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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r 25. 2022

그 모든 어머니들의 헤리티지

<패러렐 마더스>(2021)




<패러렐 마더스(Madres Paralelas)>(2021,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러렐 마더스>(2021). 왓챠피디아.


야니스의 카메라와 ‘어머니들’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 레나는 배우였다. 카메라에 찍히고 상대에게 바라보아졌다. 이번에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페넬로페 크루즈를 ‘찍는 자’의 위치에 둔다. 야니스의 카메라가 곧 작품의 카메라가 되는 순간도 있다. 취할 시선과 입장이 그의 것이며, 그가 이어받은/남길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패러렐 마더스>는 다채로운 욕망과 관계에 대한 상상이자, 야니스가 지닌 유산heritage-스페인이 지난 폭력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야니스는 내전 당시 살해 당한 마을 주민의 사진을 보며, ‘증조부가 찍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든 카메라는 증조부의 업을 증손(자X)녀가 이어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할테다. 작품은 야니스의 집 곳곳에 걸린 사진들을 선명하게 조명한다. 아마 그가 찍었을 모델들, 증조부와 어머니, 할머니들을. 제니스 조플린의 것을 따 ‘야니스’라는 이름을 주었다는 엄마가 조플린처럼 27세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탓에 할머니 손에 길러졌다,고- 그는 사진들 앞에서 말한다. 그렇게 이런저런 ‘유산’을 지닌 채 자란 야니스는,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잇는다.


‘평행한 어머니들’. 그 말은 자유롭게 합의된 관계로 임신한 야니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관계로 임신한 아나, 야니스의 엄마와 할머니, 그의 증조모를 비롯해 독재 정권 하 집단 학살로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운 이들 모두를 포괄한다. 아나와 야니스가 처음 키스하는 것은, 아나가 사진들 앞에서 야니스의 할머니, 엄마, 세실리아, 이어 그에게 건배를 보내고 나서다. 그들의 관계는 ‘어머니들’ -단순히 아이를 낳은 몸이 아니라- 그 유대를 이어온 여성들의 역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패러렐 마더스>(2021). 왓챠피디아.


임신과 ‘모성애’, 여성의 경험


아나를 기른 것은 그의 부친이나, 작품은 테레사에게만 얼굴, 목소리, 서사를 부여해 그 또한 ‘어느 정도는’ ‘어머니들’로 묶일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는 아내/엄마가 아닌 배우가 되고 싶었고, 이혼하기 위해 ‘창녀’ 취급을 감수했다고 말한다.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했음을 후회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딸이 아닌 커리어다. 테레사를 ‘나쁜 엄마’, 야니스와 아나를 ‘좋은 엄마’로 구분해 평가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엄마와 아내이기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드리워지는 잣대와, ‘헌신적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설정으로 보인다. (아나가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주지 않은 것을 변호하기는 힘들지만, 그의 전 남편이 ‘빼앗아갔던’ 딸을 ‘떠넘기듯’ 보낸 것이 먼저다. 아나가 일련의 폭력을 겪을 때 곁에 있던 보호자가 테레사였다면, 대처가 조금 ‘달랐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야니스가 번호를 바꾸는 제스처 역시 ‘모성애’의 정체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뚜렷한 목적과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닌 ‘저절로’ 하게 된 행동으로 보이는데- 아나와 아르투로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나는 세실리아의 친모일 수도 있을 여성, 아르투로는 세실리아가 제 아이가 아님을 직감한 남성, 둘 모두 자신과 이 아이가 떨어질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내 친딸을 되찾고 싶은 마음’보다 ‘내가 키우고 있는 아이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타고난 모성애’가 아닌 곁에서 돌보며 생긴 친밀감이다.


작품은 또한 1. 임신과 출산은 그것을 몸으로 겪는 이(‘여성’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의 결정임을,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아르투로를 향한 야니스의 분명한 대사와 이어지는 선택으로 강조한다. 또한 2. 아니타의 죽음을 그가 뱃속에 있을 때/혹은 태어난 이후의 환경이나 보호자의 ‘부주의’ 때문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요인에 의한 것으로 명시한다- 추가적인 갈등의 실마리를 지워 추후 연대를 ‘방해하는 요소’가 없도록 하며, 그 무엇도 ‘어머니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패러렐 마더스>(2021). 왓챠피디아.


부재하는 ‘아버지들’


<귀향>(2006) 속 ‘아버지’들은 오로지 가해자(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된 존재)의 위치에 서며 부재했고, 여성들은 그 ‘대를 이은’ 폭력의 기억과 ‘유산’을 나누며 연대했다. 이곳의 아버지들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부재한다. 마을의 조상들은 집단 학살의 피해자로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재했다. 아나의 부친은 아내의 이혼 요구에 보복할 소유물처럼 딸을 데려갔고(테레사의 서술이지만, 작품이 택한 서술이기도 하다), 그가 불법 촬영과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하자 신고하지 못하게 막고는 엄마에게 보내버린다. 세실리아의 친부로 추정되는 아나의 동급생은 사진으로만 등장한다. 작품은 그가 ‘아나가 원래 좋아했던 애였는지’ 여부를 굳이 알려주지 않는다. 세 남성 모두 똑같은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아르투로 역시 아버지/남편 보다는 야니스를 임신하게 해주는 역할,에 가깝다. 유일하게 ‘입장을 지닌’ 남성이나, 야니스가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 혹은, ‘최종적인 연인’의 포지션은 아니며, 본인이 그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의외로 전형적 ‘무책임한 남성’은 아니다. 보다 조심스럽게, 존중과 지지를 충분히 건네며 표현해야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 자체로 비난하기는 힘들다. 결국에는 야니스의 선택임을 존중하고 할 수 있는 형태로 그를 지지하기도 한다.


<패러렐 마더스>(2021). 왓챠피디아.


아르투로와 아나, 야니스와의 유대


아르투로와 아나는 야니스와 로맨스로 엮이나 관계의 시작에는 다른 종류의 유대감이 있다. 그것은 연인이 되거나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원래 야니스의 피사체였던 아르투로는, 그에게 유해 발굴을 의뢰 받은 이다. 야니스를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사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며, 지속적으로 ‘공과 사를 구분’하는 자세는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 사이엔 -경험은 다르더라도- 목표를 공유하는 동료 간의 연대가 있다. 이별 후 아르투로가 작업 소식을 들고 방문했을 때도, 아나가 떠난 다음 야니스가 전화를 걸어 만났을 때도, 그들은 잠자리를 하지 않고 우정의 거리를 둔다. 친밀감은 있으나 딱히 성적인 것은 아니다. 야니스의 옛 시골집에서 그들이 하는 (아마 섹스로 이어졌을)키스에는, 로맨틱한 끌림보다는 목표를 공유하는 동료로서 작업의 시작을 ‘축하’하는 뉘앙스가 있다.


아나는 야니스와 병실을 함께 쓰며 만났고, 아이 아버지 없는 출산을 함께했다. 작품은 그들이 아이를 낳는 장면을 대칭적으로 편집해 경험과 정서가 공유됨을 강조한다. 이후에도 번호를 주고받아 통화하며 공감하고 유대를 쌓는다. 야니스가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바로 털어놓지 않고 번호를 바꾸는 것은, 단순히 진실을 숨기는 것을 넘어 이 유대를 끊는 제스처다. 원치 않았던 임신으로 흔들리던 아나는, 이후 가장 ‘곧은’ 태도를 유지한다. 질투를 품는 대신 곧바로 솔직하게 표출하며, 세실리아의 친모가 자신임을 알게 된 후에도 상당히 이성적인 반응을 보인다. 다음날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관계 회복과 유지의 문을 연다.


<패러렐 마더스>(2021). 왓챠피디아.


진실과 역사, 모두의 유산


야니스는 ‘무덤을 파헤치는 대신 미래를 보아야 한다’는 아나에게, ‘이 나라가 덮은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되지 않았냐’고 날카롭게 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상대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모순적인 상태다. (수입사 ‘찬란’ 언론 보도 자료 참고) 직후 그는 모든 정보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용서를 구한다. 그렇게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된 후에야, 유해 발굴은 시작된다. 곡괭이로 땅을 파고 뼈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과정을 작품은 비중있게 담는다. 그 ‘뼈들’이 단순히 역사책의 몇 줄로 요약될 수 있는 ‘유물’이 아닌- 의안을 하고 있었던/딸랑이를 들고 아이와 놀아주던/결혼 반지에 아내의 이름을 새겼던-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살던 개개인이었음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가족/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함께, 야니스가 겪는 사건과 관계들이 엮이고 이어져 결국 한데 모인다. 아나의 말처럼 ‘너와 함께 미래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너에게 중요한’ 것- 너의 유산, 나와 네가 있는 이곳에 묻힌 진실,을 알아야 한다. 야니스가 이어받은 것은 그의 ‘딸’인 세실리아와 무관하지 않고, 세실리아의 엄마인 아나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유해를 발굴한 현장을 마주한다. 아르투로와 아나 모두 벅차하는 야니스의 손을 잡아 주며 ‘그와 함께한’다. 가장 나중에 태어난 존재인 세실리아의 시선 안에서, 그 유해들은 둘러서 있는 산 자들의 형상이 된다. 유전적으로 그는 누워 있는 어떤 뼈와도 무관하지만, 내전과 독재가 만든 폭력의 역사는 그곳에 있는 누구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그 유산은 그들 모두가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임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다.


 사람의 관계를 확실히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야니스는 아르투로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그들이 연인인지는   없다. 야니스-아나, 아르투로-아나/세실리아의 사이도 전혀 ‘문제 없이 친밀해보인다. 아나는 야니스 뱃속의 아이를 ‘세실리아의 동생이라고 일컫는다.   세실리아의 엄마라는 ‘인정’,  나아가 아르투로를 포함한 그들 모두 ‘가족이라는 암시인 듯도 하다.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무게를 두고자 했던 바는 사랑과 욕망보다는 연대와 ‘다른형태의 가족, 그리고 야니스의 증조부가 겪은 일을 ‘가정사 아닌 ‘모두가 기억해야  역사 가져오는 데에 있었던 듯하다. 아나와 야니스가 독점적 연인으로 남아  집에서 세실리아를 키우는 결말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러한, ‘모두 함께 내보이는 마무리 또한 나름대로 ‘정상가족 해체에 대한 상상과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정도 폴리아모리polyamory 뉘앙스마저 있다- 과한 해석일까.)(&oddkin-도나 해러웨이: 04.14 덧붙임)


<패러렐 마더스>(2021). 왓챠피디아.


마지막 컷이 지나고 등장하는, 역사의 전수에 관한 인용구. 아나가 처음 방문하던 날 야니스가 입은 옷에 적힌 문구,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작품은 살짝 ‘과하게’ 다가오더라도 때로 직접적인 화법을 쓴다. 전개나, 인물들의 표현법도 그렇다. ‘세실리아는 아나의 딸’이라는 진실을, 작품은 야니스 본인의 입으로 고백하는 전개를 택했다. 긴 고민으로 인해 늦어졌으나, 결국 스스로 털어놓았기 때문에 관계 회복이 가능했다. 아나와 아르투로가 감정을 말하는 방식 또한 솔직하다. 야밤의 음모와 은밀한 욕망, 위험한 비밀 따위 뉘앙스는 없다. 화면과 연출, 감정 모두 선명하고 때로 따스하다. 이번에 알모도바르는, ‘끝까지 밀고 나가는’ 대신 절제하며 아울렀고, 모든 인물을 존중했다. ‘스릴러’로 수식 되는 작품임에도 마음이 졸여지기보단 부드럽게 울리는 까닭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패러렐 마더스>(2021). 왓챠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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