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DKIN
ODDKIN
(Formerly: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
EP, <Oddkin>(2021)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한 뛰어난 아버지의 아들들’에서 ‘ODDKIN이상한 친족’으로. 새로운 이름과 EP앨범을 들고, 라일라 라슨과 에즈라 밀러가 돌아왔다. 네이밍부터 확실하고 일관되다. 핏줄과 전통으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을 해체하고, 퀴어적 연대에 기반한 본딩bonding을 밴드와 창작물의 정체성으로 가져간다.
(Q: 이름을 바꾸는 데에 영감을 준 게 뭐야?)
Lilah: “무엇보다, 거대한 세계적 변화지. 지난 2년간의 파열rupture 말이야. 우린 밴드로서 많은 형태를, 많은 일들을 거쳐 왔어, 그러나 이번엔 변화의 깊이를 기념해야 할 때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어.”
Ezra: “확연한glaring 필요성 같은 것처럼 보였어.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는 우리가 그them에게 준 피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어. 이건 우리의 포켓몬 모음에 있어 매우 다른 형체화incarnation야.”
- 2022.01.25, interview by. Taylor Henderson [out.com]
이들은 선즈~를 어떤 페이즈phase로 취급하지 않으며, 오드킨을 음악적 여정의 결말/완성형으로 단정 짓지도 않는다. 다만 ‘다른 형체화’라고 일컫는다. 그러한 태도 자체가, 이들의 ‘플루이드fluid한’ 음악 세계에 있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전 정규앨범 <Deus Sex Machina: Or, Moving Slowly Beyond Nikola Tesla>를 잠깐 돌이켜보면, ‘얼터너티브 록적’이고 펑키한 리듬을 주로 두되, 장르를 넘나들고 뒤섞었다. 다채롭고 실험적인 조합이 들렸다. 이번 EP의 경우 트랩으로 쪼개지는 포인트 리듬은 동일하지만, 사운드를 한 번 해체한 후 차근차근 조립한 느낌이다. 음악적으로 궤를 같이 하면서도 그 스타일과 표현법이 ‘다르다’.
(아이코닉한) ‘U.S.Gay’처럼 번갈아 부르는 보컬은, 없다. 메인 보컬은 첫 트랙부터 순서대로, ‘에즈라-라일라-에즈라-라일라-함께’다. ‘Yada Yada’에서 라일라는 뒤로 물러나, 힘있는 발성의 코러스로 에즈라의 흘러넘치는 감정을 뒷받침한다. ‘Find Me, Morning’에서 또한 라일라가 코러스를 넣어 주고, ‘Straighty Perry’에는 반대로 에즈라의 코러스가 들리지만 ‘Cool Marriage, Bro’의 경우 메인 보컬 라일라가 본인의 목소리를 코러스로 사용한다. (완전히 ‘라일라의 곡’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라일라와 에즈라는 성대를 긁어 쥐어짜듯 하는 보컬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래서인지 목소리에 응어리진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난다. 특히 에즈라는 감정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트랙에 싣는 듯하다.”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에 대한 본인의 글에서 옮김.]
이번엔 특히 더, 라일라는 느릿느릿 안정적이고, 에즈라는 빠르고 불안정하면서도 섬세하다. ‘감정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터트리곤 했던 에즈라는, 유사한 데가 있으나- 종종 그것들을 모아 고요하게 흘려 보내기도 한다. 마지막 트랙을 제외한 네 곡 각각의 분위기가 달라, 두 목소리가 번갈아 어울리며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퀴어)한’ 그림이 그려진다. 오랜 시간 함께 음악을 만들어온 만큼, 각자의 개성 뚜렷한 보컬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꼭 ‘함께’의 형태이거나 대칭적 구성을 이룰 필요는 없다.
그래서, 메인 보컬을 기준으로 트랙을 구분해 살펴보려고 한다. 라일라가 메인인 두 곡은 주로- 빠른 포인트 리듬이 얹힌 느리고 무거운 그룹사운드에, 끈적하게 늘어지면서도 깔끔한 보컬이 얹힌다. 뒤로 갈수록 고조되며 록발라드적 분위기를 띤다. 라일라의 -안정적인 방향으로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박자에 완벽하게 엉긴다. 사운드에서는 전작의 ‘Narcissus’가 연상되지만, 가사는 본인의 설명처럼 보다 ‘개인적’이다.
Now that I know you don’t know you
Now that I know I can’t know you anymore
이제 알겠어 네가 널 모른다는 걸
이제 알겠어 내가 널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걸
- ‘Cool Marriage, Bro’, <Oddkin>
‘Cool Marriage, Bro’, 화자가 사랑하는 ‘너’는 다른 이, 남자와 결혼을 하려는 듯 하다. ‘널 잊으려고 했어 그런데,~’, ‘난 널 막을 수도 있었어’ 등의 구절도 들린다. 화자는 ‘너’를 그리워하고, 마음 아파하지만, 결국 ‘이젠 널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음을 정리하며 마무리한다. 그들이 헤어진 건 ‘너’가 겁쟁이이기 때문이고, 어쨌든 관계의 바람직한 지속은 모든 당사자의 선택이 모여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I know you want me but you’re coward so
Give your husband my love
네가 날 원한다는 걸 알지만 넌 겁쟁이야 그러니
네 남편에게 내 사랑을 전해 줘
- ‘Cool Marriage, Bro’, <Oddkin>
‘Cool marriage, bro멋진 결혼이야, 친구’는 ‘너의 남편’에게 건네는 축하 인사일까. 씁쓸함과 비웃음, 체념과 결국 ‘쿨’한 굿바이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인사다. ‘너’와 ‘나’의 젠더는 특정되어 있지 않다. ‘당연히’ ‘남녀관계’로 본다면 ‘너’는 여성, ‘나’는 남성이겠지만, 우리는 라일라가 그렇게 ‘재미없는’ 이성애중심적 가사를 쓰지 않을-아니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의 젠더와 까닭을 이리저리 짐작하다 보면, 이 개인적 이별의 서사는 꽤나 ‘정치적’인 상상으로 이어진다.
“이 EP 대부분의 곡들은 꽤 개인적이야. 우리 자신이 맺었던 관계들에 대한 인식reckonings이지. 그렇지만 더 큰 이야기로 가져와 말하자면, 난 각각에 대한 태도는 선언declamatory적인 자아확인self-affrimation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완전히 잃는/놓는loss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찾고 추스르는holding 거지.”
- Lilah, 2022.01.25, interview by. Taylor Henderson [out.com]
‘Straighty Perry’, 펑키한 리듬이 잦아들 무렵, 여전한 라일라의 보컬이 들어온다. 특히 후렴의, 진한 뱃심이 들어간 발성에는 분명한 감정과 의지가 묻어난다. 멋들어지게 고조되다 엉키고 무너지는 기타 솔로도 맥을 같이한다. 비디오도 그렇다. 컴컴한 초현실적 ‘무’의 공간, 조명이 딸린 거울 앞에 라일라 홀로 있다. 뒤에서 손이 나와 얼굴을 쓰다듬자, 불쾌한 듯 찡그린다. 손이 별안간 콧수염을 그리고 속눈썹을 붙인 후 사라지고, 그는 거울을 본다. 조명이 바뀐다. 라일라는 얼굴을 지우려는 듯 마구 늘이고 문댄다. 그러다, 거울 속 상과 라일라의 행동이 달라지는 모먼트가 생긴다. 마주 보고 있는 저것은 정말 거울일까, ‘내 모습’이 맞을까? 두꺼운 메이크업이 ‘무너지듯’ 갈라지고 뜬다. 라일라는 손을 앞으로 뻗고, 그것이 거울이 아닌 ‘틀’이었음을 깨닫는다.
노래를 음미하듯 손을 쭉 들어 올리더니, 다음 순간 내리며 기타를 잡는 동작으로 잇는다. 그렇게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상상의 기타를 치던 그가, 장면이 바뀌며 셋업을 걸치고 진짜 기타를 친다. 기타 솔로가 고조되다 와글와글 무너질 때, 클로즈업된-예의 그 콧수염이 있는-얼굴이 다시 나오는데,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주를 이루었던 그 얼굴이, 이번엔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고개를 젓는다. 이어, 모든 분장을 지운 라일라가 차분한 표정으로, “I don’t wanna be your fantasy나는 너/너희들의 판타지가 되고 싶지 않아”라고 노래한다.
손은: 퀴어를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스트레이트들- 이성애규범적 사회가 주는 특권의 안락함을 누리며, 그 ‘밖’의 존재를 그럴듯한 틀 안에 넣어 ‘관람하고’ ‘좋을대로 꾸미는’(수염과 속눈썹) 자들을 뜻하는 걸까. 전통적 ‘남성성’의 소품인 콧수염과, ‘여성성’의 소품인 긴 속눈썹이 한 얼굴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젠더 유동gender fluid의 이미지를 입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들을 걸치는 행위의 주체가 얼굴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말은 그에 대한 당사자의 거부: 이미지화의 틀에 갇힌 대상이었던 이가,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치는 주체의 자리로 이동하고, 처음부터 주체였음을 선언한다. ‘너희들(스트레이트)의 판타지가 되고 싶지 않다’는, ‘나는 실재하며 살아가는 목소리’라는 외침이다.
에즈라의 경우, 특유의 보컬을 사용하되- 힘을 빼 차분하고 고운 목소리로 시작해, 갈수록 고조시킨다. 후렴엔 감정을 한껏 담아 ‘끓여’ 버린다. 특히 ‘Find Me, Morning’은 꼭 흐느끼며 노래하듯 전체적으로 갈라지는데 -기계적 효과일 수도 있겠으나-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톤으로 노래 부르기’ 기술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무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있는데, 어린 나이에 내가 투톤으로 노래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 공연에선 하지 않아, 나한테 굉장히 특별한 거라서.”
- Ezra, 2017.11.03, interview by. Erykah Badu [interviewmagazine.com]
We say we wanna know the truth
But they don’t think we’re ready for the truth
우린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
And you were the living proof I got
And no one could be ready for the truth
넌, 내가 지닌 살아있는 증거야
그리고 아무도, 진실에 대한 준비를 갖출 수는 없을 거야
(……)
You asked me what I was afraid of
I wasn’t sure
네가 물었지 무엇이 두렵냐고
난 확신할 수가 없었어
(……)
Whenever you wanna know the truth
I don’t think I’m ready for this
네가 진실을 알고 싶어 할 때마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
- ‘Yada Yada’, <Oddkin>
‘널 사랑해, 널 더 사랑해’라는 구절이 들리는 걸 보면, ‘너’는 화자의 연인/사랑하는 대상인 듯 하다. 화자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묻고’,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그들은 왜 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고, ‘나’는 왜 두려워할까. 그 ‘진실’이 퀴어적 정체성과 관계라면 이 ‘yada yada이러저러’한 소리가 이르는 곳은- ‘넌 살아있는 (사랑/정체성의) 증거’고, ‘누구도 진실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말만 듣고 마주하기를 피하면 영원히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아닐까. 아티스트의 소수자성으로 곡의 의미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무리한 해석은 아닐 테다. 이들 스스로 ‘퀴어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라일라)고 말하기도 하니.
(Q: ‘Yada Yada’ 뮤직비디오는 매우 퀴어해, 곧 나올 EP도 그렇고. 그대들의 정체성과 퀴어함queerness을 음악 안에 전시하는 게 왜 중요한 거야?)
“그런 기분이야, 우리는 게이 아젠다의 격렬한 지지자들이고, 너희가 그러겠다면 공동 서명자들이지, 그렇게 의도적인 건 아니야. 그냥 우리의 극단적인 퀴어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어. 저절로 빠져나온다니까. 젖꼭지처럼.”
- Lilah, 2022.01.25, interview by. Taylor Henderson [out.com]
“이들의 퀴어적 정체성과 시선은 음악과 별개의 것이 아닌, 음악의 원천이다.”, “‘퀴어’의 이야기를 음악에 담는/한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음악을 만드는, 그들의 말대로 ‘장르퀴어’ 그룹이다.”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에 대한 본인의 글에서 옮김.
비디오를 살피며 조금 더 들어가보면- 유사한 구도의 여러 장면이 이어진다. 먼저 화이트 롱 드레스를 입고 마치 조각상처럼 몸을 꺾으며 포즈를 취하는 에즈라가 있다. 블랙 미니 드레스를 입고 촛불 사이에서 마임을 하는 에즈라도 있다. 쓴 가면에는 작은 ‘얼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또, 어두운 클럽 안에서 홀로 가만히 서서 책을 읽는 에즈라도 있다. 마구 몸을 놀리는 댄서들을 둘러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점점 공간을 좁히고, 그them는 여전히 가만히 서 있다. 그 끝에, 주위에 모인 이들과 함께 소리 없는 비명 혹은 ‘무nothing’가 있는 시선을 던진다. 그들의 착장은 모두 ‘퀴어적’이다. 가장 마지막 파트에는 그 존재들 하나하나가 클로즈업되어 카메라에 잡힌다. 이제 에즈라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모두 한데 모여 있다. ‘프릭freak’의 무리가 이쪽을 응시한다.
비디오를 약간 뒤로 돌리면, 벌거벗겨져 묶인 채 갇혀 폭력을 당하는 에즈라의 모습이, 방 안 TV에서 재생되는 파트가 있다.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에즈라(혹은 1인 2역). 감독/아티스트의 포지션에서, 둘러서 있는 무리에게 설명하듯 가사를 말한다. 그러나 끝에, 담배를 든 손이 떨리고, 눈이 공허해진다. 가사와 함께 설명을 시도해보면- 화면 속 그는 어쩌면 타인/자신에게 억눌린 퀴어적 정체성을 꺼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배우로서의 에즈라 밀러와 뮤지션으로서의 에즈라 밀러가 각각의 역할을 하고, 양쪽이 완전히 어우러져- 곡이 ‘살아 움직이도록’ 했다. ‘어느 하나만’ 이었더라면 나올 수 없었을 유동성이다. 프로듀싱에도 참여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앞으로 이 작품과 아티스트가 열 인간적/예술적 가능성의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분리되어 있던 각각의 보컬이 마지막 트랙 ‘Nothing’에서 만난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처럼 들리는 간주, 반복해 읊조리는 두 목소리가 완전히 ‘동등하게’ 어우러지는데, 섞이고 쌓여 하나의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대개는 더 튀는 편인 에즈라의 보컬이, 일부러 낮게 깔리며 화음으로 들어가 묻힌다. 추임새로 빠지는 부분에 이르러야 그의 음색이 튀어나온다. 같은 구절을 같은 모양으로 반복하는데도, 지루하기는커녕 중독된다. 멜로디와 리듬이 섬세하게 변주하며, 끝으로 갈수록 겹겹이 쌓이고 웅장해진다. 각자의 색과 힘을 빼고 눅여, 서서히 서늘하게 귀에 안착하게 만든다.
This is nothing, with the devil and ghost’s song now(정확하지 않음)
nothing rest, nothing rest, nothing rest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악마와 유령의 노래와 함께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 ‘Nothing’, <Oddkin>
전작에서는 어느 정도 묻어났던- 그 예술적으로 ‘명랑한’(에즈라) ‘퀴어함’이 거의 비치지 않는 트랙이다. 체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현실의 지도’(에즈라)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 위에 새로운 길을 그리며 ‘오드킨을 증식시킬’(에즈라) 것이다.
“이 곡들을 함께 쓰는 과정에서 있었던 정말로 좋아하는fond 기억들이 있어. ‘Nothing’을 쓸 때, 우리는 그걸 완전한 현실의 지도를 그리는 시도를 통해 했거든, 그런데 곡의 가사는 단순히 그 지도가 쓴 전설의 시작에 불과했던 거야. 라일라랑 내가 멜로디를 쓰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곡이 어떻게 흘러갈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내게 이건, 오드킨을 증식시키는proliferating게 무엇인지에 대한 모든 거야. 조그마한 우리 자신을 음악이 지닌 명랑한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서, 우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머리가 빈/마음이 열린 G༠D(?신?:적힌 그대로 옮겼는데 맥락상 맞는 듯하다. 그 신, 말고 요 신이겠지.)의 슬럿들이 되는 거.”
- Ezra, 2022.01.25, interview by. Taylor Henderson [out.com]
ODDKIN오드킨. 이 밴드의 오드하고 퀴어한 이름을 자꾸 불러보게 된다. 이름으로 시작해 이름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맴버 구성이 달라져 바꾸었을 리는 없다. 새로운 이름으로 낸, 그룹명과 동일한 제목의 앨범.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뜻일 테다. 컬러풀했던 선즈~의 ‘마지막’ 앨범 커버와 달리 이번 EP 커버 아트는 흑백. 라일라와 에즈라가 반씩 묘사된 얼굴이 있다. 단순히 ‘둘이 붙어’ 있는 게 아닌, 두 얼굴을 함께 지닌 머리로 보인다. 다른 존재들이 결합해 탄생한, 플루이드fluid한 ‘변종’. 어쩌면 같이 만든 곡에 각각의 메인 보컬을 배정한 것은, 이 ‘oddkin이상한 종족’, 음악적/퀴어적 존재가 퍼포밍할 때- 어떤 곡에서는 그 안의 ‘라일라’ 목소리가, 다른 곡에서는 그 안의 ‘에즈라’ 목소리가 나온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 뭐, 이건 조금 엇나가버린 글쓴이의 상상이고, 보다 가까운 해석은--
이전 네이밍을 다시 가져와 본다.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한 뛰어난 아버지의 아들들’에서 ‘아버지’의 의미는 가부장적인 종류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이들의 시작에 가스펠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고려하면(라일라, 2019.02.13, interview by. Jessica Goodman [readdork.com]), ‘신/전지자’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전통적 신이 아닌 ‘퀴어의 아버지/선구자/혹은 개념 자체’이겠다. 바뀐 이름 ‘oddkin이상한 친족’에는 ‘전해 내려오는’의 뉘앙스가 아예 없다. 전 네이밍의 ‘father’, ‘son’과 같이 젠더를 특정하는(물론 그 의미는 아니었겠으나-) 단어도 없다. 스스로/서로 묶여 이룬 ‘족’ 자체만 있다.동료 뮤지션으로서도 친구로서도 오랜 관계를 이어온 두 사람의 끈끈한 퀴어 연대에 기반한, 그 자신들이 선택한 형태로 이루어진 ‘가족’-을 다시 한 번 선언하며,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도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다.
‘oddkin’을 구글링하면, 도나 해러웨이의 개념이 함께 검색된다. (여기서 따왔을 수도 있겠다.) 덕질을 했을 뿐인데 페미니즘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그의 작업을 찾아 읽어볼까 한다. 뜬금없게도 “정말 이런 식으로 살아도 될 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라일라 라슨과 에즈라 밀러, 이 ‘이상한’ 예술가들이 그려 온 지도 덕이다.
+
옮긴 가사는 오피셜 비디오에 딸린 스크립트를 참고하였으나 몇 구절만, 그것도 띄엄띄엄 적혀 있어, 대부분은 귀에 들어온 소리를 옮겼다. EP 발매 후 몇 달이 지났지만, 오드킨은 공식적인 가사를 아직(혹은 영영) 올리지 않고 있다. 선즈~ 이름으로 낸 몇 곡에서도 비쳤던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하기’를 더 발전시켜 이번엔, ‘보컬’이라는 곡의 요소를 언어로 규정하지 않기로 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본다. ‘가사는 전설의 시작일 뿐이었다’는 에즈라의 말도 있었고. 물론 팬으로서 곡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확실히’ 알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아티스트의 의도를 이리저리 추측해 보며 자발적인 공개/혹은 비공개에 대한 설명을 기다리는 중이다.
++
공식 페이지 주소가 [oddkin.gay] 였는데, 최근 [oddkinband.com]으로 바뀌었다. 원래 주소를 입력해도 동일한 페이지가 뜬다. 이거 그건가, 플로리다 주 상원에서 “Don’t Say Gay” 법안이 통과된 것에 대한 비밀스러운 조롱? (이유가 궁금하다)
* 참고 인터뷰
https://readdork.com/features/sons-of-an-illustrious-father-interview-feb19/
https://www.interviewmagazine.com/film/ezra-miller-november-2017-issue
* 인터뷰 번역
https://blog.naver.com/yonnu/222680006411
* 이미지 출처
https://www.interviewmagazine.com/art/on-the-road-with-odd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