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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07. 2019

‘매즈 미켈슨의’ 잔인하게 따뜻한 생존기.  

-영화: <아틱(Arctic)>(2018, 감독: 조 페나)  



* 위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틱>(2018) 포스터.



<아틱>의 소재는 사실 영화적으로 딱히 신선하지는 못하다. 분류하자면 재난영화, 극한 생존기다. 하지만 좀 다르다. 뜨겁게 휘몰아치지도, 차갑게 얼어붙어 있지도 않다. 극적인 사건들은 존재하지만, 절제된 톤으로 관찰하듯 그린다- 잔인하게도.


<아틱>(2018) 스틸컷.


감독은 재난영화 특유의, 마침내 삶의 희망이 보이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오버가드가 불을 피우고, 점퍼까지 태우며 목이 나가도록 소리지르지만, 헬리콥터는 가버린다. 타오르는 불의 열기에 아지랑이가 생겨 헬리콥터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얼굴로, 다친 여자에게인지 자신에게인지 모를 “It’s okay.”를 연신 중얼거리는 모습이 더 속상하다. 손을 잡은 채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두 사람의 배경에 떠난 줄 알았던 헬리콥터가 들어오며 영화가 끝난다. 관객은 희망에 벅차오르지도, 완전한 절망에 울음을 터트리지도 못한 채,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오는 묘한 상태로 극장을 나서게 된다. 감독은 관객의 마음을 갖고 놀 줄 아는 짖궃고 능숙한 스토리텔러다.      



<아틱>(2018) 스틸컷.


거의 모든 장면이 흰 눈으로 덮여 있다. 영화는 오버가드가 사고를 당한 경로는 생략하고, 이미 북극에서의 ‘일상’이 생겨버린 상황에서 시작한다. 말 없이 땅을 캐고, 신호기를 돌리고, 낚싯대를 살피는 등의 일을 반복하는 오버가드의 표정은 피곤한 듯 차분해서 슬프다. 가끔 눈물로 빛나는 눈이나 동상으로 떨어진 발가락이 화면에 잡히며 그의 상태를 조용히 표현한다.
 

<아틱>(2018) 스틸컷.


극한에 놓인 오버가드에겐 ‘최소한’이 남아있다. 살아남으려고 애쓰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날로 생선을 먹더라도 살을 조금씩 잘라 칼을 포크처럼 사용해 입에 넣고, 컵라면을 급히 뜯어 손으로 집어먹으면서도 한 입씩 베어 물고 음미한다. 배고픔과 추위에도 조바심내지 않고, 똑똑하게 천천히 차근차근 살아간다. 있던 줄로 만든 낚싯대나, 헬리콥터 문짝으로 만든 썰매 같은 것을 보면 예술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생존자가 있음을 알리는 글씨에서조차 침착한 단단함이 묻어난다.


<아틱>(2018) 스틸컷.


그리고 그 ‘최소한’은 다른 방향으로도 발현된다. 오버가드는 자신을 구하려다 눈보라에 휘말려 사고를 당한 헬리콥터 안에서,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최선을 다해 간호한다. 죽은 조종사의 외투는 벗겨내더라도,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준다. (사고가 그의 탓은 아니지만) 약간의 죄책감 떄문이라고 하기에는, 동작과 표정에 망설임이 너무 없다.
 

<아틱>(2018) 스틸컷.



다친 사람을 돌보기 시작한 이후로, 오버가드는 ‘We(우리)’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헬리콥터 승무원은 거의 정신을 잃고 누워 있지만, 행동의 주체를 ‘우리’로 설정한다. 혼자서는 갈 수 있지만 다친 사람을 끌고 가기는 어려운 고개 때문에 길을 바꿀 때도, “We’ll take it by the way.”라고 말한다. 자신이 ‘끌고’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간다고 생각했기에, 어쩌면 그 차갑고 긴 길을 걸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런 ‘교훈’을 주려는 듯, 오버가드는 거의 죽어가는 일행을 포기하고 길을 떠난 순간 구덩이에 빠져 다치고 만다. 겨우 그녀 곁으로 돌아와 울며 “I’m sorry.”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사실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는 그런 사람이다. 얼어붙은 북극에서 두 사람의 체온과 오버가드의 마음만이 따뜻했다.


<아틱>(2018) 스틸컷.


‘그런 면에서’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보다 못한 것 같다. 오버가드가 돌보는 다친 사람이 ‘젊은 여성’ 이라는 설정에 특정한 뉘앙스가 있다고 해석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보다가, 엔딩크레딧에서 ‘young woman(젊은 여자)’ 이라는 캐릭터 네이밍을 보고 확신했다. 이름도 없고, ‘헬리콥터 승무원’, 아니 ‘다친 사람’ 조차 아닌, ‘젊은 여자’ 라니. 역시 보호하고 돌보는 대상은 젊은 여자여야만 하는 건가. 심지어 사고로 죽은 남자 조종사의 네이밍은 ‘헬리콥터 조종사’다. 작품 자체에서는 사실 크게 알아채기도 힘들고, 어차피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여자’ 보다는 ‘다친 사람’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문제삼을 거리도 못 되는 정도였는데, 엔딩크레딧이 말아먹었다.
 
 

<아틱>(2018) 스틸컷.


고작 캐릭터 네이밍 때문에 초를 치긴 했지만, 극한의 배경이나 재난영화가 취향이 아닌 내게도 와닿는 부분이 있는, 잔인하게 따뜻한 생존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매즈 미켈슨이 없었다면 이 영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장담해본다. 그는 후반부에 극적인 표정을 몰아넣어 집중도를 높인다. 초반의 반복되는 행동은 지루함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눈 속에서 깊게 빛나는 매즈 미켈슨의 아름다운 얼굴과 단단하고 정확한 연기가 작품에 흥미를 잃지 않게 해 준다. 뒤로 갈수록 고생하는 오버가드의 모습을 보기가 굉장히 힘들어지지만, 매즈 미켈슨은 그 고통을 실감나게 연기해서 관객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동시에, 바로 그 훌륭한 연기 덕에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다. 그리하여 매즈 미켈슨은 다시 한 번, 홀로 화면을 이끌어 완성한다. 그의 작품을 꾸준히 찾을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덧붙이자면 극장 화면으로 본 매즈 미켈슨은 너무도 황홀했다.)


<아틱>(2018)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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