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world does not deserve Viktor
(This world does not deserve Viktor Goraya….
빅토르가 이딴 세상에 살아 주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네가 남긴 혼돈>(Netflix, 2020)
<이어즈 앤 이어즈>(HBO, 2019)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 결말 포함
내 과몰입은 캐릭터와 쉽게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안데르를 다 쓰고 이제야말로 글을 쉬겠다며 엘리떼 시즌3과 스핀오프들을 보았다. 시즌4를 보려다 갑자기 아론 피페르가 나오는 엘리떼 크리에이터의 에스빠냐 막장 미니시리즈를 보았다. 어떻든 한 시즌으로 끝이 나는 이야기가 고팠다.
‘서로가 서로의 뒤를 봐주는’(로이) 작은 마을 배경에 주인공은 특수한 곤경에 처한 ‘평범한’ 사람이라니 정말 스트레스 받는 설정 아니냔 말이다. 그냥 안데르 좋아로 끝날지 아론 피페르라는 배우에 관심이 생길지 궁금하기도 해서 틀었던 것이었는데- 1화부터 목적은 달성했다. 역시 틴에이저고 분장도 비슷한데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아론 피페르의 연기는 내가 감히 인정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였다. (이미 안데르를 썼으므로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아 이거 무슨 플래그인가..) 이아고는 완전히 비호감이었고 무서웠다. 다만 사랑에 빠진 얼굴엔 안데르와 유사한 데가 있었(으면서도 달랐)다. 이 배우에 대한 감탄과 찔끔찔끔 등장하는 로이에 대한 약간의 공감을 붙들고 한번에 쭉 다 봤는데…. 마지막화에서 과몰입이 터졌다. 당연히 이아고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겪은 폭력이 행한 폭력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내 마음을 뒤집어 놓기엔 충분했다. 얼굴을 구기며 우는 아론 피페르를 보면 안 울 수가 없다. 엘리떼에서도 그렇고 까를로스 몬테로라는 작가는 결국 근본적 잘못은 어른들에게 있음을 말하고 싶은 걸까. 그냥 혼란스러운 막장을 그릴 명분 같은 건가. 어쨌든 아론 피페르, 그를 배우로서 좋아하기로 결정. 뮤지션으로서는 아니다. Really.. not my thing…
다음 휴일, 엘리떼 시즌4는 저멀리로 미뤄두고 이어즈 앤 이어즈를 보기로 결정했다. (아 잊고 있었는데 그 사이 옆자리 괴물군이라는 걸 봤다. 다방면으로 차원이 다르게 끔찍한 와중 스다는 놀랍게도 홀로 귀여웠다) 나름 내가 과몰입해 감정적으로 지치지 않을 선택을 한 것이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물에 빠진 나이프를 보고도 엉엉 운 후 약간 쪽팔려했던 인간)
서사와 연출이 완벽한 작품 정도로 짐작했다. 현실적 공포를 주는 웰메이드 근미래쇼. 브리티시 중산층 대가족 이야기고 별로 내 취향일 인물은 없어 보임. 택한 까닭은 대충 그랬다. ‘그런 식’으로 현실적이면 오히려 차가워질 것이라고 여겼는데.. 또 냉정 유지에 실패했다. 예상치 못했다, 캐릭터가 죄다 매력적이었다. 내 최애는 (당연히) 이디스 라이언스가 되었는데 그건 조금 나중 이야기고. 대니얼의 시선에 빅토르 고라야가 들어온 순간 아차 싶었다(?). 뮤리얼의 말대로 ‘아름다운 사람’임을, 첫 등장부터 알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예뻤다. 허나 핵심은 그 눈빛에서 묻어나는 태도였다. 지쳐 있었지만 당당하고 맑게 빛났다. 나도 모르게 어떤 티피컬 레퓨지 형상을 떠올렸는데- 의뭉스러운 구석 없이 대놓고 순수하게 플러팅하는 빅토르를 보며 부끄러워졌다. 그게 두 사람의 관계에 시작부터 권력이나 이해관계가 없었음을 드러냈달까. (“Endless, endless sex..!” -Viktor)
과몰입이 또다시 시작된 게 어디서부터였더라. 아마 뮤리얼이 빅토르의 부모님을 욕해주며 넌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할 때부터. 그리고 빅토르가 ‘그 문자’를 받았을 때 본격적으로(그러고 보니 술에 잔뜩 취해서도 문자를 바로 확인 했던 까닭이 뭔지 알 거 같아서 마음이 안좋다). 랄프는 스스로 멍청이임을 증명했다. 물론 먼저 잘못한 건 대니얼이었지만, 그게…. 다르잖아. 행동의 종류가 달라. 이후 대니와 빅토르의 삶은 우크라이나와 스페인과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위태로운 와중, 사랑은 굳건하다. 갇혀서도 유머와 차분함을 잃지 않는 빅토르가 존경스러우면서도, 이미 많은 것을 겪은 탓도 있는 듯해 안타까웠다.
이들의 드라마에 지루한 해피엔딩을 바랐는데. 15번 시체가 화면에 들어왔다. 꼭…시청자에게, 이건 현실이지 당신이 소비할 드라마가 아님을 번뜩 일깨우는 거 같았다. 그러나 대니얼-빅토르 서사만으로 봤을 때는, 가장 드라마적으로 슬픈 전개이기도 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폭발하거나 좌절하는 대니얼을, 화도 못 내고 댕그래진 눈으로 살피던 빅토르. 연인의 시체 옆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넋이 나가 반복해 중얼거리다가, (어떤 분이 유튜브 댓글로 ‘don’t know’라는 뜻이라고 해석해주셨다) 멍하게 ‘집’으로 ‘돌아와’ ‘할 일’을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할 새도 없이, 설명하고, 사죄한다. 그렇게 다음 화 예고 없이 4화가 끝난다. 그 후 사흘 동안 짬이 나지 않아 다음 화를 보지 못했는데, 퇴근길에 계속 그 해변 씬 클립을 돌려봤다.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그 죽음 자체 때문이기도 했지만- 빅토르가 앞으로 어떤 감정들을 맞닥뜨리게 될지, 이 작품이 그를 어디로 몰고 갈지 두려웠다.
빅토르는, 그렇게 대니얼의 레퓨지 보이프렌드로 사라지지 않는다. 독립된 인물로, 엔딩까지 등장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러려고 빅토르만 남겼구나. 이디스의 곧음이 진짜 고마웠다. 또 빅토르가 제 것이 아닌 죄책감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진짜 고마웠다. 왜 내가 고마운지 모르겠는데 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 (과몰입) 어스트와일에서 대니얼 이야기를 할 때의 표정을 보고, 빅토르에게 다시 반했다. 눈을 빛내며 입가에 미세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곧 슬픔이 뒤따르지만- 그는 말한다,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그는 물었었다, “Is this home?” 라이언스 패밀리는(특히 이디스) 그 답을 줬고, 스티븐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빅토르는 그걸 받아들였던 거다. 이들이 애쓰는 표면적 까닭은, 대니얼이지만- 이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얼굴이 화면에 잡힐 때마다 여러 까닭으로 눈물이 났다. 기죽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염치없게 굴지도 않는다. 누굴 이용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이거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해). 건강한 자기애가 있고, 세상에 대한 곧은 잣대가 있는 똑똑하고 아름다운 사람.
(사실 빅토르의 모든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부모님이 본인 리포트 했다는 얘기 할 때도 그분들은 그래야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말할 때 나는 정말….)
이 서사를 위해 대니얼이 죽었어야만 했는지 곱씹기는 했었는데, 픽션회로로 계산했을 땐 그게 ‘베스트’더라. 근데도 대니얼이 죽고 빅토르가 사는 전개를 ‘언짢아’하는 이들이 있을 거 같아서 걱정은 됐다. 다음은 그에 대한 러셀 토비(대니얼 라이언스 역)의 인터뷰.
“
(…토비 자신은 그 결정을 매우 반겼다.) 놀라웠어. (영국)사람들은 그런 전개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화를 냈지. 빅토르가 살아남아서 화가 났을 거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을 거고, 이랬겠지, ‘음, 그가 살아남아서 왜 화가 나는 거지? 나는 누가 살아남는 전개를 원했나? 그게 도덕적으로 뭘 뜻하는 거지? 서구인은 살아남고, 망명자는 죽어야 하나?’
(원래는 빅토르가 죽고 대니얼이 살아남는 전개였지만, 데이비스는 마음을 바꿨다.) 내가 작품 밖에 있는 입장이었다면,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했겠지만, 찍고 있는 와중이고,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끔찍한 아이디어고,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었지. (데이비스는 결정을 고수했고, 이건 미니시리즈니까, 당신 캐릭터의 죽음이 어쨌든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테이블 리딩을 할 때, 난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완전 나르시시스트가 돼선 훌쩍거렸어.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어. 약간 이랬어, ‘이건 내가 극복해야 할 문제야.’
여러분은 두 사람의 행복을 바랐겠지, 왜냐면 그들이 원했던 전부는, 지루한 삶,이었거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그게 다였어. 큰 꿈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그냥 지루하게, 함께, 살아가고 싶어했을 뿐이었어. 근데 그러질 못했지, 그게 너무 엄청나게fucking 비극적인 거야.
“
-Russell Tovey,
[vulture.com interview by Jackson McHenry]
작품 자체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용감하고 유쾌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포인트를 빅토르 고라야로 잡아서 이디스 라이언스 얘기를 충분히 못 했는데…. 이디스는 정말 총체적으로 멋졌다. 비비언 룩에게 보내는 묘한 기립박수랑, 투표 때 망설임 없이 지익 긋는 선이랑, 로지 애인을 협박하는 손놀림이랑, “스티븐은 빅토르를 사지로 몰아넣었어.”랑, “빅토르, 난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랑, “I AM LOVE”(루카 구아다니노 레퍼런스..로 혼자 착각해도 될까요..)랑, 다 최고였다. 이디스와 빅토르 각각의 씬 전부와 몇 없는 투샷 죄다 좋았다. 이디스에게선 내내 죽음이 어른거리고, 빅토르에겐 삶이 반짝이는데 그게 서로 잘 어울렸다.
빠질 만한 캐릭터가 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과몰입을 한다. (픽션에만 진심인 인간)
*참고 인터뷰
https://www.google.co.kr/amp/s/www.vulture.com/amp/2019/07/years-and-years-episode-4-death-russell-tovey-reactio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