 선이 독특한 방향으로 섬세함을 더한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인상인데, 신기하게도 처음 봤을 때의 신선함이 매번 느껴졌다.
클리닉 의사, 제니의 기본적인 표정은 심각한 무표정. 손짓은 섬세하고 정확하다. 탁한 음색은 주로 분명한 발성으로 차분히 내보낸다. 환부와 표정을 동시에 살피며 환자에게 집중해, 신뢰를 준다. 아주 살갑지는 않지만, 필요한 만큼 친절하다. 정에 휘둘리지도, 기능적으로 치료만 하지도 않는다. 환자의 심리적 안정 또한 의사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온, 몸에 밴 버릇 같다. 분명히 뜬 눈과 입꼬리를 씩 올리는 미소는 상대의 불안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인위적이지 않다. 허나 인턴 줄리앙을 대할 때는 미소가 사라지고, 거칠지는 않으나 딱딱한 권위가 들어간다.
형사가 찾아온 후, 제니는 전과 달리 머뭇거림이 살짝 묻어나는 말투로 줄리앙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기대 있던 몸을 떼어내며 담배를 슥 꺼내 창가로 간다. 최소한의 동선을 택해 별다른 에너지가 들지 않는 제스처다. 의식적으로 계산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제니에게 병원은 일상의 공간이다. 휴게실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기를 수도 없이 했기 때문에 생긴 무의식적인 효율이다.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워, ‘뭘 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들지 않는다. 폼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음에서 오는 폼이 느껴진다. 아델 아에넬은 그 익숙함에 이질적인 공기를 섞는다. 콕 집어 묘사하긴 힘들지만- 이를 테면 살짝 굽은 등,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잡힌 얼굴 같은 것에서 오는 분위기가 그렇다. 살인 사건 소식을 들은 것 치고 태연해 보일 수는 있다. 허나 사람마다 사건을 받아들이는 감도와, 감정을 숨기고 표출하는 비율이 다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더, 겉으로 드러내는 것 이면의 복잡한 감정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절제하고 통제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라 더 그렇다. 성격과, 의사로 일하며 생긴 특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형사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눈을 치켜떠 슥 보고 고개를 돌렸다고 해서,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그 최소한의 연기가, 제니가 보는 것들을 관객이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죽은 여성이 밤에 벨을 누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제니는, 인상을 써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눈물을 닦으며 말과 동작을 잇는다. 이전에는 하대했던 줄리앙을 대할 때마다 비치는 망설임과 연약함은, 고민과 변화를 솔직히 나타낸다. 사건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은, 조용히 절박해 보인다.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다. 오히려 ‘문은 열어줬어야지’, 라는 하브란 박사의 말에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어떤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제니는 스스로를 잘 알며, 타인의 시선이나 반응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동기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왜 그랬는지도 빨리 깨닫는다. 줄리앙에게 스스로의 표현대로 ‘갑질’을 할 때는, 본인이 ‘뭘 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제니는, 다시는 그런 식으로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형사들이 말하듯 여성의 죽음이 제니의 탓은 아니지만, 마음의 짐을 자처한다. ‘애매한 죄책감’에서 출발했어도, 큰 의료 센터 자리를 포기하고 클리닉을 맡기로 결정한 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는다. 무턱대고 밀고 나가는 것 같아 보여도, 때로 맞닥뜨리는 상황들에 당황해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찾아다니며 죽은 여성에 대해 묻는 제니는 병원에서와는 다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홀로 벌였다. 이쪽 방면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전형적인 수사물 속 형사들처럼 멋있을 수가 없다. 자처해 불청객이 되어 불편한 공기를 맞닥뜨린다. 겪은 적 없는 위협에 떨기도 한다. 아델 아에넬은 어깨에 활동적인 긴장 대신 어색한 긴장을 끼워 넣고, 차분한 말투엔 정확함을 줄이고 약간의 주저를 더한다. 허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비난하는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눈으로 모든 것을 담는 데에 집중한다. 동요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남자와 대비된다.
사이사이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모습은,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허나 대충 끼니를 때우거나 어두운 길을 빠르게 걸을 때, 곰곰이 생각하거나 굳게 결심하는 듯한 어두운 표정은, 앞으로 제니의 마음 한구석에 죽은 여성이 항상 자리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 죽음을 겪지 않았다면, 혹은 겪고도 그냥 지나쳤다면 만나지 않았을 세상을 알게 됐다. 값싼 동정심이 아니다. 마침내 언니를 통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제니의 눈은 가늘게 떨린다. 작품이 바라는 것은 아마,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머릿속에 이 여성들이 자리하는 것일 게다.
때문에, 제니에겐 특정 역할이 있다. 주인공이지만, 관찰자다. 개인 서사를 깊게 드러내는 대신, 타인이 겪은 일을 파헤친다. 어쩌면 애매한 위치다. 완전히 물러서 지켜보는 위치에 있을 수도,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도 없다. 아델 아에넬은 관객이 제니에게 이입해 사건을 좇으면서도, 그의 감정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숨겨 표현한다. 이입한 방법은 배우만 알겠으나, 고민을 거듭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싶다. 그 과정을 구구절절 내보내는 대신 담백한 연기로 갈무리한다. 작품을 깊이 이해했기에, 그 리얼한 복잡함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들이밀 수 있었을 게다.
<디어스킨>(2019)에서 아델 아에넬은 또다시 관찰자의 역할로 등장한다. 허나 작품 스타일과 인물의 성격이 아주 다르다. 매력보단 메시지를 전달하는 제니와 달리, 드니즈는 '다크코미디스러운' 매력을 드러낸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전개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며, 상당히 입체적이다. 첫 등장은 조르주의 시선을 통해서다. 살가운 젊은 여성 바텐더라는 전형적 조연, 조르주가 자기도 모르게 ‘수작’을 거는, 뻔한 대상으로 보여질 때조차, 아델 아에넬의 매력은 클리셰와는 멀다. 화사한 미소를 만드는 대신 씩 웃고,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하는 대신 쿨하고 빠르게 툭툭 뱉는다. 몸은 곡선보단 직선을 이루도록 슥 슥 움직인다. 편집 일을 맡고 기뻐할 때, 조르주의 ‘영화’가 마음에 든다고 털어놓을 때는, 약간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며 웃는다. 말끝을 흐린다. 그 시원시원하면서도 숨기지 못하는 태도는, 드니즈를 솔직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그리고 걱정하게 만든다.
조르주가 ‘어떻게 <펄프픽션>을 시간순으로 맞추냐’고 물을 때, ‘편집자’를 잘못 발음할 때, 카드가 막혔다고 화를 낼 때, 드니즈의 얼굴은 뜨악하게 굳는다. 눈을 동그랗게 치켜떠 자신을 보지 않는 상대를 빤히 관찰한다. 복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을 목격하고 담는 제니의 정직한 창이 되었던 그 눈은, 언뜻 비슷하게, 조르주를 보는 관객의 눈이 된다. 허나 인물의 의중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며, 의심할 여유도 주지 않는다.
드니즈는 이용당하는 척하며 사실은 이용하고 있었다. 조르주를 구슬리고 달래며 결과물을 탐욕스럽게 끄집어냈다. ‘다 알고 있었다’는 자신만만한 고백은 나름의 반전이나,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델 아에넬이 드니즈가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피가 필요해’라는 등 ‘작품’에 대해 말할 때의 그 분명함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서는 안 됐다. 조르주가 카메라에 담아온 피를 보며 웃음이 새도록 마음에 들어 하는 얼굴에선, 타인의 광기를 이용할 능력이 있는 자의 정제된 광기가 담겨 있었다. 조르주가 총을 맞고 쓰러지자 동요하지 않고, 카메라에 눈을 고정시킨 채 태연히 블루종을 휙 뺏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지나가자 정말로,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조르주가 뭘 하는지, 아니 자기가 조르주를 가지고 뭘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아델 아에넬이 맡는 캐릭터들은 만만치 않다. 그는 대상화되거나 수동적이거나 전형적이기만 한 인물은 되지 않는다. 어떤 방향이건 간에, 자기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왜 아니겠나), 아델 아에넬의 강렬한 클리셰 타파는 혁명가의 얼굴로 정점을 찍는다. 역사 속 허구지만 실재했을 법한 주체적이고 열정적인 인물들, 프랑수아즈와 소피다.
우선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본다. 프랑스 혁명사 중에서도 ‘왕의 목을 자르기까지의 과정’에 집중한 <원 네이션>(2018)이다. 작품을 다시 볼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기억에 의존해 언급 정도만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나, 언급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식인 혁명가들은 지루한 엑스트라로 빼놓고,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에 포커스를 둔 설정은, 익숙하다고 착각했던 서사를 다르게 다가오게 한다. 그중 가장 ‘달랐던’ 것은 역시, ‘혁명사 속 연인’ 클리셰를 뒤집은 프랑수아즈-바질 커플이었다. 프랑수아즈는, 경찰에 끌려가서도 두려움보단 분노로 몸을 떨고 눈물을 글썽이며 할 말을 다 하고 나오는 여성이다. 용기와 정과 분노와 모든 것이 이글거리는 아델 아에넬의 눈동자는 관객을 빨아들인다. 그의 혁명과 사랑과 삶은 맞물려 있다. 바질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이끈다. 강요 없이 혁명의 불길 속에 들어오도록 돕는다, 아니- 그의 꾸준히 타오르는 열기가 바질에게 자연스레 전염되었다, 에 가깝겠다.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바질과, 그의 어깨를 내려 낙인을 내보이며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이어 주는 프랑수아즈(가스파르 울리엘 글에도 썼던 장면이다)는, 그 순간 겹쳐 서 있었다- 서로 달리 살아왔으나 만나는 순간부터 한 몸이 된 것처럼. 횃불을 들고 사람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프랑수아즈를 다급하게 좇는 바질도 떠오른다. 전형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스파르 울리엘과 아델 아에넬만큼 전형적으로/정면으로/정 반대로/정석으로, 뒤집는 이미지를 지닌, 또 캐스팅 포인트를 정확히 짚으면서도 본인들만의 방향으로 연기해낼 배우들이 또 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프랑스혁명’은 ‘안전한 영화 소재’다. 허나 이 작품은 그렇지만은 않았고, 두 캐릭터와 배우는 그 핵심이었다.
아델 아에넬의 앞선 선택은, 더 ‘안전하지 않았다’. <원 네이션>보다 현재와 좀 더 가까운, 특권을 지닌 누군가들은 불편해할 소재, ‘HIV 양성/에이즈’ 관련 운동을 다룬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작품, <120BPM>(2017)이다. 나톤이 회의에 처음 참석하던 날, 대충 걸친 점퍼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기대 서 있던 소피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와 공식적인 톤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긴장은커녕 시니컬하게 고개를 흔들기도 하는, 자리와 사람들에 익숙한 베테랑이다. 행사 도중 기습해 마이크를 빼앗아 연설자를 거의 노려보며 한 마디도 뺏기지 않고 쉴 새 없이 뱉어내는 모습은 영락없는 열정적인 운동가다. 이성을 잃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는 지금 자신이 주도한 기습시위가 역효과를 냈다며 문제 제기를 하는 중이다. ‘수갑은 다른 사람을 묶는 게 아니라, 경찰이 왔을 때 나를 묶는 용도’라고 적당히 손짓을 섞어 강조할 땐, 아찔하게 멋지다.
소피가 던진 주제로 날카롭게 논쟁하지만, 소위 내부 갈등/ 집단의 위기 같은 걸 그리는 씬은 아니다. ‘액트업 파리ActUp Paris’가 한 곳에 고인 덩어리가 아니라, 건강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세차게 흐르는 물결임을 표현하는 장면에 가깝다. 쉬는 시간, 대립했던 단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피의 모습을 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허리에 팔을 얹고 불만 있는 듯 통로에 서 있다가도, 시위 참여자를 모집할 땐 장난 섞어 쿨하고 능숙하게 말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액트업 파리’ 활동가 모두다. (진짜 있을 법하기 때문에 더) 단순히 드라마로 따져도 매력적인 캐릭터 들이지만, 비중과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션과 나톤이, 개인적 관계나 감정이 주를 이루는, 픽션 성격이 강한 주연들이라면, 아델 아에넬의 소피는 정말 그 당시 활동가 같다. 원래의 탁한 보이스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비음을 섞어 귀에 꽂히도록 뱉고, 기습 시위 전 작전을 설명할 때는 빠르게 속삭이고, 선동할 때는 힘주어 갈라지도록 내지른다. 동의하는 의견에 손으로 딱딱 소리를 내면서도, 반대하는 의견을 열심히 들으면서도,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고등학교를 찾아가 ‘에이즈’ 예방 캠페인을 벌이며, 뺨이 찌그러질 정도로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피켓을 높이 들고 엑스트라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종이를 붙여서 넣으면 팩스를 받지 못한다’는 팁을 설명하며, 익살맞고 자신만만하게 씩 웃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자기가 뭘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능숙하여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러나 션의 죽음을 겪는 소피의 얼굴엔 자신감이 하나도 없다. 침대에 놓인 시체를 보고는 당황한 듯 정지한다. 입을 가리며 눈물을 글썽거리다, 휙 돌아 방을 나간다. 이후 진정돼 예의를 차리지만, 머뭇거린다. 능숙한 소피의 어쩔 줄 모르는 진심이 와닿는다. ‘션은 정치 장례를 원했는데 유골을 어떻게 할까요’라는 어려운 말을 꺼내는 것도 그다. 어려워하고 주저하면서도 정확히 설명한다. 이용하는 뉘앙스는 없다. 적절한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아델 아에넬은 뭘 어디까지 해본 걸까. 어쩌면 그렇게 죄다 잘 알고 있을까. 뭘 알고 뭘 몰라야 하는지조차.
소피와 프랑수아즈를 ‘혁명가’로 묶어 설명했으나, 말했듯, 프랑수아즈는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곧 한국에서 개봉한다. ‘타오르는 여인’. 영화 속 캐릭터의 초상을 묘사한 말이지만, 아델 아에넬이라는 배우에게 어울리는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여성, 배우, 아델 아에넬은 또 어떤 열정과 사랑으로 클리셰를 무너뜨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