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l & ll>(2018)
<아사코 l & ll>(2018,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사코는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났다. 어느 날 그는 말없이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났다. 그와 연인이 되었으나 그 얼굴을 보고 자신이 떠올리는 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 년이 흐르며 사랑에 빠졌다. 알 수 있었다. 떠난 옛 연인의 소식을 알게 되었지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달랐다.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아사코가 사랑하는 그가 아니었다.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사랑하는 그에게 돌아와 용서를 빌었다.
이게 무슨 꿈 같은 이야긴가 싶다. 그런, 꿈 같은 우연들을 가만히 받아들이게 되는 작품이었다. 불꽃이 튀어 뒤를 돌아보게 되고, 잊고 있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고, 쿠지하치가 갑자기 체호프 대사를 읊어도, 뜬금없기보다는 왠지 납득이 가고 마는. 그런 흐름을 만드는 고요한 힘이 있는 연출이었다.
사소한 장치, 애매한 표정들로, 로맨스를 간단히 스릴러로 만든다. 일상적으로 평온한 장면이 이어져도, 긴장감이 맴돈다. 그러다 가슴이 내려앉는 전개가 이어진다. 아사코가 바쿠의 벤으로 단호하게 걸어가, 씩씩하게 바이바이를 하는 장면은, 완벽한 극복, 완전한 결론 같아 보였다. 그러나 카메라는 손을 흔드는 아사코를 벤 안에 있는 바쿠의 시선으로 잡음으로써 새로운 사건을 암시한다.
“얼마나 걸리든 다시 돌아올게.” 바쿠는 그런 말을 진심으로 하는 이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긴 했는데, 막상 등장하니 어이가 없다. 영영 사라졌거나, 어디서 죽은 게 아니고, 스타가 되었다니. 미스터리가 싹 녹아내렸다. 바쿠는 그렇다. ‘아사코를 떠난’ 게 아니라 그냥 ‘떠난’ 거다. 오 년 만에 나타나서 태연하게, 돌아온다고 했잖아,라며 사과조차 하지 않는. 근데 또, 아사코와 함께하기 위해 커리어고 뭐고 내던져버리는, 그러고도 아사코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쿨하게 보내주는. 그런 꿈 같은 인간이라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오히려 료헤이가, 판타지 같은, 세상에 없을 듯 좋은 남자라는 생각도 했다. 믿을 수 있는 데까지 믿고, 근거 없는 의심은 지우고, 고맙다고 말하고, 행동을 보고 나서야 화내고, 근데 또 마음의 문을 닫아걸지는 않고, 화날 때는 화난다고 말하고 (고양이 버렸다면서 안버렸고), 진심을 들으니 기회를 주기는 하지만, 못 믿겠다고 솔직히 말하는. 그러나-
스스로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길까 내내 두려웠다’고 말했듯, 료헤이는 한 번도, 아사코를 완전히 믿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홀로 노력하고, 말을 꺼내면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입을 열지 않고, 아사코가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넘겼던 거다. 단단하게 괜찮지만은 않았던 거다. 바쿠가 나타난 순간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료헤이의 무너짐은 배신감보다는 불안, 악몽이 현실이 된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마야는 오 년이 지나도 어쩌면 그렇게 설렐 수 있냐고 물었다. 어쩌면 둘 사이에 긴장을 불어넣던 건 그 불안함이었을까. 아사코가 비로소 스스로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게 됐을 때, 료헤이는 아사코를 다시는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야 그게 진심조차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만약 바쿠를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아사코는 평생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용서 받지 못할 짓을 했으니 사과는 하지 않을게, 그러나 료헤이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 아사코는 그렇게, 순간의 진심을 거침없이 꺼내는 사람이다. 죄다 저지르고, 말하고, 뉘우치고, 사죄하고, 부끄럽고 지저분해져도, 확실한 진심과 사랑이 남아 있다면 괜찮다고 말하는 로맨티스트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상처를 입히지만, 감히 용서를 구할 용기가 있는 이다.
문을 열자 서 있는 바쿠는 꼭 환상 같다. 바쿠의 옆에서, 아사코는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니, 지난 5년이 길고 행복한 꿈 같기도 하다,고 잇는다. 원제는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무엇을 꿈으로 흘려보낼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관계에서 그 선택은, 내민 손을 상대방이 맞잡아야만 가능하다. 아무리 애원해도 료헤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아사코의 선택은 선택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아사코만의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관계 회복의 실마리를 던지나 완전히 매듭짓지는 않은 채, 작품은 그날의 흐린 아침에서 끝난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불어난 강을 바라본다. 료헤이는 더러운 강이라고 하고, 아사코는 그래도 예쁘다고 받는다. 엉망이 된 사랑, 그것도 예쁘다고, 아사코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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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사고 후 깨어난 아사코와 바쿠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아스팔트에 달라붙어 키스한다. 컷이 넘어가고 프레임이 넓어지며 서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잡힌다. 지진이 난 후, 밖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이에게 료헤이가 손수건을 건넨다. 그는 곧바로 자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 로맨스를 깨트려 어색한 코미디의 모먼트로 만드는 방식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