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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r 18. 2022

탐의 경우

<탐엣더팜>(2013)




<탐엣더팜(Tom à la Ferme)>(2013, 감독: 자비에 돌란)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일부 표현은 자비에 돌란의 연기에 관한 본인의 글, ‘그 배우는 감독이다’에서 옮겼습니다.

* 아트나이너 리뷰로 쓴 글입니다. 동일한 글이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카페에도 올라와 있습니다.



자비에 돌란은 초기작부터, 이성애규범적/퀴어혐오적 사회의 단면을 개인의 경험을 통해 드러내 왔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속 후베르트는 기숙학교에서 집단적 폭력에 시달리고, <하트비트>(2010)에서 프란시스는 사랑을 고백하고 혐오가 담긴 답을 듣는다. <로렌스 애니웨이>(2012), 로렌스는 커밍아웃을 하고 많은 것을 잃는다. 다음 작품, ‘사이코섹슈얼 스릴러’ <탐엣더팜>은, 퀴어적 존재에 대한 부정denial과 폭력으로 굴러가는, 유해한 욕망의 굴레에 붙들린 ‘탐의 경우’를 들이민다. 지금까지 중 가장 탁한 화면을 통해.  


“오늘 내 일부가 죽었는데 나는 울 수조차 없습니다. 슬픔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너 없이 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을 찾는 것 뿐이야.” 탐이 중얼거리며 휴지에 ‘블루’ 컬러 펜으로 적은 말들은, 그가 이후 보이는 행동의 바탕이 된다. 슬픔이 ‘더해진’ 게 아니라, 마음 한조각이 ‘빠졌다’. 균형이 어긋나 버렸다.


<탐엣더팜>(2013). 다음 영화.


탐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던 농장으로 기욤을 대신해 ‘돌아온다’. 모자의 날숨으로 이루어진 정체된 공기가 기욤의 빈자리에 고여 독을 뿜어내는 곳, 탐이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고 내일을 살 수 없도록 가두는 곳이다. 휴대폰은 터지지 않고, 호텔은 여름에만 운영하는- 아득하게 넓지만 외부와는 단절된 공간인 농장은, 탐의 마음 속 풍경과 닮아 있다. 초반 카메라는 탐의 상태를 대변하듯 흔들리며 그를 따른다. ‘슬픔이 무엇인지도 잊을 정도의 상실감’에 지쳐 낯선 곳에서 잠들어- 원하는 언어를 골라 자신을 방어하고 표현할 기회를 처음부터 놓친다. 무방비하게 탁자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아가사에게 발견되고, 정신없이 일어나 눈물이 아닌 침을 닦으며 변명하듯 인사하고 조의를 표한다.


탐이 이곳에 온 것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기욤이 ‘둘 사이의 것으로 남기고 싶어했던’ 그들의 사랑과 존재를 가시화하려는 제스처가 아닐까 싶다. 슬픔을 ‘적절히’ 느끼고 제대로 위로 받기 위해 필요한 단계다. 소수자적 정체성을 숨길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은, 탐이 ‘정상적으로’ 기욤을 떠나보내는 과정을 방해한다. 그와의 관계와 함께 고통도 묻힌다.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집요하게 프란시스를 눈으로 좇는다. 홀로 있을 때나, ‘사라’의 말인 척 제 속을 털어놓을 때에야, 비로소 울먹인다. 이후 비어 있던 기욤의 자리를 반 강제로 채우며, 가슴속 공허에 유해한 관계를 밀어 넣게 된다.


그것은 ‘눈’을 빼앗김으로써 시작된다. 프란시스가 다녀간 밤이 새고, 탐은 바닥에서 망가진 안경을 발견한다. 프란시스는 그런 식으로, 시야를 가리거나 판단을 흐려 탐이 상황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게 한다. ‘심장병 때문에’라며 거절하는 탐에게 마약을 강권한다. 탐은 심장이 빨리 뛰는 원인이 약인지 프란시스와 추는 탱고인지 헷갈린다. 지속적으로 신체적/정신적 학대를 가하며 붙잡는 프란시스, 그가 만드는 강압적인 공기에는 성적 긴장감이 섞여 있다. 그가 탐을 몸으로 가두고 폭력을 가하는 장면마다- 프란시스의 눈에 담긴 멸시에 욕망이 비치듯, 탐의 눈에 담긴 공포에도 욕망이 비친다.


프란시스는 목소리로 처음 등장했다. 다음 번 등장에도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탐의 등 뒤로 다가와 말하다, 그림자 속으로 퇴장한다. 그가 처음으로 얼굴을 완전히 내보일 때 탐은, 이목구비가 없는 형체를 먼저 보고 기겁한다. 공포와 혼란, 호기심이 버무린 환영이다. ‘그애와 닮은’ 목소리가 뱉는 협박을 듣고, 탐이 느낀 것은 두려움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프란시스에게서 기욤을 본다. “그 애랑 똑같아, 냄새도, 목소리도.” 뒤섞인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며, 도망치고 붙잡히고 세뇌당하기를 되풀이한다. 그건 그의 탓이 아니다.


<탐엣더팜>(2013). 다음 영화.


탐은 프란시스에서 기욤을 보는 동시에, 그 자신이 기욤의 자리에 머무른다. 프란시스는 탐을 (욕망하며), 농장을 영영 벗어난 동생을 대신해 ‘엄마를 만족시킬’ 대역,으로 붙들어 놓는다. 그가 집착하는 ‘엄마의 기분’은, 탐이 자신과 기욤의 성 지향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막는 명분이자, 그에 대한 욕망을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고 곁에 둘 핑계다. 프란시스는 본인 안의 호모섹슈얼리티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다. 억눌린 욕망을 비뚤어진 형태로 터트린다. 자신의 성에 대해 당당하고 자유로운 이들을 적극적으로 해하거나 ‘가린’다. 동생과 춤을 춘 소년의, 진실을 말하려던 입을 찢었고, 동생 ‘여자친구’의 존재를 꾸며냈다. 탐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협박했고, ‘사라’ 이야기를 지어내 ‘공범’이 되기를 강요했다. ‘너도 나처럼 자유롭지 못하도록’ 묶어 두었다. ‘네 탓’이라며 주먹을 내질렀다가 부드럽게 대하기를 번갈아하며 ‘눈’을 가렸다. 그 기이한 관계의 모양은 굴러갈수록 일그러진다.


두드러지는 폭력은 프란시스의 것이나, 아가사 역시 탐에 대한 감금/학대의 방관자, 어쩌면 공범이다. 그는 탐을 ‘전엔 머리가 길었던’(떠나기 전의, 자신이 알던) 기욤의 대체로 여긴다. 첫 만남부터 ‘어머니’라고 부를 것을 요구하고, 프란시스를 ‘형’이라 일컫는다. 열 여섯에 떠난 아들, 늘 단 하룻밤만 머무르고 돌아가던 기욤. 그가 죽기 전 이미 시작된 상실감을 탐을 통해 지우려 한다. 아가사는 아들의 성 지향성을, 적어도 그에게 ‘비밀’이 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기욤은 ‘사건’ 이후 집을 나오며 편지를 남겨, 엄마에게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애인을 집에 데려오지 않은 까닭 중 하나는 아마, 형의 폭력성을 목격했기 때문일 테다. 헛간에서 프란시스가 뱉은 말들을 무시하였듯, 아가사는 이제껏 모든 징조를 무시해 왔을지도 모른다.


탐의 상실감이 ‘내가 싫다’는- 자기혐오와 자기파괴로 이어졌다면, 아가사의 상실감은 ‘너희가 잘못했다’는- 타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기욤의 가출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느껴서 였는지- 쌓인 울분을 프란시스에게 표출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므로, 탐이 다친 까닭 또한 짐작했을 것이다. 그는 집착적으로 ‘사라’에 대해 묻고 그의 부재에 분노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기욤이 ‘내가 알던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나온다. 의문을 풀지 못해 갑갑해하면서도, 남겨진 편지를 읽어 아들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는 내지 못했다. (네 사람이 모인 후에야 용기를 내 탐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번엔 현상 유지를 원하는 프란시스와 그에게 갇힌 탐이 거부한다.)


<탐엣더팜>(2013). 다음 영화.



첫날 기대 울며 괴로움을 담아 두었던 냉장고, 탐은 새벽에 그 안을 홀린 듯 청소하며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억지로 감정을 닦아 내고, 정작 치워야 할 것들은 다시 우겨 넣는다. 사라에게 건 전화는 무의식적 구조 요청이다. ‘짐을 싸서 나오라’는 그에게 탐은, ‘이곳엔 내가 필요해’, ‘내가 없으면 프란시스 혼자 남아’, 따위의 말을 뱉는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사라의 반응이 ‘이상’한 듯 행동해도, 일그러진 미소와 멍한 눈은 ‘내 상처와 공포를 봐달라’고 호소한다. 사라가 탐의 손목을 잡고 버스에 오를 수도 있었겠으나, 작품은 탐이 스스로를 구하는 서사를 택한다. 이끌려 ‘구해진’ 후 ‘일깨워지는’ 것이 아닌- 프란시스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의 학대로 기욤의 빈자리를 채우는 행위를 멈추기로 결정한 후에, 그곳을 나오는.


처한 상황을 바로 볼 수 없었던 탐이 떠나기를 결심하는 순간은,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겹쳐 볼 때다. 송아지의 시체를 옮긴 후 벗어나기를 시도했고, ‘입이 찢어진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영영 떠나게 된다. 앞서 프란시스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을 애매하게 둘러 말했다. ‘여자들이 좋아할 조건을 지닌 내가 왜 서른이 되도록 엄마랑 살겠냐’며 얼버무린 다음, ‘떠나지 말라’고 요구했다. 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나도 너랑 같다’는 뜻으로 오해해 동질감과 유혹을 느낄 만한 투였다. 솔직해지기 두려운 인간의 비겁하고 교묘한 화법이다. 사라에게 집적대는 프란시스를 보고 질투심에 차 펍으로 들어간 탐은, 그곳의 주인이 프란시스의 암시와 달리 혐오를 드러내지 않음(속마음이 어떻든/ ‘남자친구가 죽어서 장례식에 왔다’는 말에 대한 태도)을 느끼고, 그로부터 과거의 일을 듣는다. 비로소 프란시스가 늘 혼자인 까닭을, 그가 기욤과도 자신과도 다름을 알게 된다. 프란시스의 폭력적인 욕망은, 자신이 그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님을, 절대 ‘사라진 일부’를 되돌려 주지 못할 것임을, 그 또한 자신에게 소중하지 않음을, 자신에게 소중했던 존재는, 죽은, 살아 있을 때는 숨 쉬듯 다른 사람들과 자던, 기욤이었음을, 무엇으로도 그를 대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장례식 날 가방 ‘핑계’를 대며 차를 돌렸던 탐은, 마침내 차도 가방도 버리고 미련 없이 농장을 떠나며, 기욤의 물건을 꺼내 가슴에 챙긴다. 그의 가족과 달리 그를, ‘내가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주유소에서 ‘입이 찢어진 남자’를 만나고, 탐은 장례식장의 프란시스를 회상한다. 그날 등을 보인 채 시야에 들어왔던 그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드러낸다. 폭력성의 증거를 목격한 탐이, 그가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떠올리는 장면이다. 몬트리올로 돌아온 탐의 눈에는 죽음을 겪고 받아들인 후의 ‘생기’가 있다. 운전대를 힘있게 쥔 손, 약지에 낀 반지가 빛난다. 그렇게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어 기욤의 부재를 지우던 탐은, 일그러진 트라이앵글에서 벗어났다. 가슴 속 빈 공간을 마주함으로써 내일을 견딜 가능성을 찾았을 것이다.


<탐엣더팜>(2013). 다음 영화.


탐을 찾아 숲을 두리번거리던 프란시스가 입은 재킷에는, 성조기와 ‘U.S.A.’가 선명하게 인쇄돼 있었다. 탐의 여정과 함께 올라오는 엔딩크레딧의 배경음악은 ‘Going to a Town’. 루퍼스 웨인라이트는 노래한다, “I’m so tired of you, America.네게 너무 지쳤어, 아메리카.” 사람 이름인 듯도 한 ‘아메리카’는, 전체적 맥락을 살피면 역시 ‘미국’에 가깝게 들린다. 상당히 직설적인 비유다. <탐엣더팜>이 상실과 학대적 관계를 ‘극복’하는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자신에 대한 호감을 이용하는’(“You took advantage of a world that loved you well.넌 널 사랑해 준 세상으로부터 이득을 취했어.” -‘Going to a Town’.) 한 국가의, 타국을 향한 폭력을, 또한 그 ‘자유의 나라’가 성적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해 온 역사를 빗댄 우화이기도 하다,는 해석을 해본다.



“비비드한 색과 사운드 배치, 드라마틱한 편집. 자비에 돌란의 작품을 ‘영화적’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만- 그 스타일을 통해 그만의 방식대로 현실의 ‘곧지 않은’ 감정을 리얼하게 재현한다. 메시지는 대사가 아닌 배우의 표정에 담긴다. <단지 세상의 끝>에서 핵심은, 가족들의 대사 내용 전부가 아니라, 말하는 이의 감정과 상태, 그리고 그것을 듣거나 듣지 않는, 루이의 감정과 상태였다. <마티아스와 막심>에서도 마찬가지다. 쏟아지는 대사를 듣거나 듣지 않는, 마티아스와 막심의 표정이 핵심이다.”


<마티아스와 막심>(2019) 감상에 적었던 말을 옮겼다. 앞서 이 작품을 ‘사이코섹슈얼 스릴러’라고 수식했다. 개인적으로 덧붙이고 싶다. <탐엣더팜>의 장르는 ‘탐엣더팜’이며, 그 핵심 중 하나는 연기다. ‘보편적이지 않은’ 욕망을 표현하는 탐의 얼굴, 스스로를 디렉팅한 자비에 돌란이 창조한 미묘한 표정들이, 대사가 말하지 않는 ‘이상한’ 심리를 설명하고, 관객이 ‘탐의 경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탐엣더팜>(2013). 다음 영화.




* 자비에 돌란의 연기에 관한 글

https://brunch.co.kr/@yonnu201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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