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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29. 2019

사랑과 절망 사이에서

<퍼스트 리폼드>


 
-영화: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2017, 감독: 폴 슈레이더)
 
* 위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퍼스트 리폼드>(2017) 포스터.


 
톨러가 잔에 담긴 술을 바닥에 비우고, 걸쭉한 화학 약품을 가득 따를 때, 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것을 들이키고 쓰러졌다면, 나는 ‘예상대로’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깨졌다. 메리가 들어오고, 톨러는 잔을 떨어뜨린다. 둘은 서로에게 다가가 껴안고, 키스한다. 그 긴긴 키스를 보며 다른 성질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군가는 메리와 톨러의 입맞춤을 보고, 저게 뭐야 하고 벙 쪘을 수도 있겠다. 내겐 그 ‘저게 뭐야’ 자체로 굉장했다. 이상하고 불편하고 찝찝한 그대로 완벽했다. 뱀파이어나 디멘터의 키스처럼 상대를 파괴하는 키스 같기도, 자기파괴나 작별인사 같기도 했다. 영적 교감 같은 게 들어있으면서도 적나라했다. 체면 차리지 않고 서로를 빨아들일 것처럼 입을 맞추는 모습이 돌고 도는 카메라에 담기는데, 로맨틱하거나 야하게 느껴지지 않고 마음을 조각낸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준다. 에스더가 부르는 찬송가가 어쩐지 반종교적인 뉘앙스로 심장을 파고들어서, 크리스천이 아닌 내게도 벅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올가미가 낸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흰 사제복을 뚫고 배어나오듯, 가슴을 뚫고 무언가 번지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눈에 물이 번졌다. 짧고 강렬한, 극장에서 이제까지 한 번도 흘려보지 않은 종류의 눈물이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퍼스트 리폼드>(2017)


어려운 영화다. 일단 말 자체가 어렵다. 톨러가 쓰는 원어 그대로보다 어쩔 수 없이 택했을 단어들로 번역된 문장이 더 어렵게 느껴져서, 영어를 좀 더 공부해서 자막 없이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마음을 어렵게 만든다. 희망과 절망 사이 어느 지점에서 어느 정도로 타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종교의 입을 빌리고 있지만, 성직자나 교인들만의 고민이 아니며, 마이클이나 톨러 같은 ‘예민한’ 개인들만이 느끼는 이상한 문제도 아니다.
 

<퍼스트 리폼드>(2017)


톨러는 깊은 절망을 털어놓는 마이클을 향해 희망을 입에 올리며, 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작 자신은 깊은 절망 속에서 술로 살아가는 목사의 말은, 정갈해서 더 모순적이다. 스스로마저 설득하지 못하는 단어들은 역효과를 낳는다. 대화 이후 마이클이 자살하자 톨러는 그 영향으로 죄책감과 절망에 휩싸인다.


<퍼스트 리폼드>(2017)



작품은 톨러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종교는 일종의 비유나 통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법인 것 같다. ‘신이 우리를 용서할까?’ 처럼, 신을 끼고 던지는 불편한 문장들은, 인간이 지구와 서로, 또 스스로에게 짓는 ‘죄’를 묻는다. 큰 교회의 자본 없이는 250주년 행사 같은 큰 일을 치르기 힘들고, 그 자본은 친환경이라고 마케팅하지만 사실 환경오염의 주범인 대기업에서 나온다. 돈이라는 권력을 지닌 바크 앞에서 톨러의 질문은 ‘좋게 봐줘봤자 당돌하고 순진한’ 것이 되어버린다. 돈이 구르는 곳 중 하나가 된 교회에 회의감을 느끼는 톨러에게, 그를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꽂아 준 ‘풍성한 삶 교회’ 목사는, ‘주는 시장에도 계시지’, ‘환경오염도 주의 뜻일지 누가 알겠나’ 따위의, 본질을 흐리는- 비어있는 말로 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란 그렇게 모호하고, 해석하기에 따라 달리 쓰일 수 있는 서술로 가득한 것이니까 말이다. 지구와 인간, 신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질문자의 개인적인 상태에 대한 지적과 걱정이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같지 않은가.


<퍼스트 리폼드>(2017)

 
메리와의 교류는 톨러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주는 동시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심화시킨다. 지켜주고 싶은 것이 생기면, 괴로워진다. 아이가 생기고 마이클의 불안이 커졌듯, 메리와 가까이하며 톨러의 고통은 몸을 불린다. 메리와 몸을 붙이고 누워 세계를 여행하는 공상을 하는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치는 건, 땅을 뒤덮은 폐타이어와 갈려나가는 숲의 이미지다.


<퍼스트 리폼드>(2017)


자살 폭탄 조끼를 입고서도 그 태를 거울로 체크하는 침착한 얼굴이 무너지는 순간은, 행사에 온 메리를 목격했을 때다. 메리가 고맙다며 껴안았을 때의 당황한 표정이 그랬듯- 언제나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슬프고 우습게도 사랑이다. 자신은 사랑에 실패하는 인간이라며 에스더에게 독설을 퍼붓고 단단히 잠겼던 그의 입술은, 메리 앞에서 무방비하게 벌어진다. 톨러에게 메리와 메리의 아이는 어쩌면, 쓰레기와 매연과 독을 뿜는 인간들로 뒤덮인 지구에서 유일하게 남은, 사랑하게 돼 버린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퍼스트 리폼드>(2017)



신념과 현실, 갖가지 죄책감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곧은 성직자는,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듯 스스로를 파괴하며 하루하루 죽어간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은 서로를 심화시킨다. 톨러가 변기에 부었던 액체를 삼키려 했던 것은, 인간이 지구에 화학물질을 들이붓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속죄가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단순히 꽉 막힌 속을 변기를 뚫듯 뚫어버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올가미를 두르는 톨러는, 막혀 오는 숨을 아예 막아버리기 위해 스스로를 묶는 것 같아 보인다.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은, 가시의 고통보다 더 큰 무언가를 표현하는 듯하다. 분노를 분출하기보다는 틀어막고 속으로 터뜨리는 에단 호크의 연기는 작품의 톤과 어울렸고, 어려운 말들을 대신해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게 에단 호크는 톨러 목사를, 흔하면서도 이제까지 없었던 성직자 캐릭터로 탄생시켰다.


<퍼스트 리폼드>(2017)


만약 톨러가 액체를 들이키고 ‘깔끔하게’ 죽었다면, 작품이 그를 통해 던졌던 질문에 스스로 절망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메리와의 키스는, 사랑과 생명이라는 희망을 주는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메리의 사랑은 그 순간 톨러의 죽음을 막았지만, 어쨌든 톨러는 죽어가고 있지 않나. 사랑은 해결책이 아니라 눈가리개 아닌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희망이 되는 걸까, 사랑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걸까. 누군가는 ‘인간적인 영화’라고 하던데, 작품을 보고 ‘인간적’이라는 말을 이제까지 써 왔던 뉘앙스로 써도 괜찮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긴긴 키스는 끝나지 않고, 답 대신 무수한 고민만 ‘성공적으로’ 안기며 영화는 끝났다.


<퍼스트 리폼드>(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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