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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14. 2019

리사와 지미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2018, 감독: 사라 콜란겔로)
 
* 위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천재가 ‘좋은’ 교사를 만나 성공적으로 ‘발굴되는’ 영화나 소설은 흔하다. 흥미롭다- 천재는 드물어서 더 특별하게 여겨지는데, (실화 바탕이든 완전한 픽션이든) 천재를 다룬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니. 그만큼 쉽게 드라마틱한 전개를 이끌어내 안전하게 재미있을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택한 것은 안전한 재미가 아니다. 공식에 자꾸 변수를 집어넣는다. 문제를 ‘극복’하거나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질질 끌어 자국을 남긴다.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말하자면 ‘실패’ 스토리이고, ‘천재를 질투하는 평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 어떤 말로도 정의하기 쉽지 않다. 복잡하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포스터.


원제는 ‘The Kindergarten Teacher(그 유치원 교사)’다. 제목을 좀 더 잘 바꾸거나, 차라리 직역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제목만 보고, 시를 주고받으며 따뜻함을 나누는 교사와 아이의 모습을 기대했던 관객이 있었다면, 예상과 매우 달랐을 것이다. 나는 그와 다른 것을 기대했고, 그 기대조차도 깨는 무언가를 보았기에, 불편하게 요동치는 영화적 경험을 얻었다. 작품이 끝나자 여러 물음이 떠올랐다. 예술적인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천재’ 아이의 교육과 앞날에 대한 판단은 누구의 몫인가? 상식이란 무엇인가? 어떤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커다란 고민들은 뒤로 한 채, 리사와 지미의 마음에 대해서만 자꾸 생각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그 유치원 교사’의 이름은 리사 스피넬리. 예술적 재능은 없고, 딸과 아들은 기대를 따라주지 않지만, 평범하게 행복하다. 허나 리사가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지적이고 예술적인 자극으로 가득한 삶’이다. 히피스러운 리사의 옷차림은, 물론 그저 패션 스타일이겠으나, 예술적이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이나 얽매임을 나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극이 자기 자신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자 지미에게 모든 것을 건다. 리사의 지미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순수하게 재능을 키워 주고 싶어하는 것도, 순수하게 질투만 하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는 떼어 놓을 수 없다- 부모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심리와 연결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지미에게 자신이 쓴 시를 읽어주는 리사의 표정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보다, ‘지미를 붙잡아 놓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리사는 더 무너진다. 낭독회에서 시가 지미의 것임을 고백하는 리사의 눈은 흔들리지만 당당하다. 그녀가 버티지 못한 순간은 ‘애나’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다. 화장실까지 따라온 지미의 물음(“Why are you upset?”)이 억누르지 못한 눈물을 더 안타깝게 만든다. 오히려, ‘당신은 아티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강사로부터 듣는 리사의 눈은 극적이지는 않다. 이미 스스로 인정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조각나는 마음을 붙잡느라 일부러 더 그렇기도 하지만.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결국 지미가 리사에게 ‘납치당했다’는 말을 꺼내고 경찰에 전화하게 만드는 전개는, 리사를 바닥까지 무너지게 만든다. (‘pathetic’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은데, 한국어로 어떻게 옮겨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불쌍하기도 하고 비참하고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또 이해되기도 하는 여러 가지가 섞인 느낌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리사의 행동은 맹목적이고 상식에 어긋나지만, 지미에게 경찰 번호와 주소를 먼저 자진해 알려줌으로써 적어도 어떤 기준을 보이고, 판단을 더 어렵게 만든다. 끝까지 거짓말을 지속하지도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도, 그렇다고 갈 데까지 가지도 않는다. 리사의 감정과 행동처럼 그녀를 보는 관객의 마음도 복잡하다. 작품은 리사를 완전히 동정하거나 혐오하지 못하게, 애매하게 공감하다가 고민하게 만든다. 비참하게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리사의 마지막으로 남기지 않은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영화가 자체적으로 심판해버리지 않고, 관객에게 판단의 무게를 남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역시 인간의 감정은, 특히 아이는 오히려 더,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작품은 탁월하게 드러낸다. 지미는 리사를 따르지도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 태도는 관객의 고민을 깊게 만든다. 주로 리사의 시선으로 전개되었던 이야기는, 가끔 알 수 없는 지미의 눈을 보여준다. 감독은 어린 배우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아 자연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거의 심각한 무표정이고, 카메라와 눈을 잘 맞추지 않고, 목소리에 구체적인 감정이 잘 없다. 별로 울거나 웃지도 않고, 피곤해하거나 약간 들뜨는 정도다. 그런 담백함이 신비로운 시인과 어린아이를 동시에 드러내고, 리사의 풍부한 표정과 대조되어 작품의 분위기에 균형을 부여한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옷을 입겠다는 리사의 말에 걸었던 문을 열어 준 지미는, 그녀의 슬픈 표정을 보고 슬며시 손을 잡는다. 리사가 보고 싶었고, 수영은 즐거웠지만, 납치당했다는 생각은 든다. 약간은 무섭고, 약간은 즐겁고, 약간은 집에 가고 싶고, 또 약간은 리사가 걱정되고, 그런 복합적인 심리가 지미의 작은 손에 묻어난다.
 
경찰의 팔에 안겨 차에 태워진 지미는, 리사에게 해왔듯 ‘시가 떠올랐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반복되는 지미의 말과 함께 화면이 검게 꺼진다. 리사가 옳았다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그 순간만큼은 울컥한다. 내내 속의 떨림을 붙잡고 있다가 쿵 내려놓게 만드는 힘이 마지막 장면에 있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아마 시를 쓰도록 격려하고 지원하지 않더라도 지미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재능은 그렇게 사라질 수도, 나중에 다시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어쩐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던 지미의 마지막 표정과, 또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다급했던 지미의 목소리가 자꾸 심장 어딘가를 떠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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