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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Dec 22. 2021

알렉스 로더를 쓰고 나서,


 


<The End of the F***ing World 2(빌어먹을 세상 따위 2)>(2019)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2021, 감독: 웨스 앤더슨)


* 위 두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 포함


 



1. <The End of the F***ing World 2>(2019)를 뒤늦게 보았다.


<The End of the F***ing World 2>(2019)

“나는 지금도 그 집에 있어.” 엄마의 죽음 후 제임스는 토스터에 손을 넣었고, 동물들을 죽였다. 트라우마를 겪고 제임스도 잃은 앨리사는, 청혼을 한다. 그들의 말과 마음과 선택과 눈물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았는데, 별안간 다 사라지고 말았다. 작품이 그대로, 전부 다 보여주고 있는데 뭘 더 쓸 것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 해석의 말을 붙이지 않고 고이 두고 싶기도 했다.​


첫 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제임스가 달리고, 총소리가 들리며 엔딩크레딧이 올라왔을 때, 충격에 울지도 못했었다. 곱씹으며, 탁월한 오픈 엔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너무 완벽하게 슬퍼서, 절대 다시 보진 못할 거라고. 일 년쯤 지났을까, 두 번째 이야기가 제작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가움보다 의문이 앞섰다. 그렇게 ‘영화적으로’ 완벽하게 끝내 놓고 그 이후를 그린다고? 설마 제임스 없이 가는 건 아니겠지. 공개된 스틸컷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제임스를 보았을 때 안도했지만, 미루다 잊었다. 제임스도 내레이팅한다. 완벽한 엔딩이었다고, 그런데 내가 살아 버렸다고. 나를 비롯한 어떤 시청자들이 시즌2에 대해 얼핏 받은 느낌도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최근, 알렉스 로더를 쓰기 위해  번째 이야기를 다시 보았고, 비로소 울었다. 그리고  다음의 이야기가 정말 필요하다, 라고 생각했다. 글을 완성하고   앨리사와 제임스의 넥스트를 보았고, 이게 정말 필요했다고, 다시 납득했다. 여덟 에피소드를 한번에 보며,  시간   시간  정도는 각기 다른 까닭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작품은 앨리사와 제임스를 아름다운 ‘이야기 버려두지 않았다. 존중했고, 소중히 여겼다.  폭풍 같은 사건들 이후 감당해야 했던 것들을, 상처난 삶을 그러모으며 새로이 생긴 상처들을, 마침내 다시 서로를 안아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 지금 생각하니 당연했다. 1 이어지는- 앨리사의 , 제임스의 OK, 앨리사가 제임스의 ‘위어드 핸드 잡는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엔딩은 너무나 벅찼다.

<The End of the F***ing World 2>(2019)


이렇게 장면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모든 장면을 언급해야만 하므로 여기까지. 그렇지만, 자기 턱에 총을 날리려는 보니를 앨리사와 제임스가 온몸을 다해 막는 순간은 정말. 작품은, 보니도 버려두지 않았다. 주인공들에게 위기와 계기를 주기 위한 수단, 불쌍은 하지만 어쨌든 범죄자 싸이코,로 소비하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서사를 쌓았고, 마무리 후의 ‘Next’를 주었다.  


1, 2가 전부 올라와 있는 지금, 이 작품을 처음 보려는 이들이 있다면, 첫 번째 이야기를 다 보고 잠깐 멈추라고 하고 싶다. 이야기 상에서 그 사이 흐른 시간만큼, 앨리사와 제임스가 서로 없이 지낸 시간만큼, 1년이나 2년, 적어도 반 년 정도는 참은 후에, 다시 보고, 두 번째 이야기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냥 그러면 좋겠다.

<The End of the F***ing World 2>(2019)


+

잠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도 서사를 부여한다는 점이 이 작품을 좋아하는 수많은 까닭 중 하나다. 하나하나에게 저만의 리듬이 있다. 1에서는 유니스와 테리의 관계가 스핀오프 같은 재미를 주었는데, 2에서도 역시 토드의 누나 이기와 그 연인, 오피서 시드를 비롯해 잠깐 등장하는 단역들조차 다 캐릭터가 살아 있었다.





2. <프렌치 디스패치>(2021)를 두 번째로 보았다.

<프렌치 디스패치>(2021)


두 번째 볼 때 더 좋은 영화들이 있다. 까닭은 다양하다. 원래 쓰인 대사가 더 잘 들려서, 가 그 중 하나다. <온리 러버즈 레프트 얼라이브>(2014)는 번역이 조금 재미가 없어서 그랬다. ‘니가해봐’라고 한다면 당연히 할 말이 없지만, 할 수 있는데 안 한 느낌이어서 말을 붙여본다. 속상할 정도로 ‘리튼 앤 디렉티드 바이 짐 자무쉬’의 재치와 개성이 안 살았다. <프렌치 디스패치>(2021)는 좀 다른 케이스였다. 번역 자체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데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Ha.”, “Ha to yourself.” 같은 주고받기. 그대로 살리기 어렵다. 또 정신없이 쏟아지는 자막과 비주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둘 다 놓치기가 일쑤였다. 두 번째 볼 때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으므로, 자막보다 화면을 놓치지 않는 데에 집중했다. 원래 장면들의 의도가 비주얼에 눈을 고정하고 그 긴긴 묘사를 들으라는 거니까.


아 웨스 앤더슨, 이번엔 특히 더 작정한 듯, 비주얼 에스테틱을 몽창 다양하고 또 일관적으로 넣어 놓았다. 대사에 좀 더 익숙해진 후 보니 훨씬 풍성하게 와닿았다. 영화라는 예술 속의 예술들. 글, 회화, 조각, 카페 벽에 붙은 작은 포스터며 컵 하나하나까지. 굳이 언어를 영어로 통일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 레아 세이두와 리나 쿠드리가 긴긴 대사를 프랑스어로 말하는 동안, 화면에 괄호의 디테일까지 살려 번역이 타이핑되는 게 좋았다. 아 웨스 앤더슨. 비주얼만큼 스토리텔링 방식도 독특하고 브릴리언트하다. 이번에도 스토리 세 개 다 뭐 없는데 재밌다. 모든 걸 조크로 만들어버리는데 또 진지한. 나름대로 예쁘장하게 인간과 사회를 풍자하는데 그게 따뜻한.


이 사람 영화를 보고 뭘 진지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는데, 역시 그렇긴 했다. 언제나 내게는, 최고급 오락 같은 느낌이었다. 완벽하고 완전한데, 더 고민하고 생각을 끌고 가고 싶은 방향이 아니라, 완벽하게 짜여 있어서 황홀하게 즐기고 싶은 그런.

<프렌치 디스패치>(2021)


배우들.

웨스 앤더슨 영화엔 특유의 리듬이 있어서 어디 가든 배우들도 그걸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 울 때도 엉엉 울면 안 되고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려야 한다. 때문에 종종 배우의 매력이 덜 사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르게 매력적으로 와 닿는 경우도 있고. 본인 연기를 웨스 앤더슨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에 익숙해진 배우들은 정말 날아다닌다. 주로 폼잡는데 찌질한 역할로 나오는 애드리언 브로디는, 퍼스널하게는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스크린에서는 초 리스펙하는 배우다. 최근 채플 웨이트 보면서 목소리가 꽉 잠겨 있길래 아마 선장 역할이라 바닷바람에 상한 목소리를 표현한 것이겠지, 라고 짐작하면서도, 목이 상한 것 아닌가 아주 약간 걱정했었다. 줄리안 카다지오의 완벽하게 얄밉고 감미로운 음색을 들으며 역시나 그것은 대배우의 연기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웃기고 멋져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프랜시스 맥도먼드 표 루신다 크레멘츠의 시니컬하게 절제된 슬픔이랄까 그거,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오 그저 퍼펙트한 레아 세이두와 틸다 스윈튼, 늘 무겁게 멋진 베네치오 델 토로와 제프리 라이트. 뭐 빌 머레이와 오웬 윌슨은 감독 본인의 분신 같지. 이번에 새로 함께한 티모시 샬라메는 티미 같은 얼굴이 종종 나와서 웃겼는데, 보다 자유로운 방식의 작품에서 더 빛나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 물론 여기서도 캐릭터 연기 모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팬 입장에서는 티모시 프렌치 좀 하는데 시켜보지 하는 별 거 아닌 아쉬움이 있었고. 메인으로 빠진 배우들 외에 갑자기 낯익은 얼굴들이 보일 때마다, 으악 저거 제이슨 슈왈츠먼! 토니 레볼로리! 크리스토퍼 왈츠! 세상에 윌렘 데포! 에드워드 노튼! 시얼샤 로넌! 뭐 계속 그러면서 봤다. And THE 알렉스 로더. 짧지만 중요한 모먼트를 이 배우한테 맡긴 건데, 알렉스 로더 글에도 썼지만 정말, 최고였다.


<프렌치 디스패치>(2021)


+

번역에서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긴 했다. 지적은 아니고, 정말 그건지 모르겠어서 알고싶달까. 제피렐리의 대사를 ‘속살이 부끄러워요’라고 옮긴 자막이 두세 번 나오는데, 그게, ‘feel shy with my new muscles’로 들린다. 가능한 범위의 의역이긴 하다. 그런데, 제피렐리가 자신을 비롯한 앙뉘의 영맨들이 가르던 수많은 파들을 막 나열할 때, 마지막으로 ‘근육파 대 우리, 책벌레파’라고 하고 나서 미치미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그걸로 미루어 본다면, 옷을 입지 않고 있어서 부끄러운 까닭이 자막처럼 ‘속살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원래 근육파와 반대되는 책벌레파에 있었는데 지금은 근육을 조금 만들었기 때문에 정말로 ‘뉴 머슬’인 거라서 부끄러운 부분도 있지 않냐는 거다. 변화를, 아직 익숙하지 않은 스스로를 보이는 것에 대한. 웨스 앤더슨 작품은 비주얼만큼 대사도 굉장히 정교한데, 그런 캐릭터의 사이드적 디테일을 알아채고 피식 하라는 표현인 게 아니었나, 하고 궁금해졌다. 쓸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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