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May 05. 2019

과자 한 봉지의 위로

<미스 스티븐스>



-영화: <미스 스티븐스(Miss Stevens)>(2016, 감독: 줄리아 하트)
 
* <미스 스티븐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 <디태치먼트>(2011)의 내용 전개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스티븐스>(2016) 포스터.


딱 적당한 정도로만 토도독 두드리고 빠진다. 관계와 상황을 완성시켜 결론을 내기보다는, 일을 벌리고 엮었다 꼬았다 풀며 가능성을 열어둔 채 마무리짓는다. <미스 스티븐스>는, 교사 ‘미스 스티븐스’ 이지만, 마음을 살펴 줄 누군가가 필요한 ‘레이첼’ 이기도 한 사람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어찌 보면 뻔하고 당연한 말을, 학생과 교사의 관계와 연극 대회라는 형식을 빌려 분명하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한다. 뻔하고 당연하게 들리지만 어려운, 말은 쉽지만 쉽지 않은 말이라는 것 또한.


<미스 스티븐스>(2016)

 
인물 각각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묻어났다. 클리셰적 캐릭터성이 강한 마고와 샘도, 주변 인물로 소비되지만은 않는다. 사랑스럽다. 작품도, 레이첼도, 마고도, 샘도, 그리고 빌리도.


<미스 스티븐스>(2016)


그냥 티모시 살라메를 보러 간 것 뿐이었는데, 영화관을 나와 집에 돌아오는 내내 레이첼과 빌리가 자꾸 떠올라서 속이 이상했다. 보다 분명하게 묘사되는 레이첼에 비해, 빌리의 속 이야기는 부분적이고 개념적으로만 나온다. 알 것 같다가도 금새 알 수 없어지는 캐릭터다. 그래서인지 자꾸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좋아하는 배우가 맡은 캐릭터여서가 아니라, ‘티모시 살라메’의 ‘빌리’였기 때문이었다.
 
‘특별하게 민감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피부를 한 겹 덜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햄릿>의 감독 Trevor Nunn이 배우 벤 위쇼에 대해 한 말이다.[theguardian.com](벤 위쇼에 대한 글에서도 인용했다. 그런 캐릭터가 종종 있는데, 이를 테면 CBS <크리미널 마인드> 시리즈의 스펜서 리드.) 빌리에게도 해당되는 표현이라고 느껴졌다.


<미스 스티븐스>(2016)


레이첼의 고등학교 때 경험을 들은 셋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뒤에서 미스 스티븐스가 레즈비언일 거라고 하는 마고, 무슨 말인지 완전히 알겠다는 샘, 슬며시 웃고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이해했다는 말을 꺼내는 빌리. 스스로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마고의 반응은 ‘틀렸다’. 편견에 휩싸여 있으나, 아직 고등학생이니 겨우 봐 줄 수는 있는 정도다. 샘와 빌리의 이해는 조금 다르다. 샘은 본인의 소수자적 정체성 덕에 정치적 옳고 그름에 대해 또래보다 감수성이 발달했을 것이고, 말 그대로 ‘이해’ 했을 가능성이 높다.(샘이 마고 좀 가르쳐 줘.) 하지만 빌리의 ‘이해’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타고난 감각으로, 얇은 피부를 뚫고 와닿는 무언갈 느꼈다는 뜻일 것 같다.


<미스 스티븐스>(2016)


빌리는 약이 자신을 슬프지 않게 해주는 동시에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끊었다고 말한다. 이미 자신에 대해 받아들인, 특별함을 틀에 끼워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다. 빌리를 가로막는 것은 빌리가 아니다. 정상이 아니라며 ‘행동장애’라는 낙인을 찍는, 월터처럼 스스로 ‘무딘’ 것을 자랑으로 삼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는 누군가들이다.


<미스 스티븐스>(2016)


빌리의 불안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할 땐 별로 긴장조차 않지만, 마음을 준 사람에게 밀려났을 때는 펄쩍펄쩍 뛴다. 남들과 달리 느끼기 때문에, 레이첼에게서도 어떤 비슷한 불안을 감지했나보다. 서로 날선 상황에서 “You are messed up too(당신도 엉망진창이잖아요)”라는 위악적인 문장으로 튀어나와버렸지만, 그건 사실 애정이 담긴, 진심어린 단어들을 통해 나왔어야 했던 동질감의 표현이었다.


<미스 스티븐스>(2016)



그리고 아마도 레이첼은, 빌리에게 사과를 하거나 적어도 설명했어야 옳았다.
‘누구 말할 사람 있냐’는 레이첼의 물음에 빌리는, ‘말할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답한다. 그만큼,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는 건 어렵고, ‘들어주는’ 건 더 어렵다. 빌리는 레이첼에게 그 어려운 존재가 되어 준 것이다. 상황이 흐지부지 되지 않았다면 빌리도 자기 이야기를 꺼냈을지 모른다.
 
빌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웃게 해 줄 수 있는데, 돌봐 줄 수 있는데. 남자친구 있냐고 묻긴 했고, 로맨틱한 감정을 느낀 것도 맞지만, 꼭 그런 의도로 찾아간 건 아니었는데. 왜 레이첼 당신은 펑펑 울며 내게 안겨 놓고 뒤늦게 갑자기 끊어내는 건가. 게다가 샘의 연애 하소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조언을 함으로써, 우리만의 특별한 대화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 버리다니. 빌리가 저녁을 먹지 않은 레이첼에게 내민 과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에 대한 살핌이 있어야만 건넬 수 있는 위로의 손길이다. 동질감의 표현, 당신이 기댈 곳이 되어주겠다는 표시다. 샘이 먹도록 레이첼이 허락함으로써 그 ‘마음’은 자판기에 진열된 수십개의 조그만 과자봉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미스 스티븐스>(2016) / 빌리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들을 지켜보다 문을 쾅 닫고 나간다.


빌리는 독백과 함께 감정을 쏟아내고, 이후 심정을 터놓는다. 헌데 당황한 레이첼은, 빌리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의 상태에 대해, 다른 사람들처럼 걱정하며 ‘정상이 아닌’ 것으로 테두리짓는 말로 답했고,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왜 내 말을 똑바로 듣지 않냐’는 독백 대사에 들어맞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스 스티븐스>(2016)


당연히, 레이첼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적절’했다. 레이첼은 빌리를 수많은 학생 중 하나로 대해야 하는 교사다. 학생 하나하나를 특별하게 대하는 동시에, 누구도 특별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그 멍청한 월터에게서 이상하고 징그러운 소리를 들은 기억도 남아, 그 소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찝찝한 기분에 방어적으로 반응했을 수도 있다. <디태치먼트>(2011)에서 에리카를 떨어뜨려 놓은 헨리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디태치먼트>와 <미스 스티븐스>가 비슷한 이야기를 아주 다른 화면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하지만 역시, 과자 한 봉지의 위로 정도는 받아줘도 되는 것 아니었을까.



<미스 스티븐스>(2016)


서로 꼭 껴안는 셋을, 레이첼은 멀리 차 안에서 바라본다. 교사의 선을 지키며 마고와 샘을 위로해주고, 빌리가 ‘말할’ 공간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정작 자신이 터놓고 털어놓을 곳은 찾지 못한 레이첼의 모습에 쓸쓸해졌다. 헤어지기 전, 부모님에게 의지하라는 레이첼의 말에 빌리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답한다. “Someone should take care of you too(당신도 누군가가 돌봐 줘야 해요. /정확한 대사는 사실 기억이 안나는데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 빌리가 ‘주고 싶었던’ 특별한 관계는, ‘미스 스티븐스’가 받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빌리가 원한 것이 ‘나만의 선생님 미스 스티븐스’는 아니었을 테니까.


<미스 스티븐스>(2016)


서로 이야기를 터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소중한 만큼 찾기 어렵다. 허나 이미 지정된 관계의 형식을 치워버릴 ‘무모한’ 용기를 내는 것 또한 어렵다. 그렇게 레이첼과 빌리의 사이는 ‘오케이’한 정도, 바람직한 학생과 교사의 미적지근한 관계로 안전하게 마무리 된다. 어쨌든 레이첼은 빌리의 말을 새겨들어, 자기 마음을 살펴줄 존재를 찾아 문을 두드리게 되지 않을까. 근데 그게 찾는다고 찾아지는 걸까. 그래서 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선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끝내야 했던, 빌리와 레이첼이 맺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 아쉬운 것이다. 둘 사이 로맨스 같은 걸 기대했다는 건 아니다. 서로의 말에 저절로 귀 기울이게 되는 관계를 찾는 게 힘든 일이니까 자꾸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것 뿐이다. 나중에 레이첼이 빌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노크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미스 스티븐스>(2016)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배우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릴리 래이브가, 누군가를 위로해주기도, 뜻밖에 위로받기도, 그 때문에 당황해서 상처 줘 버리기도 하는 레이첼의 모습을, 안정적이고 독특한 연기를 통해 나타내며 이야기를 이끌었다면, 티모시 살라메는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데 왠지 믿음이 가는 구석이 있는, 자연스럽게 녹아들다가도 갑자기 휙 판을 뒤집어 버리는 연기로 지루함을 발 붙이지 못하게 만든다. 빌리가 레이첼의 방에 과자봉지를 들고 찾아와 난리치며 웃긴 후 이야기를 끌어내는 장면은, 관객의 마음에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소리내서 정신없이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게 한다. 스토리텔링 기술도 훌륭했지만, 티모시 살라메가 ‘다’ 했다. 혼을 쏙 빼 놓았다. 특별한 캐릭터를 맡은 두 배우의 특별한 개성과 연기가,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이었다.
 

<미스 스티븐스>(2016)




 +
(근데 왜 ‘Ms.’ 대신 ‘Miss’를 쓴 걸까? 구시대적 감수성을 보이는 작품은 절대 아닌데 굳이? 현실을 반영한 건가. 그래서 별로라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하다. 느낌은 대충 알겠는데 구체적인 까닭이 있다면 듣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과 절망 사이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