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2021)
<프랑스(France)>(2021, 감독: 브루노 뒤몽)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2022. 1. 28. 덧말을 추가하였습니다.
“그냥저냥.” 프랑스 드 뫼르는 소위 ‘행복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그렇게 자신이나 타인의 행복을 신경 쓸 새 없이 지냈다. 어느 날, 그의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실수로 낸 교통사고 때문이다. 완벽한 삶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틈은 “스스로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프랑스에게 있어, 어떤 면에서는 빛이다. 자신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처음에는 바로 그 ‘시선’ 때문에 부러 꽃을 들고 피해자를 찾아가지만, 바티스트와 가족을 만나고 ‘진심’을 주고받으며 이제껏 몰랐던 기분을 느낀다. “좋은 일을 하는 데에 돈을 써 본 적이 없어요.”, 그 순수한 죄책감과 호의마저 가십지 일면을 차지하는 일상이, 사실은 행복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언제고 저들이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본다’는, ‘오늘은 환호했다가, 내일은 증오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그리하여 프랑스는 방송을 떠난다. 바티스트의 가족에게 수표를 건넸을 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였을까- 봉사도 해보지만, 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목적이 타인을 돕는 데가 아니라 행복을 느끼는 데에 있었으므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간절하게 행복을 붙잡을 겨를도 없이, 당장의 불행을 견딜 수 없는 상태였음을, 항상 울고 싶은 기분이었음을 깨닫는다.
프랑스는 샤를이 자신을 모른다는 점에 끌렸다.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 미안해 하지도 않는, 사진을 요구하던 이들이 당신의 지인이냐고 묻는- 그가 건넨 익명성은 프랑스에게 매력을 넘어 치유의 실마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실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끊어지자 충격을 받지만, 무너지지는 않는다. 샤를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욕을 퍼붓다가도, 루에게는 ‘그도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 변호한다. 그 말대로 샤를은 프랑스처럼 ‘재능 있는’ 기자로서, 루와 같은 이가 짜 주었을 판에서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일’이 뭐길래.
가장 믿음직스러운 ‘아군’이었던 루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후, 대충 엔지니어 탓으로 돌리고 프랑스를 안심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프랑스는 잘잘못을 따지거나 앞으로의 대책을 생각할 여유 없이 절망에 빠져버릴 만큼 불안정한 상태였고, 그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취재 영상을 보며 도를 넘은 농담을 던진 것도, 어찌 보면 ‘일’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프랑스를 웃기고, 우울을 잊게 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그가 ‘일’-루의 말로는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을 더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돕는 것. 결국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도, 샤를도, 루도. 샤를-카메라를 향해 프랑스는, “직업이 나를 죽이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 ‘일’이, 대체 무엇이길래.
프랑스는 ‘일’을 하며, 샤를처럼 분명한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가. 그는 폭탄이 떨어지는 와중 본인과 동료의 목숨을 걸고 좋은 스팟을 찾고, 난민들과 함께 보트를 탔다가 카메라가 꺼지면 촬영팀 배로 몸을 옮긴다. 그러나 전쟁이 만든 폐허 앞에서 눈물을 통제하지 못하고, 아무도 바다에 빠지지 않았다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방송에서 처음 눈물을 보이고 후회했지만, 나중에는 편집하지 않고 연출 요소로 쓴다. 눈물의 까닭은 복합적이나, 거짓은 아니다. 프랑스가 화면 속에서 정말로 감동하거나 슬퍼하듯, 샤를은 연극 속에서 정말로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오로지 감정만이 살아남는다. “왜 항상 당신을 중심으로 영상을 찍나요?” 쇼 진행자는 물었다. 프랑스는 사람과 감정, 주관을 강조해 답했다. 그럴듯한 방송용 설명이지만, 중요한 이야기다. 그에게 뉴스는 ‘내가 전하는 뉴스’다. 흔히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고 하듯- 단순히 사실을 나열해 전하는 방송은 ‘뉴스’가 될 수 없음을, 프랑스는 안다. 넘쳐나는 사실들과 각자의 입장들 가운데에서, ‘어차피 제각각이라면, 나는 단 하나 확실한 것, 내 감정을 택하겠다’는 결론을 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리된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라 해도,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해도, 프랑스의 방식은 일관되다.
프랑스는 범죄자의 와이프, 다니엘을 인터뷰하며 여전히 ‘연출’을 하지만, 사건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아파한다. 행인의 사진 요청도 거절한 채 피해자 추모 공간에 머무른다. 동행한 두 기자들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와 함께 선다. 그들이 지닌 최소한의 태도-진실의 선이, 거기에 있다. 프랑스는 지켰고 샤를과 루는 지키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최소한의 태도. 그 선을 긋지 않으면, 샤를의 거짓말, 루의 ‘농담’ 따위- 수많은 것이, 일이라는 이름 하에 허용되어 버린다. 그 모양과 위치를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프랑스는 진실된 감정, 그것에서 출발한다. 끊임없이 느끼는 것, 프랑스를 괴롭히는 그 감각은 그의 힘이기도 하다.
기자가 된 까닭이나 명성을 얻기까지의 과정 등, 프랑스의 과거는 딱히 설명 되지 않고 중요치도 않다. 맞이할 미래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현재, 언제 무너지거나 끝날지 알 수 없는 내 세상의 지금이다.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라던 프레드와 조는 사고로 ‘세상의 끝 la fin du monde’을 맞이했다. 세상의 끝에 관한 노래를 부르던- 샤를에게서, 프랑스는 ‘현재의 행복’을 다시 찾았다. 끈질기게 ‘사랑만은 진심’임을 고백하는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샤를에 대한 용서는 곧 자신의 ‘일’과 감정에 대한 용서, 그가 저버린 최소한의 태도를 나는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설명했던’ 프랑스의, ‘마음’이 움직인다. “남은 건 현재 뿐이다.”, 그 뻔한 깨달음을 굳이 입 밖으로 뱉는다. ‘일’을 하는, ‘사랑’을 하는 까닭을, 스스로 정리한다.
작품에는 프랑스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꼭 당신들은 나를 무엇으로 보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 프랑스가 보는 세상, 프랑스가 보여 주는 세상, 프랑스를 보는 세상, 프랑스를 보여 주는 세상. 작품 속에는 수많은 시선이 엇갈리고, 부딪힌다. 샤를의 어깨에 기대어, 프랑스는 마지막으로 오래도록 카메라를 응시한다. 픽션 속 시선들과 세상을 가로질러 현실의 관객과 직접 눈을 맞춘다. 진실을 찾기는 힘들고, 그렇게 골라낸 것이 정말로 진실인지조차 때로 확신할 수 없지만, 현재를 똑바로 보는 것, 진심을 찾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그렇게 서로의 진심으로 마주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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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픽션이라는 가정 하에, 프랑스 드 뫼르를 이해해 보고자 한 설명이다. 그의 역할은 적절한 시선을 택해 효과적으로 뉴스를 보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때로 프랑스의 방식은 시청자가 사건을 ‘이야기’로 소비하게 만든다. ‘개인의 진심’은, 변하거나 무뎌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본인도 ‘괴물’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는 말이다. 스타/영웅에 대한 의존은 위험하다는 걸, 나도 안다. -현실에도 여러 예가 있고- 다만 위에도 적었듯 ‘끊임없이 느낀다’는 점이, 그가 괴물이 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미디어의 폭력성을 겪어 알고 있기도 하고. 프랑스가 ‘최소한의 태도’를 버리지 않으리라 믿는다. 뭐 그 정도까지 잘 쓴 글도 아니지만, 현실로 가져오면 위험한 방향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 덧붙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