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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l 04. 2019

묻지 않는 천사와 가난한 악마들, 그리고 시스템.

<행복한 라짜로>(2018)



<행복한 라짜로(Lazzaro felice)>(2018, 감독: 앨리스 로르바케르)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복한 라짜로>(2018) 포스터.


대단한 작품이기는 하다. ‘시간을 초월하는 성자’라는 종교적/판타지적 요소를 사용해 중세 신분제 사회 소작농과 현대 도시 빈민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라짜로의 부활과 죽음에 연결 되는 늑대의 존재 뿐만 아니라, 라짜로의 티없이 맑은 얼굴과 느리고 차분한 동작 자체가 동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행복한 라짜로>(2018)


아마도, 라짜로는 종교에 등장하는 ‘성자’를 상징한다. 작품은 그의 흔들림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과거의 고립된 마을, 후작부인에게 착취당하는 농민들은 라짜로를 착취한다. 그 착취구도-사기를 사기로 무너뜨리려는, 부모 세대의 악습을 끊어내려는 탄크레디의 납치극 덕에 경찰이 마을에 오게 되고, 농민들은 도시로 가게 된다. 후작부인과 농민들 사이에서 노예적 노동 착취의 사다리 역할을 하던 니콜라는, 현재의 도시, 자본가 고용주와 도시 빈민들 사이에서 저임금 노동 착취의 고리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과거 농민이었던 도시 빈민들은 ‘가난하지만 자유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잘한 범죄로 연명한다. ‘대사기극’ 신문기사를 액자에 걸어놓고 기뻐한다. 그들이 보상금을 받았는지, 받았다면 왜 여전히 가난하게 사는지, 작품은 설명하지 않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농사만 짓고 살며 돈을 거의 만져보지 않았던 이들은, 돈을 굴리거나 도시 임금 노동의 바퀴에 쉽게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며, 겨우 일을 구했다 해도 버는 속도보다 쓰는 속도가 높았을 것이다.


<행복한 라짜로>(2018)


사기를 당한 농민들과, 사기꾼의 아들 탄크레디 모두, 현재에 가난하다. 그렇다면 돈은 어디 있는가? ‘은행’으로 상징되는 자본가들, 돈을 기준으로 세워진 새로운 신분제의 정상에 있는 이들에게 갔다. ‘돈이 있어서 돈이 있고, 돈이 없어서 돈이 없는’ 평행선, 라짜로가 외쳤듯 ‘대사기극’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탄크레디가 재산을 빼앗긴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도련님’이었던 까닭은 후작부인의 아들, 이라는 신분이었으며, 재산 역시 그의 것이 아님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 돈이 모두 ‘새로운 귀족’들의 손에 있는 이 시스템은 옳은 것이냐고, 대사기극이 아니라고 할 수 있냐고 작품은 묻고 싶은 것이다.

<행복한 라짜로>(2018)


그러나 라짜로는 묻지 않는다.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선의로 대한다. 일을 시키면 하고, 말을 하면 믿는다. 라짜로를 보며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질문 없는 선은 위험하다.

왜 시선/주제/가치관인 라짜로가 이런 인물인가 하면, 작품이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바탕은 종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안토니아가 라짜로에게 무릎을 꿇는 장면이나, 음악이 라짜로를 따라오다 사라지는 장면들은 내게 별 감흥을 주지 않았다. 라짜로를 돈벌이 연극에 이용한 후 그의 눈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진 안토니아는, 결국 다음 연극은 라짜로를 빼고 진행하게 된다. 안토니아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 될 정도로, 라짜로의 눈은 동그랗고 깨끗했다. 그게 다였다. 물론 사기는 옳지 않지만, 잘 모르겠다. 슈퍼마켓에서 훔친 과자가 그날의 식량 전부인 이들의 삶을 평가해도 되는 걸까. 착한 것과 옳은 것은 다르며, ‘옳다’는 것은 맥락에 따라 판단해야 하기에 때로 기준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행복한 라짜로>(2018)


라짜로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인물은 탄크레디다. 긴 잠에서 깨어나 사람들이 없어 의아해 하던 그가 결국 찾아 나서는 건 탄크레디이며, 누가 부탁해서가 아닌 자기 의지로 은행에 찾아가 ‘탄크레디의 재산을 돌려주면 고맙겠다’고 한다. ‘그게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같은 문장은 일단 넣어두자. 라짜로가 탄크레디를 다른 뉘앙스로 대하는 것은, 유일하게 자신을 일꾼이 아닌 친구로 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분과 시대를 초월한 둘의 우정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주제가 아닌가 하는 아무말을 잠깐 던져본다. (아니다.)


<행복한 라짜로>(2018)


위협 없이 가만히 서 있는 라짜로를 처음에는 무서워하던 사람들은,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욕을 뱉는다. 오히려 너무나 선한 그의 눈을 볼 수 없어서였을까. 성자 앞에 선 자신들의 초라한 마음이 부끄러워서였을까. 사람들은 결국 라짜로를 때려죽이고 만다. 나는 그렇게 착하기만 하고 의미 없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버린 라짜로가 속상했다. 그리고 결말이 찝찝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대강, ‘초월적인 성인의 가르침도 통하지 않는 현대의 자본주의와 악마 같은 사람들’ 인 것 같은데,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구조의 부조리인지 개인의 악인지 마지막 장면 때문에 모호해졌다. ‘구조와 개인은 연결되어 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같은 해석들이 들어설 틈이 매우 좁게 느껴졌다. 구조보다 인간, 그것도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악이 부각되었고, 개인적으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취향이 아니었다, 고 해두자.


<행복한 라짜로>(2018)



“뭐든 캐내거나 뜯는 건 죽어도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싶으면 너 혼자 해.”

왜 주변에 널린 먹을 것을 외면했냐고 묻자 안토니아와 가족들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에 이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탄크레디의 식사에 초대 받은 안토니아 일행이 베이커리에서 비싼 과자를 잔뜩 사는 모습이다. 자신들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을 그 선물을 사느라 가진 돈을 다 써 버리고는 진심으로 즐거워한다. 그 기분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되어서, 감독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정말로 아는 것 같아서 속이 이상해졌다. 결국 그들은 탄크레디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과자도 건네줘 버리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작품이 끝나고 뒤늦게 목이 멘 것은 이렇듯 자세하고 섬세한, 그리고 애정 어린, 가난한 삶에 대한 묘사 때문이었다. 가난할지라도, 오히려 뼛속 깊이 가난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무언가들을, 작품은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행복한 라짜로>(2018)



그래서, 잘 만들었으나 취향은 아닌 작품이었다, 는 결론이다. 최고야! 하고 가슴이 쿵쿵 울려야 할 것 같은 이야기인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와닿지는 않는. ‘이런 것이 성자라면, 나는 성자를 따르지 않겠다’는 비장한 문장이 자꾸 떠오르는데, 내가 굳이 거부하지 않아도 작품이 보여주듯 이 세상에 이미 성자가 설 자리는 없으니, 넣어두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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