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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Feb 02. 2019

밤 골목길에 서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삶들에 대해.

-영화: <얼굴들>(2017, 감독: 이강현)


<얼굴들>(2017) 포스터.


누군가들의 일기가 모여 만들어진 영화 같았다. 다른 이의 삶을 진짜로 훔쳐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작품은 일상 그대로를 그려넣는다. 얼핏 필요해 보이는 것은 생략하고 필요 없어 보이는 것을 담는다. 인물들은 선크림에 관한 대화를 하며 인적이 드문 곳에 머문다.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이 됐다. 현실의 삶을 닮아 있는데도, 닮아 있어서. 사건들이 모여 결론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얼굴들>(2017)


이 장면은 무엇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저건 무슨 뜻인지, 따위의 질문과 해설들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딱히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이 작품에는 없다. 있어도 굳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혜진과 기선의 이별, 진수 아버지의 죽음과 홀로서기 등의 과정이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사건’간의 관계를 어떤 인과에 따라 끼워 맞추지 않고 다만 담담히 따라간다. 명확하게 설명될 필요도 없고 사실 그럴 수도 없는 일상의 부분들을 보여준다. 굳이 특별하게 찍지 않아 특별하게 만든다.


<얼굴들>(2017)

각 인물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릴 수도 있었겠지만 감독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음으로써 식상함을 탈피한다. 이것은 혜진의 가게 리모델링 성공 스토리가 아니며 진수의 역경 극복 드라마도, 현수나 기선의 자아 찾기 프로젝트도 아니다. 감독과 배우, 관객이 실제로 겪을 법한 일들을 일상의 톤으로 연출한다. 대본 속에서만 살아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네 사람이 어딘가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얼굴들>(2017)


이제까지 했던 작품과 감정이 달랐다는 윤종석 배우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굵직하고 목표가 분명한, 명확한 감정이 아니라, 자잘하고 복잡한 감정들이었다고. 실제 세계의 감정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나. 이사할 때 사진은 다 버리면서 어머니가 다쳤을 때 연락하게 되는 전 애인에 대한, 귀찮고 어색하지만 건네준 사진을 보고 웃게 되는 어른에 대한, 구역을 따낼 정도로 열심히 했지만 갑자기 그만두고 싶어진 직장에 대한 감정들.


<얼굴들>(2017)


카메라가 캐릭터 자체를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위적으로 엮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흐름을 따라간다. 그래서 배우와 캐릭터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백수장 배우의 (감독 마음에 들었다는)걸음걸이와 굽은 목, 박종환 배우의 어딘지 힘 빠지고 어색한 말투 등, 보통 ‘결점’이라고 여겨질 만한 요소들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결점도 아니고, 고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어쩌면 앞으로 대세가 될 연기와 연출일지도 모르겠다. 미디어가 정해 준 표준적으로 잘생긴 외모와 품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간 개개인 고유의 특징을 매력으로 이끌어내는.

<얼굴들>(2017)


인물마다 나오는 빈도수는 달라도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딱히 없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트럭에서 찾은 누군가의 다이어리를 현수가 읽으며 그 누군가의 일상 또한 네 인물의 삶과 동등하게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극영화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이면 안되는지, 영화로 만들 만한 삶은 뭐고 아닌 건 뭔지. 작품은 질문을 던진다.


<얼굴들>(2017)

윤종석 배우가 자신과 진수가 닮아있다는 말을 하면서 넓고 높은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자기 환경에서 가능한 생활을 유지하는 정도로 사는 삶이 뭐가 어떠냐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남들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사는 진수-감독이 하려던 건 아마 그런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얼굴들>이 뭔가를 이루고 해결하고 끝맺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대부분의 삶이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점을 향해 직진하는 것이 아닌, 밤 골목길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는 삶들. 감독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너와 나의 ‘얼굴들’을 담고 싶었나보다.


<얼굴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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