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배웁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Feb 10. 2019

매즈 미켈슨 the 하프시코드.

매즈 미켈슨(Mads Mikkelsen)


Mads Mikkelsen the Harpsichord.Mads Mikkelsen the Harpsichord.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2009, 감독: 얀 쿠넹)
<찰리 컨트리맨(The Necessary Death of Charlie Countryman)>(2013, 감독: 프레드릭 본드)

-드라마: <한니발(Hannibal)>(NBC)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찰리 컨트리맨>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Feat.

<닥터 스트레인지(Doctor Strange)>(2016, 감독: 스콧 데릭슨)



<한니발 > 시즌1. 트레일러에서 캡쳐.


드라마 <한니발>(NBC)이 재미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한니발(렉터 박사)’이 재미있다는 뜻이다. 발음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재밌다. 연기를 이토록 독보적으로 특별하고 폼 나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 매즈 미켈슨의 한니발 렉터는 사람들이 <한니발>을 보는 까닭이며, 작품의 존재이유다. 시즌 1을 보면서는, 주인공 윌 그레이엄을 제외한 주변 캐릭터들을 식상하게 구성해 놓아도, 메즈 미켈슨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을 제작진이 알고 있었기에, 그에 맞게 강약을 조절했을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니발>을 보고 있으면 종종,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자극’을 전달하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윌의 수사방식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살인 장면을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고 직접적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시체의 상처나 핏기 없는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도 많다. 그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거나 호불호를 표시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받은 느낌을 적은 것. 하려던 이야기는, 그러한 감각적인 목적에 매즈 미켈슨은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 배우라는 것이다. 연기를 보기 전에 이미 분위기에 압도되어 버리는. 화면에 잡히는 순간 그 씬의 중심인물이 누구건 시선을 빼앗는. 단순한 ‘Hannibal the Cannibal’ 이 아니다. 시청자는 감히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혐오감 혹은 공포를 느낄 새 조차 없이 그의 매력에 빨려 들어간다. 매즈 미켈슨의 분위기는 잘생겼다는 등의 틀에 박힌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한니발 > 시즌1. 트레일러에서 캡쳐.


큰 편은 아닌데 별을 박아놓은 듯 빛나서 시선을 붙잡는 눈, 눈물이라도 고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통달한 것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 다물고 있으면 영원히 속을 알 수 없을 것 같다. <찰리 컨트리맨>에서 게비가 나이젤에 대해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짐승’ 같다고 말하는데 매즈 미켈슨의 외모에도 해당되는 비유 같다. (‘짐승’ 이라는 표현을 오해해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한니발> 시즌1의 2화, ‘어떤 고기의 허릿살이죠?’ 라고 잭이 물을 때 잠깐 멈췄다가, ‘돼지고기’. 라고 답하는 말투. 고기를 썰어 입에 넣는 잭을 유심히 바라보며 비웃는 건지 흐뭇한 건지 미소라기 에도 애매한 무언가를 띄우는 묘한 입꼬리.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과, <한니발> 시즌1의 1화를 재생하기로 결정한 넷플릭스 유저들은, 한니발 렉터와 매즈 미켈슨의 ‘플레이’에 놀아나게 되겠다는 것을.


관객은 한니발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가 사람을 죽이고 요리해 먹는 모습은 스릴이 넘치지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범죄자가 주인공인 경우 관객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아도 감정이입해 마음을 졸이게 된다. 들키거나 잡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헌데 한니발을 볼 때는 전혀 그런 조바심이 들지 않는다. 그에게선 모두를 손바닥 위에 올려 갖고 놀 정도의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한니발 > 시즌1. 트레일러에서 캡쳐.



그러고 보면 그는 ‘특별한’ 사람들을 주로 연기해 왔다. <더 헌트>(2012)에서는 평범한 희생양이라기보다는 특별하게 고고하기에 누명이 더 치명적인 인간을(전에 들었던 배우연기분석 워크샵에서 비슷한 말이 나왔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에서는 매력적인 천재 음악가 스트라빈스키를-아니 잠깐, 말을 잘못했다. 매즈 미켈슨의 스트라빈스키는 ‘매력적인 천재’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일단 그는 스트라빈스키이기 이전에 ‘이고르’, 욕망을 가진 개인이다. 하지만 예민한 천재 예술가이기에 그 욕망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매즈 미켈슨의 특별한 분위기와 연기가 빛날 수밖에 없는 역할이다.


이고르는 말 자체를 별로 하지 않는다. 표정의 변화도 크지 않아 감정을 눈치 채기 힘들다. 어쩌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본능과 감각을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한다. 낙엽이 쌓인 숲 한가운데 무기력하게 누워 있거나, 격렬하게 피아노를 연주한다. 표정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손끝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동물적'이기도 하다. 샤넬에게 키스를 거부당하고 슬픔과 욕망이 뒤섞인 눈으로 이길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그녀를 보며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는다. 다른 배우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종류의 얼굴이다. 아내나 아이들을 볼 때는 눈빛을 누그러뜨려 귀찮음이 약간 섞인 다정한 의무감을 표시하고, 코코를 바라볼 때는 가면을 한 꺼풀 벗겨낸 얼굴로, 스스로를 태워버릴 듯 뜨거운, 본능적이고 솔직한 욕망을 드러낸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오페라 초연 장면을 위한 영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별 내용이 없는 작품이다. 못 만든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의도되었다는 말이다. 어떤 평가를 내리거나 주제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딱히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원제는 <Coco Chanel & Igor Stravinsky>이며, 포스터에 강조되어 있는 글자는 ‘Coco & Igor'다. 말했듯, 위대한 예술가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이전에 개인 코코와 이고르의 사적인 감정, 둘의 관계만이 중요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예술이나 주변 인물들도 등장은 하지만, 중점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관객은 그저 두 인물에게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안나 무글라리스와 매즈 미켈슨은 탁월한 캐스팅이다. 함께 피아노만 치고 있어도 아찔한 긴장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역사적인 인물을 뛰어나게 재현한다기보다는 배우 고유의 매력을 캐릭터에 맞게 살려냈다. 감독에겐 미안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연출보다는 두 배우 각자의 능력과 상호작용으로 인한 결과라고 느껴졌다. 다시 보니 연출을 영리하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를 치밀하게 구성해 작품성을 높이기보다는 인물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찍어 오히려 관객의 집중을 끌어낸다. 예술작품을 관찰하는 듯한 각도로 찍지만, 정적인 상태의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대신, 시선과 행동을 따라가는 유동적인 카메라를 택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별 내용이 없는데도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러닝타임이 지나갔다. 두 배우의 눈을 정신없이 관찰하다 보면 영화가 끝나 있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탁한 중저음의 두 음색이 뱉는 프랑스어나 러시아어는, 황홀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둘의 대화만 모아 오디오 트랙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사실 안나 무글라리스의 샤넬이 너무 독보적이어서 스트라빈스키가 상대적으로 묻힌 느낌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선 적절했다고 본다. 그의 매력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니라-매즈 미켈슨이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에게서 관객의 시선을 빼앗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무조건 눌러버리는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에게 중심이 가도록 강약조절을 할 수 있는 배우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



매즈 미켈슨의 얼굴은 넓은 편인데, 이목구비는 섬세하다. 그 이중성을 지닌 얼굴이 자부심이 강하고 완고한 동시에 예민한 예술성을 갖고 있는 스트라빈스키를 표현하기에 적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얇은 입술과 곧은 콧날, 앞에서 한 말 그대로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 그 눈이 관심 있는 사람을 향하면 정말 눈빛으로 뚫으려는 듯 보는데, 어쩐지 그 눈빛에 응답하면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세계로 빠져들 것만 같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에서는 그 눈빛에 대응할 안나 무글라리스의 코코 샤넬이 있었기에 팽팽하게 대칭적이고도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는데, <찰리 컨트리맨>이나 <한니발>에서는 게비나 찰리, 윌이나 에비게일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위험함이 느껴진다. 그 ‘위험함’이 매즈 미켈슨만의 ‘악당’ 캐릭터를 구성한다. 주인공에게 눌리기는커녕 화면을 독식한다. <닥터 스트레인지>(2016)에서 케실리우스는 얼굴에 시커먼 선을 잔뜩 긋고도 빛나는 눈으로 모든 것을 압도했으며, <찰리 컨트리맨>(2013)을 본 사람들이 언급하는 것은 주인공 ‘찰리’가 아니라 러닝타임의 3분의1도 채 등장하지 않는 악당 나이젤이다.


<찰리 컨트리맨>(2013)


나이젤은 깡패다. 폭력적이며, 그걸 감추지도 않는다. 등장하는 장면 대부분에서 욕이 섞인 협박을 뱉거나 무서운 표정으로 주먹을 휘두른다. 문장마다 ‘fuck’을 붙이고 전 아내에게 집착한다. 한니발이 평소에는 잔인함을 가면 속에 감추고 있고, 살인할 때조차 우아한 자세를 취한다면, 나이젤은 야수 같은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를 거부하는 게비의 눈은 슬픔과 사랑이 섞여 복잡하게 젖어 있다. 관객의 감정도 복잡해진다. 나쁜 선택인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위험한 끌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가슴이 터지거나 머리가 부서지더라도 품어보고 싶은 남자. 마음은 찰리에게 줘도, 몸의 세포들은 나이젤에게 딸려가는 것만 같다. 게비의 말처럼 ‘틀린’ 것을 알게 됐을 때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느낌이랄까. 무섭고 싫은 것을 떠나 범죄이고 폭력인 것을 아는데도, 이건 픽션이니까, 영화니까, 나이젤의 비틀린 로맨틱에 빠져들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유혹이 자꾸 고개를 든다. 메즈 미켈슨은 단순히 나쁜 남자-를 넘어서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범죄자의 모습으로 길티플레져를 선사한다. 나이젤에게 이미 혼을 빼앗긴 이들은, 사랑에 패배하고 나서 깔끔하게 죽음을 택하는 모습에 한 번 더 반하게 된다. 먹이를 노리는 재규어 같던 눈빛은 눈물에 젖어 슬프게 누그러지고 앙다물려 있던 입술은 뭔가를 참으려는 듯 일그러진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감각적이고 패셔너블한 음악과 어우러져 관객의 뇌에 각인되고, 작품을 다시 찾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찰리 컨트리맨>(2013)



뜬금없지만, 음식을 만지는 매즈 미켈슨은 최고다. 한니발에서는 거의 매화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고,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에서는 음식을 만들지는 않지만 달걀노른자를 분리해 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 짧고 별 것 아닌 장면이지만 굉장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 치의 낭비 없이, 적당히 느린 속도로 깔끔하고 우아하게. 꼭 요리가 아니더라도 낚시 미끼를 만든다거나 하는 실용적인 동작이 매즈 미켈슨과 만나면 예술적인 몸짓이 된다.


https://youtu.be/4QCLtgcJAog

요리하고 먹는 한니발.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예술적인 동작을 하는 경우, 그 모습 그대로 예술작품이 된다. 하프시코드(피아노와 건반 색이 반대인 건반악기)를 사용해 작곡하는 한니발의 모습은(<한니발>시즌2, 6) 샤넬이 디자인한 방에서 피아노를 치는 스트라빈스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같은 화에서 한니발이 스트라빈스키가 한 말을 인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꼭 자기가 한 말을 다시 하는 느낌이 든다. 매즈 미켈슨 팬들을 위한 의도된 대사가 아닐는지.


한니발이 연주하는 하프시코드처럼, 매즈 미켈슨은 ‘특별한’ 사람을 연기하는 데에 특화된 배우다. 내내 그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사실 말이 딱히 필요하지 않으며 그 느낌을 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다. 작품 속에서 매즈 미켈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




매거진의 이전글 쳐진 눈에 담긴 만화경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