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코리쉬 피자>(2021), <나이트메어 앨리>(2021), <이어즈 앤 이어즈>(2019, HBO) 전개 포함. 딱히 스포일러는 없음.
2. 25
하루에 영화관에서 두 개 이상의 영화를 보는 일은 잘 없다. 만약 정말 그래야 한다면, 순서를 잘 정해야 한다. 2019년, <신의 은총으로>와 <샐린저>를 한 날에 본 적이 있었다. 나름 까닭이 있었다. 샐린저는 궁금하지만 별로 글을 쓰고 싶을 것 같지 않은 영화여서, 사이 빈 시간에 신의 은총으로를 쓰다 샐린저로 마무리하면 괜찮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신의 은총으로는 마음을 올바르게 건드리는 작품이었고, 그것에 관해 열심히 쓰다 샐린저를 보러 들어갔다. 영화가 재생된 지 3분만에 이거 아니다 싶었는데, 나는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봐야 하기 때문에 그냥 있었다. 그리고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를 떠나, 너무 ‘내게’ 맞지 않는 영화였다. 낮의 여운마저 사라져버렸다.
며칠 전 <리코리쉬 피자>와 <나이트메어 앨리>를 한 날에 보았다. 이번 관람 순서는 완벽했다. 리코리쉬 피자의 느낌은 좋았고, PTA의 몇 작품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상쇄해 주었지만, 딱히 ‘내가’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알라나에 관한 글을 쓰는 동안 스피커에서 맥 밀러의 Small World가 흘러나와서, 그에 관해 잠깐 생각했다. 저녁엔 나이트메어 앨리를 보았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그날 밤과 다음날까지 간직하고 싶은 느낌을 주었다. 내가 또, 그런 음산하고 웅장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 루니 마라, 케이트 블란쳇, 토니 콜레트. 셋 다 쓴 적이 있는 배우들이다. 사람들이 그들 각자에게서 주로 기대하는 이미지를 입고 있었는데, 평면적이거나 대상화 된 캐릭터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셋 다 기대하면서도, 루니 마라의 경우 캐릭터 자체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몰리는 주인공 옆의 ‘예쁜 인형’이 아니었다. 루니 마라 스타일의 ‘강함’에 너무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2. 26
근미래의 영국을 다룬 HBO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군인이 정부를 점거해 독재를 시작하고, 소비에트 군이 키예프에 들어선다. 그 결과 정부의 표적이 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영국으로 넘어온다. 그 중에는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 고라야가 있다. 부모님이 아들을 신고해서 그는 영국으로 도망쳤고,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난민 마을을 관리하는 직원 대니 라이언스와의 사랑이 시작된다. 영국/서구 중심이지 않으려고 애쓴 작품이었는데, 그 결정적인 제스처는 빅토르와 대니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있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고, 지금 생각하니 러시아 정부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쓴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픽션,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한 침공은 현실. 푸틴은 여전히 자신이 곧 러시아인 양 행동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키예프 시장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전장에 나갔다. 배우 숀 펜은 우크라이나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누군가는 이 상황에 한국 대선을 가져와, 자신의 비유력을 뽐내는 데에 이용했다. 나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사이 역사나 현재 그곳의 정확한 상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편적인 사실들을 늘어놓고는 다 아는 양 ‘멋지게’ 만들어 놓은 문장들을 목격했다. 그것은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