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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11. 2019

오늘 키노를 ‘들었다’.

-영화: <레토(Leto)>


-‘키노(кино)’는 러시어로 ‘영화’라는 뜻이며, 빅토르 최가 속한 밴드 이름이었습니다. 키노의 첫 앨범 ‘45’를 들으며 글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래에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youtu.be/QWWyI7eYqpI


 
-영화: <레토(Leto)>(2018,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Feat.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1998, 토드 헤인즈)
 
*<레토>의 구체적인 장면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기도 전 이미 좋아하리란 예감을 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나에겐 <패터슨>(2016, 감독: 짐 자무쉬)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이, <메기>(2018, 감독: 이옥섭)가 그러했다. 앞의 영화들은 감독과 배우 둘 중 하나는 알고 좋아했는데.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유태오, 심지어는 빅토르 최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레토>의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가자마자 또 보고 싶어지리라는 것을.



<레토>(2018) 포스터.


 
생각보다 상당히 밝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빅토르 최를 몰라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진다. 뮤지션은 국가를 위해 재능을 바쳐야 한다고 당이 강요하는 옛 소련의 팔십년대 레닌그라스(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클럽에서 공연하려면 가사를 검열 받아야 했고, 관객 호응도 금지였다. 감독은 그 속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즐겁게 음악을 하던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나보다. 현실이 우울할 땐 초현실로 분위기를 띄워서라도. 지금의 우리가 보면 귀엽고 스타일리시한 ‘영화’일 따름이지만, 당시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지가 않다. 아니 거기까지 시간을 돌리지 않고,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레토>를 찍던 중 가택구금 됐다는 것만 떠올려 봐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레토>(2018) 스틸컷. 왼쪽에 ‘안경 쓴 남자’가 보인다.


유태오 배우가 인터뷰(씨네 21)에서 한 말처럼, <레토>에는 연극이나 뮤직비디오에서 사용하는 요소들이 많다. 연극에서처럼 관객에게 말을 거는 ‘안경 쓴 남자’가 존재한다. 초현실적인 연출 끝에, “이건 없었던 일이야”, 라고 말하며 작품의 배경이 된 이야기가 실재한다는 것을 강조해 분위기를 환기한다. 기차 안, 마이크와 빅토르의 친구들에게 늙은 승객이 적국의 음악을 한다면서 시비를 건다. 경찰은 오히려 대응한 친구를 잡아가려 한다. 맞아 피를 흘리는 친구의 이마에 ‘안경 쓴 남자’(이 부분에서는 안경을 벗어 손에 들고 있다.)가 키스하자, 그는 ‘Psycho Killer’(Talking Heads)를 부르기 시작한다. 시비 거는 사람들과 경찰, 그들을 빅토르와 친구들이 피하고 물리치는 신나는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그 끝에 ‘안경 쓴 남자’가 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잡힌다. 적힌 말은 ‘이건 없었던 일’ 이다. 그는 빅토르와 나타샤가 승객들이 ‘Passenger’(Iggy Pop)를 부르는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클럽에서 마이크의 노래에 관객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와 관리자들이 열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장면의 끝에도 등장해, ‘이건 없었던 일’, 이라고 말한다. 어쩐지 아쉽다. 한껏 관객의 마음을 부풀려놓고는, ‘이건 실제 있었던 일이고, 이런 벅찬 건 다 가짜야.’ 라고 감독이 직접 환상을 깨 주는 것 같았다. 흑백이거나, 컬러이지만 필름카메라로 흔들리게 촬영해 그 질감이 묻어나는 화면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을 더한다. 나처럼 당시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묘한 간접경험을 선사하고, 기억하는 이들에게는.........감히 예측할 수 없다. 어떨까.


키노 첫 앨범 ‘45’ 커버.


<레토>를 본 후 키노(кино)의 첫 앨범을 듣고 또 들었다. 키노의 초기 곡들은 시적인 가사와 함께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당시의 로큰롤 명곡들이 스타일리시함을 더한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에는 현장이 대사까지 그대로 녹음되어 있어, 듣고 있으면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레토>에서 삽입곡은 단순히 배경으로 쓰이지 않는다. 음악이 영화의 가치를 높이고, 영화가 음악의 가치를 높인다. 독특하고 탁월한 방식으로 화면과 곡을 꿰매어 놓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Passenger’나 ‘Psycho Killer’신이 그 예다. 익숙한 곡을 부르는 인물들에게 만화적인 효과와 연출을 입혀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을 낸다. 곡 제목과 가사까지 화면에 적어놓았으니 말 다했다. <레토>는, 보는 것만큼 듣는 것이 중요한 영화다.


https://youtu.be/oEIBK6upPbE

‘Psycho Killer’ 신.


https://youtu.be/elNbnGe67ps

‘Passenger’ 신.


<레토>가 빅토르 최에 대한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는 주변 사람의 시선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그려진다. 마이크나 나타샤처럼 혼자 감정을 드러내는 신은 없다. 두 사람의 이야기나 빅토르에 대한 감정이 오히려 더 드러난다. 빅토르는 주로 노래를 부르거나 먼 곳을 응시한다. 개인적인 역사나 구체적인 감정은 작품을 통해 알 수 없다. 곡을 만드는 과정조차 나오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쓴 거야.” 등의 한두 문장 정도를 뱉을 뿐이다. 영화를 다시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일인칭 시점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속을 알 수가 없으나 그만큼 특별한 분위기가 감돈다. 빅토르 최를 기억하는 사람의 글에서 비롯된 작품이어서 일수도 있겠으나, 감독과 함께 빅토르 최를 해석할 때 ‘시적인 느낌’이 있었다는 유태오 배우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18.01.06 아트나인 GV)



<레토>(2018) 스틸컷.



다만 음악적인 부분은 조금 드러난다. 빅토르는 음악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드럼을 녹음해 쓴다는 말에 마이크가 디스코냐고 핀잔을 주자 “디스코가 뭐 어때서? 보위도 디스코 했어.” 라며 따진다. 로큰롤 펑크 진짜 가짜 뭐 그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허나 자신의 곡에 대한 자부심은 강하다. 동료가 곡이 동요 같다며 바꿔야겠다고 하자 “왜 내 곡을 바꾸려고 해?” 라고 말하며 나가버린다. 클럽 공연 승인을 받기 위해 빅토르의 가사가 풍자적인 내용이라며 속여 설득하는 과정에서 ‘코미디 밴드’라는 단어가 나오자, 바로 “코미디 밴드 아니에요.”라고 대응한다. 공연 직전에 동료에게 프릴 셔츠를 입으라고 하거나, 마음대로 곡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감각있고 고집 센 천재 같았달까. 허나 어디까지나, <레토>의 빅토르는 영화 캐릭터 빅토르다. 그를 통해 진짜 빅토르 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는 있지만 진짜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레토>(2018) 스틸컷.


 
한국에서는 역시 빅토르 최를 연기한 유태오 배우로 마케팅을 하기에, 부러 연출이나 이야기 구성에 집중해서 보려고 했다. 헌데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순히 내 스타일이라서가 아니라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시선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쭈뼛거리다가도 자신 있게 기타를 치며 노래에 집중하거나, 다가오지 말라는 듯 굳히고 있다가 수줍게 씩 웃는 얼굴 같은 것.
 


<레토>(2018) 스틸컷.


가사를 검열하다 ‘담배 피는 블루칼라 같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클럽 오너에게 빅토르는 말한다. “맞아요.” 그는 목공이었고, ‘담배 피는 블루칼라’ 였으며, 뮤지션이었다. 유태오는 그 짧은 순간의 표정에 모든 것을 담아낸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가 빅토르 최 같은 ‘소울’을 가졌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노래하는 모습에 뭔가가 있다는 건 말할 수 있겠다.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것이지만, 무대에서든 방안에서든 노래하는 연기가 대충 입만 뻥긋거린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유태오 배우가 기타와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했을 장면들이다.



<레토>(2018) 스틸컷.


사실 나의 경우도, <레토>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까닭이 유태오의 얼굴이긴 했다. 빅토르 최로 분장한 그가 흑백 화면에 담긴 모습이, 상당히 구체적인 나의 외적 취향을 만족시켰다. 그 후 작품 소개를 보다 ‘데이빗 보위’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이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가 언제 신 안 믿는다고 했죠? 저의 신은 데이빗 보위입니다.) 삽입된 보위의 곡은 ‘Ashes to Ashes’와 작곡 작사를 맡은 ‘All the Young Dudes’(Mott the Hoople)가 전부지만, 나타샤가 처음에 마이크의 집에 보위를 들으러 간 것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이나, 앞에도 말한 “보위도 디스코 했어.” 신처럼 구체적인 언급이 많이 되고, ‘Aladdin Sane’이나 ‘Scary Monsters’ 등의 앨범 커버도 등장한다. 아니 어쩐지 데이빗 보위 팬심이 너무 묻어나는 글이 되어버리고 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얘기해보자면,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토드 헤인즈의 <벨벳 골드마인>(1998)이었다. 비록 보위의 승인을 받지 못한 각본이라 그의 곡을 사용하지 못했다지만, 주연배우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부른 'Tumbling Down'을 비롯해 작품에 담긴 곡들도 모두 좋아한다. 이후 보위에 대해 알아보고 나서는 <벨벳 골드마인>과 데이빗 보위 각각을 다른 느낌으로 좋아하고 있다. <벨벳 골드마인>에서 데이빗 보위로, 보위에서 <레토>, 다시 빅토르 최로 이어지는 고리. 음악과 영화는 역시 떼어놓을 수 없는 예술인가보다.


데이빗 보위 ‘Scary Monsters’ 앨범 커버.



 
좋은 음악영화를 찾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레토> 같은 영화를 만들어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현장의 역사와 음악에 빠삭하고 연출능력이 탁월하며, 그 요소들을 어떻게 종합해 작품에 담을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기 팝, 티렉스, 데이빗 보위, 토킹헤즈, 벨벳 언더그라운드. 이 이름들 중 하나에라도 반응이 온다면, <레토>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로큰롤을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 보고 나면, 분명 빅토르 최가 궁금해질 것이다.



<레토>(2018) 스틸컷.


*참고 인터뷰: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2067#_enliple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데이빗 보위 작사 작곡’ 이라는 ‘안경 쓴 남자’의 해설과 함께 나오는 ‘All the Young Dudes’의 편곡(부른 건 Shortparis 인데 편곡도 그들이 했는지는 모르겠다.)은 최고 너무 최고.


https://youtu.be/hiOWxlzOe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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