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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r 01. 2019

그는 어떻게 ‘잭’이 되었나.

<살인마 잭의 집>(2018)



-영화: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감독: 라스 폰 트리에)

Feat.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도그빌>(2003), <님포매니악>(2013), <멜랑꼴리아>(2011)

<한니발> 시리즈 (NBC), <나는 연쇄살인범이 아니다>(2015),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2 (CBS)


* <살인마 잭의 집>,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도그빌>(2003), <님포매니악>(2013), <멜랑꼴리아>(2011)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포스터.


라스 폰 트리에는 항상 엄청난 위악을 두르고 이야기를 만든다. 영화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있을 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항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표현의 한계까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는, 얼마 전 개봉한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으로 안티들의 분노게이지를 끝까지 올렸다.

이제까지 그는 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인간의 악한 면을 드러내는 작품을 만들었다. 묘사가 너무 잔인하고 적나라해서, 그 핑계로 그냥 자기가 찍고 싶은 걸 찍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많았다. 그런 말들이 지겨웠는지 이번에는 아예 그 싸이코적인 폭력을 행하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세워 버린 것이다.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스틸컷.


초반에는 살인 후 강박적으로 청소하는 어설픈 모습을 통해 웃음을 주기도 하는 주인공 ‘잭’은, 뒤로 갈수록 관객석에서 웃음기를 앗아간다. 감독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될 것’으로 여겨지는 아이 살인 까지 건조하게 화면에 담는다. 사실 살인과 시체훼손의 잔인한 정도는 보통 범죄 드라마와 비슷한 정도다.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꼈던 까닭은 시선 때문일 것이다. 연쇄살인범 잭의 시선을 통해 살인을 다루기 때문에,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그의 사고가 여과 없이 전달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설명의 언어에서 범죄적 뉘앙스를 배제한다. 소제목에서 사용하는 단어도 ‘murder(살인)’가 아니라 ‘incident(사건)’다. 한국어 번역 제목에 ‘살인마’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 어긋난다. 포스터에 그릴 글자 집의 구색을 맞추려고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다.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국내개봉 포스터.



뜬금없지만, 영화 시놉시스를 봤을 때부터 NBC 드라마 <한니발>이 생각났다. <한니발> 또한 ‘살인마’의 시선에서 살인을 다룬다. 헌데 그를 우아하게 그려놓아, 한니발과, 심지어 그 방식에 빠져들게 만든다. 한니발은 감각이 풍부해 여러 예술 분야를 잘 알고 사랑하며, 미식가에, 말도 잘하고, 옷도 잘 입고, 적당히 깔끔해 매력적이다. 그가 사람의 고기를 요리하는 모습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보다 보면 혼란스럽다. 사람을 먹고, 시체로 모형까지 만드는 한니발인데,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진다. 잭은 다르다. 강박적으로 깔끔하고, 연습해야 얼굴에 감정을 드러낼 수 있으며, 살인 할 때 외에도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잭이 살인하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혐오스럽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의도적으로 관객이 화자를 혐오하게 만들어 정신을 바짝 들게 한다. <한니발>이 문제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대조를 통해 감독의 의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나 또한 <한니발>과 한니발 렉터 박사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다.) 감독은 관객이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를 바랐을 것이다.


대놓고 여성을 혐오하고 히틀러를 기리기도 하는 인물 잭을 창조한 감독의 생각이 잭과 같으냐면, 그건 알 수가 없다.(<멜랑꼴리아> 이후 감독이 한 히틀러 발언의 뉘앙스는 잭과는 다르다고 본다.) 꼭 주인공이 자기 입으로 주제를 말하는 건 아니다. 정말 라스 폰 트리에가 핑계를 대고 자신의 욕망을 찍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잭이 스스로를 일컫는 ‘sophisticate’는 ‘교양 살인마’ 로 번역되었지만 사실 이중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는 말이다. 어원은 그리스의 ‘sophist’, 즉 ‘궤변론자’이며, ‘교양 있는 사람’을 뜻하는 동시에 ‘궤변을 늘어놓다’라는 의미도 된다. 잭 스스로의 논리를 파괴시키는 말이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잭으로 내리친 순간부터 ‘잭’이 되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현상이나 도구, 폭력 자체를 의미한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스틸컷.


잭은 자신이 사람을 ‘재료’로 작품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 잭이 지은 집의 토대는 폭력이며 기둥은 타인의 고통이다. 그는 공감능력이 없는 인간이며,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사실 그 자체가 범죄는 아니다. 대조하기 위해 이전에 썼던 글에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불러오면, ‘단지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것뿐이다’. <나는 연쇄살인범이 아니다>(2015)의 존은 소시오패스 판정을 받았지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 2>(CBS)의 네이든은 가학적 성향을 억누르려고 노력한다. 잭의 문제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감의 결여가 폭력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잭’이 된 것이다.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스틸컷.


자꾸 한국어 번역에 트집을 잡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지만, 역시 ‘살인마’라는 표현은 걸고 넘어져야겠다. ‘살인, 마’ 는, 살인을 저지른 존재를 ‘악마’로 규정해 ‘보통’ 사람들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헌데 그들도 인간, 우리 중 하나다. 지금이야 살인이 ‘평범한’ 행위가 아니지만, 파시즘이 ‘대세’였던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이 대량학살에 가담했다. 한나 아렌트의 연구가 말해주듯, 자칫 사유의 끈을 놓으면 인간은 언제든, 범죄로 간주되는 것이든 아니든,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을 지닌다. 그 순간 누구든 잭이 될 수 있음을, 작품은 경고한다. 반대로 ‘폭력을 극복할 가능성은 공감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스틸컷.



역시, 라스 폰 트리에 영화의 핵심은 마지막이다. <도그빌>에서는 그레이스가 “I was arrogant dad.”이라는 대사와 함께 모두를 죽였고,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어쨌든 베스는 결국 죽었으며, <님포매니악>에서 조는 자신을 지지하고 변호해줬던 남자가 강간하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총을 쏜다. <멜랑꼴리아>에서는 멜랑꼴리아가 지구를 날려버린다. 내가 본 것만 꼽아도 인간이 파멸하거나 뭔가 이제까지 쌓아왔던 게 다 무너지는 결말이 대다수인데, 영화적으로 완벽하다.
 
<살인마 잭의 집>도 마찬가지다. 잭의 논리를 통해 ‘살인도 예술’이라는 결론을 낼 것만 같았던 이 작품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잭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게 만든다. 예술이라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묵살했던 잭이,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벽을 기어오르는 모습은 우습다. 결국 그는 지옥불로 떨어지고, 그 장면은 잭이 그토록 찬양했던 네거티브 필름으로 화면에 담긴다. 이후 경쾌하게 흘러나오는 ‘Hit the Road Jack’(Ray Charles)은 잭을 조롱한다. 예술엔 윤리가 없다며 인간을 재료로 작품을 만들었던 잭은, 스스로가 그 논리로 작품에 담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잭은 지옥불에 빠지며 조금이라도, 자신이 생명을 앗아간 이들의 고통을 이해했을까.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스틸컷.


혹은 잭이 감독의 위악적인 분신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잭이 지은 집은 감독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비유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집을 관객에게 던져놓고, 예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논하고 싶었던 걸까. 대놓고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편집해 넣어, 아티스트의 표현방식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냐, 당신들은 나를 손가락질하는데 그게 정해져 있냐, 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자신의 작품을 잭의 살인을 통해 극단적으로 비유하는 동시에 선을 그어 두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적어도 내 폭력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 실제 폭력과 허구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만 떠들어라, 라고 방어막을 친 것일지도. 자신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내면의 악마를 허구로 표현하는 것. 그게 위선을 떨다가 실제 폭력을 가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 스틸컷.


+ 첫 번째 피해자에 대한 쓸데없는 사유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우마 서먼이 연기한 첫 번째 피해자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물론 당연히 죽을 만한 사람은 없지만-꼭 잭의 성향을 꿰뚫어보고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계속 싸이코패스 살인자 같다고 말하고, 무리한 부탁을 하는 등 막무가내로 겁 없이 행동한다. 어쩌면 그저 잭이 싫어할 만한 인간상을 그려 넣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녀의 말대로 잭은 그녀를 잭으로 내리치게 된다. 잭은 순간 희열을 느꼈겠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가로등 사이에 선 남자에 비유했듯 끝없는 고통의 굴레에 빠진다. 다른 피해자들과 그녀를 다루는 카메라는 분명 다르다. 이후의 카메라는 집요하게 피해자들의 두려워하고 불편해하는 얼굴을 담는데, 첫 사건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잭이다. 잭이 차를 멈추고 살해하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잭이 처음에는 죽일 의도가 없었기 때문일까. 과연 그녀는 뭐였을까, 죽고 싶은 사람이었을까, 잭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또 다른 매개였을까. 사실 숨겨진 뜻이 없을 가능성이 높지만 괜히 자꾸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 영화에 데이빗 보위 곡 쓰는 것 반칙입니다. Fame이 흘러나오는 순간 기분이 보위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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