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2021)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2021,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도 인물들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듯한 작품이 있다. 인상 깊은 픽션을 만나 인터뷰나 설명을 찾아보면, 창작가들은 대개 말한다, 방향을 강제하지 않고, 인물들이 자유롭게 나아가도록 둔다고. <드라이브 마이 카>(2021)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도 해당되는 원칙일 테다. 그가 구성하는 세계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때로 판타지스럽거나 관념적인 뉘앙스를 입는다. 단, 우연한 사건들과 때로 비현실적인 설정들 속에서, 그 가운데 놓인 사람들만은, 고유의 흐름으로 움직이도록 존중한다.
두 시간으로 맞추려면 맞출 수 있었을 테다. 주인공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들을 정해 놓고, 다른 이들의 서사나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의 비중을 줄일 수도 있겠다. 오토를 아예 ‘과거’의 인물로 두고, 살아 있을 적의 에피소드들을 짧게 회상처럼 끼워 넣는 흔한 방법도 있다. 그러나 작품은, 누구도 그런 식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그건 엄격한 태도다. 그 태도는 작품 내 인물들도 지닌다. 오토는 이야기를 이을 때, ‘만들지’ 않는다. 자의를 가진 이의 행동을 관찰하듯 ‘옮긴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듣는 사람 뿐 아니라 창작자 자신 또한 궁금해한다.
가후쿠, Drive the car, ‘바냐 아저씨’.
차를 아끼며 운전하던 가후쿠는, 녹내장이 생기며 ‘운전을 할 수는 있는’ 상태가 되었다. 오토가 죽고, 그는 조심조심 몰아가던 삶을, ‘살 수는 있는’ 상태가 된다. 어쩌면 몇 년 전 그날부터 가후쿠도 오토도 이미, ‘살 수는 있는’ 상태를 유지해왔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하나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어. 당신의 운전 방식.” 가후쿠는 아내가 견디는 방식에 자신이 상처 받고 있음을 표현한다, 상대에게 가닿지 않을 정도로만. 섹스가 끝난 후 카메라는, 오토와 가후쿠의 공허한 얼굴을 각각 클로즈업한다. 섬세하게 머무르며, 재촉하지 않고 일상의 속도로 흐르는 ‘2년 전’의 장면들은, 오토가 가후쿠의 상처나 기억의 일부가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그 리듬으로 그들의 날들을 함께 겪었기에, 관객은 이후 가후쿠의 심리를 풍부하고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정교한 타이밍에 삽입된 오프닝 크레딧은, 전후를 구분하며 오토의 시간에 과거의 색을 입힌다.
유나와 윤수의 이야기 또한, 작품은 시간을 들여 담는다. 디테일을 생략하고 ‘전달하려는 감정/메시지’만 극적으로 넣는 방법도 있었겠으나, 그랬다면 이와 같은 울림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해 주세요,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는 건, 내겐 일상적인 일이에요.’ 유나는 그렇게 말했다. 가후쿠의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연습을 하며 유나의 일상과 ‘어느 정도 유사한’ 경험을 한다. 들으려고 애쓰고, 이해하려고 애쓴다. 쉽게 말하고 잊거나, 쉽게 듣고 무시할 수 없다.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리며, 다양한 언어를 쓰는 배우들을 캐스팅한다. 그들은 자신의 퍼스트 랭귀지first language로 쓰인 대사를 배정받는다. 서로의 대사에 익숙해질 때까지 대본 리딩을 반복한다. 가후쿠는 강조한다, ‘읽을 때는 감정을 뺄 것.’ 혼자 만든 감정에 갇히지 않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연기의 합을 맞출 수 있게 되었을 때, 상호작용의 결과물이 나올 길이 막혀있지 않도록. 가후쿠는 강요하는 어조를 쓰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설명조차 없이 다만 반복하다, 배우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다. 그렇게 야외 연습을 하던 유나와 제니스 사이에 ‘뭔가가 일어나는’ 장면은 벅차다. 가후쿠는 ‘다음 단계는, 관객에게도 전해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연극과 영화는 다르겠으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배우와 작품을 대하는 방식에도 유사한 데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유나의 오디션 연기나, ‘바냐 아저씨’ 씬들에 있는 울림은, 영화 안 관객과 바깥의 관객 모두에게 전해진다.
연극이 완성되는 모습과, 인물들이 변화하는 과정은 닮아 있다. ‘중요하고 거대한’ 사건들을 계기로 드라마틱한 심경 변화를 맞이하기보단- 여러 만남들이 천천히 쌓이고, 그것이 넘쳐 흐르는 어느 순간, 변하거나 깨닫는다. 원치 않았던 와타리의 운전을 경험하고, 인정하고, 익숙해지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카츠키와 대화를 나누고, 윤수와 유나의 집에서 식사하면서, 그가 닫아 두었던 문이 서서히 열린다. 대본을 읽고 또 읽던 배우들이 어느 순간 배우지 않은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다카츠키, 가후쿠, My car.
가후쿠는 드라마적 클리셰를 따라 충동적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관객의 불안한 기대에 응해 다카츠키에게 심리적 보복을 하지 않는다. 바냐 역을 맡긴 건 대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토가 해준 뒷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 건 질투가 나서라기보단, 아내의 흔적을 듣고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서,로 보인다. 적당히 거리를 두던 가후쿠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상처를 공유한다. 서로의 영향으로, 다카츠키는 연기와 삶의 시야를 넓히고, 가후쿠는 외면했던 것들을 마주할 실마리를 얻는다.
절제하는 가후쿠와 뭐든 해 버리는 다카츠키. 오토를 사랑한 그들은 반대 성향을 지녔다. 다카츠키는 가후쿠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매번 감상이나 진심을 말하고 싶어한다. 살짝 무례할지언정 솔직하다. 연습 중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만 끝나자 일본어 가운데 고립되어버린 제니스와, (의도와 결과가 어땠건,)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 면들 때문에 오토는, 가후쿠가 듣지 못한 뒷이야기를 다카츠키에게 먼저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섹스를 통해 상대방의 어떤 면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은,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미성년자와 관련된 사건’은 어쨌든 변호하기 힘들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아마 오토의 영향을 받아- 다카츠키는 그 ‘바라보기’를, 가후쿠보다 먼저 해냈던 것이다.
작품은 다카츠키라는 인물을 수단화 해 전개의 ‘장애물’로 만들지 않았다. 그가 일으킨 ‘사고’는 자극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긴장과 복선이 조금씩 쌓이다가, 조용히 터진다. 자처해 무대 위에서 구타 사실을 고백할 때, 다카츠키는 꼭 바냐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 같다. 역할의 옷을 입고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때로 인간이 진실을 말하도록 돕는 건, 가면이다. (1998, <벨벳 골드마인>)
와타리, 가후쿠, Drive my car.
일상의 중요한 일부였던 운전을 타인의 손에 맡기며, 가후쿠는 오히려 편안해진다. 와타리는 그가 삶을 운전하는 것을 도울 가능성을 지녔다. 언뜻 비슷하게- 감정을 가두는 데에 익숙한 듯 보이나, 스스로 흘러갈 용기가 있다. 그와 엄마, 가후쿠와 오토의 케이스는 아주 다르다, 다르지만,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는 유사한 데가 있다. 사랑과 미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기억의 아름다움과 끔찍함을 모두 받아들이고, 복합적인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기까지. 와타리는 가후쿠가 차로 오가는 길, 연극이 완성되는 모습을 곁에서 따라가며, 그 고민의 과정을 먼저 겪은 것으로 보인다. 가후쿠의 고민을 돕는 과정에서 과거를 다시 마주하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으로만 가능한 경험을 한다.
눈밭에서 와타리는, 왜 오토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냐고 묻는다. 당신을 사랑했던 것도, 남자들을 만난 것도 다 진짜 그녀이고, 거기엔 어떤 모순도 없다고. 가후쿠는 비로소, 오토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린다. 묻고, 탓하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줄곧 피하다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한다. 죽은 사람들을, 산 사람들은 떠올릴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아무리 네 탓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어둠에서 꺼내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당신은 엄마를 죽였고, 나는 아내를 죽였어.” “네.” 그 대화가 벅찼다. 어둠을 안은 채 홀로 참고 ‘지내던’ 두 사람은, 기꺼이 함께 캄캄한 밑바닥으로 내려감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그렇게 ‘살기로’ 했다.
‘어떤 진실이든, 모르는 것보다는 덜 무섭다’고,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대사가 들려온다. 아사코(2018, <아사코>)가 그랬다. 엉망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 터트려 버렸다. 그래도 예쁘다고 했다. 자신의 모습이 나와버리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체호프의 작품을 연기할 수 없었다는 가후쿠. 스스로를, 그 상처와 죄책감과 화와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는 행위를 줄곧 피해 왔던 그는, 결국 힘들어하면서도 바냐를 훌륭하게 견뎌 낸다. 그 모든 만남의 결과다. ‘Drive my car’. ‘나 자신의 차를 운전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으나, ‘내 차를 운전해 달라’는, 내 삶으로 들어와 달라는, 타인을 향한 초대의 제스처로도 들린다. 함께하는 운전을 경험하고, 가후쿠는 다시 ‘자신의’ 삶을 운전할 수 있게 됐다.
연극이 막을 내린다. 언제인지 모를 날, 마스크를 쓴 와타리가 마트에서 장을 본다. 낯익은 개가 앉아 있는 낯익은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린다. 그렇게 일상의 일부를 담으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인물이 동시대에 ‘살아있음’이 와닿았다. 그가 궁금했다, 유나와 윤수와 함께 한국에 간 걸까, 가후쿠도 함께 간 걸까 차만 받은 걸까. 상상할 수는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그가 살아가고 있다는, 가후쿠도, 유나와 윤수도, 제니스도, 아마 다카츠키도,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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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든 두 손이 커버 열린 차에 나란히 걸쳐 있는 모습, 계단을 사이에 두고 서서 담배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꽃이 널브러진 흰 눈밭에서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 그렇게, 편집보다는 있는 요소를 사용해 관계를 담아내는 화면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