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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05. 2019

쳐진 눈에 담긴 만화경 (2)

애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2. ‘평범한’ 캐릭터. 특별한 연기.

 
-영화:
<디태치먼트(Detachment)>(2011, 감독: 토니 케이)
<캐딜락 레코드(Cadilac Records)>(2008, 감독: 다넬 마틴)
<써드 퍼슨(Third Person)>(2013, 감독: 폴 해기스)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2010, 감독: 폴 쉐어링)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헨리, 렌, 스콧, 트래비스. 비교적 평범한 캐릭터를 맡아 적절히 표현해, 관객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고, 때에 따라 상대를 돋보이게도 하는 ‘특별한 연기’를 하는 경우다. 이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 그가 주로 쓰는 것은, 본래의 목소리와 자연스럽게 슬픈 표정이다. 큰 눈에 힘과 빛을 덜어내고, 약간 멍하게 두거나 내리깔 때가 많다. 얼굴 자체를 두드러지게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사용해 감정이 드러나게 한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적당히 낮은 톤에 비음이 섞여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독특하면서도 편안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뉴요커인 그는 미국식 영어로 굴러가듯 부드럽게 중얼거리는 것을 기본 말투로, 캐릭터에 따라 톤을 더 낮추거나 음절을 정확히 끊기도 한다. 감정이 고조되어 화를 낼 때는 성대를 긁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는데,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해 다른 매력이 묻어난다.



<디태치먼트>(2011)


어떤 이야기는, 근사한 해결책 없이 고민을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디태치먼트>(2011)가 그렇다. 소재는 정해져 있지만, 주제는 특정하기 어렵다. 드라마틱한 연출보다는 관찰하는 듯 조심스러운 화면을 택해 오히려 감정을 고조시킨다. 건조해 보이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 여러 상황에 있는 교사와 십대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재를, 깊고 섬세한 사유를 거쳐 특별한 방식과 특별한 연기로 담아내, 특별한 작품이 탄생했다. 글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디태치먼트>는, 직접 봐야만 하는 작품이다.  


<디태치먼트>(2011)


첫 장면은 애드리언 브로디의 클로즈업된 얼굴이다. 그가 연기하는 헨리를 시작으로 교사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작품의 톤 자체가 헨리의 모습 같다. 우울하고 어둡다. 검정보다는 탁한 블루blue와 회색이 섞인 어두움이다. 칠판에 분필로 그려지는, 상징적인 그림들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인용, 메레디스의 흑백 사진이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다큐멘터리나 우화 같기도 해 독특하다.


출연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는 애드리언 브로디지만, <디태치먼트>의 그는 메소드 느낌은 아닌데도 헨리 바스 자체 같았다. 평소보다 약간 느리고, 지친 듯 나직한 말투가, 작품의 쳐진 분위기와 어울린다. 앞에서 묘사했듯 기본적으로 부드럽지만 비음이 섞여 날카로운 데가 있는 목소리는, 차분한 헨리의 한구석에 존재하는 예민함을 표현하는 데에 적격이다.


헨리는 자라면서 이미 지쳐버린 것 같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헨리를 연기할 때, 모든 행동에 ‘지침’을 묻힌다. 감정을 절제해 표현하지만 아주 말라 있지는 않고, 태도는 냉소적인 편이나 자상함이 배어 있다. 허나 상대를 향해 미소 지어도 때로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고, ‘스스로 절대 행복해 질 수 없다고 단정짓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헨리는 모든 말과 행동을 적절히, 최소한으로 한다. 예의를 차리느라 미소를 짓지만, 억지로 웃는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상대가 신뢰하고 호감을 느끼게 되는 묘한 정도다.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으나, 필요한 말은 한다. 삶이 피곤해도 자기 할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챙기는 ‘최소한’의 무언가가 있다.


<디태치먼트>(2011)


처음 교실에 들어온 임시 교사의 기를 누르려고 센 척 하는 학생들에게, 헨리는 동요하지 않는다. 욕을 하고 가방을 던져도 차분히 답한다. 적당히 힘이 들어간 손짓과 눈빛으로 응대한다. 어쩌면 일정 기간만 넘기면 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차가운 여유인지도 모르고, 그의 젠더와 나이, 외모가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도 어렵지만, 헨리의 힘은 분명 그 이상이다. ‘나는 이미 더한 것을 겪었어. 너희들처럼 화가 많이 나기도 했었어.’ 하는 메시지를 보내도, ‘꼰대’와는 거리가 멀다. 부담스럽게 알려고 하거나 주제넘게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열정과 애정이 넘쳐 이것저것 시도하지도, 권위로 누르려고 하지도 않는다. 상대를 이해하면서, 서로에게 적당한 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도 절제해서 내는 그의 감정은, 가족과 연결될 때 무너진다. 애정어린 태도로 부드럽게 할아버지를 달래던 헨리는,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모욕적인 언어와 폭력적인 태도로 간호사를 협박한다. 정말로 상대를 위협하려는 의도가 있다기보단, 감정적으로 힘들고 지쳐서 하는 화풀이에 가까워 보인다. 겁을 먹긴 했지만, 간호사도 상대방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챈 듯 하다. 화를 쏟아낸 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방금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 뒤통수를 만지는 모습이, 간호사의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잡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버스에서 온 몸을 무방비로 의자에 기댄 채 눈물을 흘린다. 엉엉 소리내어 우는 것보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조용히 드러내는 것이 때로는 더 깊고 절망적인 슬픔을 보여준다는 것을, 애드리언 브로디는 알고 있다.  


평소의 헨리였다면 남자에게 맞는 에리카를 도왔을 가능성이 높지만, 감정적으로 완전히 소모된 그는 외면한다. 소리지르며 따라오는 에리카를 피하지만, 결국 뿌리치지는 못한다. 집에 데려온 후의 태도는 역시 ‘최소한’이다. 필요한 것을 챙겨주지만 건조하다. 그러나 상처를 보고,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고 치료해준다. 에리카가 ‘주려는’ 것도 밀어낸다. 그냥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디태치먼트>(2011)


헨리 바스는, 뭐랄까. 정이 ‘없지 않다’. 자상하지만 스스로 너무 지쳐 있어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하는데, 타인을 외면하지도 못한다. 막 달려가서 도와주기보단 부담스럽지 않게 챙겨준다. 감정이나 근사한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 행동이 굉장히 적절한 인간이다. 관객에게 매력을 어필하기보다는 공감이나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주인공이지만, 매력 또한 굉장한 캐릭터가 애드리언 브로디의 헨리 바스다.


에리카와 함께 살며 정이 들고 즐거워하는 헨리의 모습이,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에서 가장 눈물나는 장면 중 하나다. 가장 행복한 표정에도 어떤 씁쓸함이 섞여 있어 이후의 무너짐을 예고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가오는 메레디스를 보고 당황한 헨리가 에리카와의 관계에서 위험을 느껴 사회복지사를 부르게 된다.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어 두려움에 차단해 버린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면 적절한 행동이겠으나 사실 에리카에게도 자신에게도 가혹행위였다는 것을, 헨리는 메레디스의 죽음 후 깨닫는다. 제도가 전부는 아니라는- 피도 섞이지 않고 공식적이지도 않은, 설명할 수 없는 관계에 있더라도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작품은 헨리와 에리카의 관계를 어떤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욕심 같아서는 끝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만, 나머지 장면들은 작품 속에서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여기까지만 써보려고 한다. 너무 슬프고 아름답고 독특하고 완벽한 작품이라서, 내가 건드리면 괜히 망치는 느낌이 든다. 헨리를 연기하는 애드리언 브로디도 그렇기 때문에, 딱 이 정도까지 묘사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고민하는 헨리가 바로 작품 자체이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공허한 눈은 보는 이의 마음에 깊은 선 하나를 긋는다.


<디태치먼트>(2011)



그렇다면 좀 갑작스럽지만, 분위기의 무게를 좀 많이 덜어내, 렌 체스를 살펴보자.


<캐딜락 레코드>(2008)는 ‘체스 레코드(a.k.a. 캐딜락 레코드)’를 중심으로 블루스의 역사를 음악과 함께 들려주는 작품이다. 애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한 레코드사 오너 렌 체스는, 주연이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재능있는 뮤지션들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도운 사람이지만, 딱히 큰 그릇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부터 애인의 아버지에게 무시당한 렌은 이를 악물고 말한다. ‘내 아내는 캐딜락을 몰 것’ 이라고. 그것이 바로 그의 인생 목표다. ‘흑인음악’을 내는 레코드사는, 돈벌이 수단이다. 무슨 대단한 뜻이 있었던 게 아니다.


렌은 가볍고, 노골적으로 돈을 밝힌다. 음악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며,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작품은 나레이션을 통해 직설적으로 그의 성향을 설명한다. 중간중간에 돈을 찍어내는 모습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라디오 디제이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기본, 아내의 외로움도 물질로 해결하려고 한다. 허나 그렇게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쓸데없는 권위나 인종과 성별에 대한 편견이 없다. 머디와 함께 차를 타고 다니는 자신을 경찰들이 이상하게 보자, 하는 말이, “신경 쓰지 마”,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 대사는 “Fuck Mississippi police(미시시피 경찰 X까라그래).”다.


<캐딜락 레코드>(2008) "Fuck Mississippi police."


 
재수없고 제멋대로이며 이기적이다. 설득하기보다는 매수하려 한다. 호의도 돈으로 표시한다. 뭐 대단한 계획도 없고, 운과 감을 믿으며 도박을 반복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자연스러울까. 그거다, 자연스러움. 그 태도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워서, 알아채기도 전에 말려든다. 렌의 확실한 마이웨이는 비난조차 막아버린다. 경쾌한 음악과 어우러져 영화적인 재미를 낳는다. 허나, 그 태도는 어느 정도 ‘연기’다. 차별당하는 흑인들에게 호의를 보인 후 발목을 잡아 이용해 먹는다.  

 
렌은 뛰어난 뮤지션들의 퍼포먼스와 사연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그림자 같은 주연이다. 관객이 렌에게 공감하거나 빠져든다면,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다. 렌은 사업가로서 능숙한 태도로, 표면적이고 비즈니스적인 호감은 쉽게 사지만, 깊게 좋아할 만한 인간은 아니어야 한다. 체스 레코드가 망해 가는 마지막 부분, 멍든 얼굴로 예민하고 쪼잔하게 화내는 모습이 초라하고 우습게 느껴져야 한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렌의 역할을 잘 알고, 적당히 비호감으로 연기해, 시선이 적절한 곳에 모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머디, 척, 에타 등의 ‘진짜 주연’들과 각기 다른 느낌의 케미를 이끌어내며 상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캐딜락 레코드>(2008)


애드리언 브로디의 얼굴은 신기하다. 항상 똑같은 형태에 비슷한 표정을 해도, 어떤 인물을 맡을 때는 무겁고 복잡해지고, 렌과 같은 인간의 것이 되면 가볍고 단순해진다. 말투도 속도와 톤 정도만 아주 조금씩 변화시키는데, 주는 느낌이 다르다. 헨리의 나직하고 지친 말투는, 능글맞고 뻔뻔한 렌의 것으로 ‘쉽게’ 바뀐다.  


머디에게 건네주는 캐딜락 열쇠, 그것이 바로 렌이 음악과 인생,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뮤지션을 돈으로 보지만, 돈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특히 에타를 향하는 시선은 특별하다. 그녀의 사연을 듣고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고, 멍청한 백인 아버지 대신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위로하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상대에 대한 진지함과 존중이 묻어난다. 에타가 마약에 빠져 집을 뺏길 위기에 처하자, 약에 취한 그녀의 얼굴을 감싼 채 자신을 보증인으로 세우라고 말한다. 무거운 표정과 나직한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강한 척 하는 에타를 연기하는 비욘세와, 자신이 넘치지만 에타 앞에서만 약해지는 렌을 연기하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케미가 슬프고 묘해서, 각도를 틀어서 보면 에타와 렌의 사랑 이야기 같기도 했다. 레코드사를 정리하기 직전, 노래하는 에타를 바라보는 아련한 얼굴에서는, <써드 퍼슨>(2013)에서 모니카를 바라보는 스콧이 떠오르기도 한다.
 

<캐딜락 레코드>(2008)




<써드 퍼슨>은 캐릭터보다는 독특한 구성을 통해 끝에 던지는 생각의 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유명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평범하고 클리셰적이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타지에서 만난 (미국인의 입장에서)이국적이고 사연 많은 여인에게 끌리는 비즈니스맨 스콧이다. 적당히 핸섬하고, 적당히 멍청하며, 적당히 로맨틱하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내와 이혼했다는 과거까지, 완전한 클리셰다. 그럼에도 관객이 뻔한 작업 멘트를 날리는 이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까닭은, 애드리언 브로디의 얼굴이 주는 특별함 때문이다.


스콧의 외모는 뜨내기 비즈니스맨 같다. 수트, 젤을 발라 넘긴 머리, 느끼하게 쳐진 눈과 미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비슷한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면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쳐진 눈은 슬프게 보이고, 미소 또한 그렇다. 깔린 목소리는 무언가를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순간 관객은, 이 사람의 얼굴에 내내 숨어 있던 슬픔과 외로움을 깨닫게 된다.


<써드 퍼슨>(2013)


스콧은 완전히 착한 사람도, 아주 못된 악당도, 심지어는 치사한 플레이보이조차 되지 못한다. 상대의 관심을 얻기 위해 수를 쓰는 모습도 애매하다. 그 사이에 진심이 섞여있어 더 그렇다. 완벽해서 소름 돋지도, 어설퍼서 귀엽지도 않은 미지근한 정도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최대한 평범하게 연기한다, 관객이 한 인물이 아니라 세 이야기 각각의 상황과 그 연관성에 집중할 수 있도록.  


허나 그의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이 든다. 모니카와 스콧이 서로를 다른 목적으로 속였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비아냥 대며 화내는 모습에서, 이상하게도 스콧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느껴진다. 갈등이 해소 된 후 비로소 꾸밈 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과, 섬세한 손짓으로 모니카를 쓰다듬는, 어쩐지 아련함이 묻어 나는 스콧의 얼굴에 숨을 멈추게 된다.


애매한 수작도 틀에 박힌 대사도, 애드리언 브로디의 멜랑꼴리한 얼굴과 섬세한 동작에 버무려지면 특별하게 다가온다. 뒤돌아 으쓱 하는 팔이나, 완전히 구겨지며 피자를 베어 무는 입, 모니카의 난폭한 운전에 겁에 질린 표정 같은 것은 덤이다. 그의 연기가 주는 매력이 없었다면, 독특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다소 지루한 스토리를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써드 퍼슨>(2013)




배우를 좋아하게 되면 필모그래피를 훑는 편인데, 애드리언 브로디의 경우 일단 워낙 일을 꾸준히 하는 배우라서 찍은 작품의 수가 굉장했고, 그중에는 도저히 그의 이름만으로는 손이 가지 않는 시놉시스가 적힌 것들도 있어 다 보는데에는 실패했다. 봤는데 재미를 느끼는데에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사실 지금부터 설명할 <엑스페리먼트>(2010)는 후자다. 동일한 제목의 독일 원작에 비해 만듦새가 깔끔하지 않고 자극적이기만 했는데, 포레스트 휘태커와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 덕에 그나마 집중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엑스페리먼트>(2010)


작품은 실험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애드리언 브로디가 맡은 트래비스는 실험당하는 어떤 ‘인간상’ 중 하나인 동시에, 이야기를 이끄는 시선, 눈이자 입이다. 대상화되기보다는 겪으며 지켜보고, 슬픈 눈으로 고발한다. 시스템의 폭력성과, 그에 순응하는 인간들의 또다른 폭력성을.


글에서 애드리언 브로디의 ‘쳐진 눈’을 여러 번 언급했는데, 상황에 따라 다른 성격과 상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항상 주목하게 된다. 어떤 감정이 입힐 때 더 두드러져 보인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의 트래비스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로운 히피다. 초반의 눈은 나른한 웃음이 담겨 은은하게 빛난다. 실험 후에도 여전히 쳐져 있지만, 다른 상태를 전달한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린 듯 멍하다. 똑같이 가만히 있더라도, 전자에서는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평화가, 후자에서는 인간의 끝을 본 상태의 절망이 느껴진다. 오히려 감정이 고조되어 도망치거나 주먹을 휘두를 때보다, 정적인 얼굴에서 확실한 변화가 드러난다.
 


옆길로 살짝 새 보면, 그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소재로 한 세 영화 중, 미국에서 만든 두 작품에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동일한 위치의 주연을 맡았다. 두 배우가 다른 느낌으로 캐릭터를 잘 소화했을 것 같다. ‘같다’고 한 까닭은 에즈라 밀러가 출연한 <스탠포드 프리즌 엑스페리먼트>(2015)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안정적이고 정석에 가까워, 드라마틱한 요소를 끌어올려 관객이 이야기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반면 에즈라 밀러는 소재 자체와 사회 전반적인 현상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 뚜렷하고 연기 방식이 자유로운 편이라서, 관객이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 (그렇지만 역시 영화가 어떤지 몰라서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엑스페리먼트>(2010)



애드리언 브로디는 오바하지 않고도 달라지는 법을 아는, 중심으로 치고 들어올 때와 배경으로 빠질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능숙한 배우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은 작품들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진하게 쳐진 눈썹과 움푹 들어간 눈이 이번에 담고 있을 단어가 로맨틱일지, 슬픔일지, 비열함일지 궁금해져, 볼까 말까 고민하게 된다.  


<피키 블라인더스> 시즌4를 아껴 보느라고 루카 샹그리타를 넣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예고편과 스틸컷 만으로도 시커멓고 무거운 포스를 풀풀 풍기는 그가 이번에도 탁월한 모습을 보여줄 것임은 어느 정도 기정사실 아닌가 싶다. 이미 보기도 전에 킬리언 머피의 토미 쉘비와 대면했을 때 생겨날 서스펜스와 케미에 허우적대고 있다. 자제력을 잃기 전에 글을 마쳐야겠다. 킬리언 머피 토마스 쉘비 애드리언 브로디 루카 샹그리타 만만세.
 

<피키 블라인더스> 시즌4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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