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2021)
<패싱(Passing)>(2021, 감독: 레베카 홀)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메라는 설명하기보다 포착했고, 모든 것은 아리송했다. 스크린은 종종 ‘화이트아웃’되었고, 날리는 눈송이로 뒤덮이며 끝내 하얗게 꺼졌다. <패싱>은 갑갑한 영화였다. 어떤 ‘카타르시스’가 없는 작품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이 한가득이었다. ‘흑백’의 세계를 상징이라도 하는 듯했던 흑백화면은 오히려 도통 인물들의 ‘블랙 앤 화이트’를 분간하기 힘들게 했다. 아이린과 클레어가 지닌 ‘블랙니스blackness’가 얼만큼인지, 딱히 ‘흰 피부’를 지닌 것은 아닌 테사 톰슨과 루스 네가가 어떤 톤과 두께로 피부 메이크업을 했는지, 솔직히 궁금했다. 궁금해하다가, ‘왜 그게 알고 싶은건지’가 알고 싶어졌다. 작품이 택한 모노톤은 그 ‘흑백’조차 얼마나 다양한 농도의 쉐이드를 지니고 있는지, 각기 다른 컬러의 피부들을 두 가지 범주에 끼워 넣으려는 아이디어가 얼마나 편협한지 새삼 깨닫게 했다.
‘패싱passing’할 수 있다는 건, ‘백인-기준이 되는 인간’으로 간주되어, 피부색에 대한 응시나 질문을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작품은 땅을 향해 있는 아이린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그는 응시나 질문을 받지 않고 ‘백인의 구역’을 돌아다니는 와중 자주 모자를 내려 얼굴을 가리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가 말했듯 백인은 ‘패싱’ 자체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 인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특권이다. 그리고 ‘고민할 수 있음’은 ‘고민조차 할 수 없는’ 경우에 비했을 때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범주화의 아이디어는 편협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범주화에서 비롯된 차별과 폭력은 이야기되어야 마땅하다. 작품은 브라이언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혐오범죄 뉴스를 통해 폭력을 가시화하나, 이어지는 대화의 초점은 불편해하는 아이린의 심리에 있다. 그 심리는 명확하지 않았다. 설명이 불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작품이 ‘설명되기를 원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알 수 없는 것은, 인물의 피부색만이 아니었다.
아이린의 시선으로 클레어의 삶을 속속들이 관찰하는 방향일 수도 있겠다는 예상은 빗나갔다. 클레어가 ‘패싱’을 택함으로써 견디는 모욕은 상징적인 대화에 담긴 이후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히려 클레어가 삶에 들어옴으로써 변화하는 아이린의 심리를 관찰했는데, 그마저 모호했다. 두 여자가 교환하는 시선엔 늘상 긴장이 있고, 그들은 완전히 속을 터놓고 대화하거나 힘차게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브라이언이 클레어에게 보이게 된 호의에서 어페어의 뉘앙스를 가려내기도 어려웠다. 그들 사이 미묘한 감정을 의심하며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린을 담을 때도, 화면은 클로즈업된 채 흔들리며 좀처럼 똑바로 보여줄 생각을 않는다. 복합적인 상황에 놓인 그들의 복잡한 심리에서 무엇 하나만을 건져낼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일 테다.
마지막, 클레어 앞으로 뻗은 아이린의 분명한 얼굴과 손짓에 담긴 의도 역시 명확히 읽히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공감과 연대가 이루어진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때일 텐데도. 클레어를 제 뒤로 보내 존으로부터 보호하려던 찰나 클레어가 뛰어내린 것일까, 교환한 눈빛에서 ‘들키면 내키는 대로 하겠다’던 클레어의 ‘마음’을 읽어내고 ‘최소한의 무언가’를 지키려 ‘끝’을 도왔던 것일까. 분명히 감지되었던 건 존 벨류의 백인우월주의와 혐오였지만 그것조차 클레어의 시체 앞에서는 잠깐 사라지고 말았다.
앞서 클레어는 아이린 앞에서 남편이 혐오발언을 뱉게 함으로써 “행복하다”는 말에 담지 못한 정서의 일부를 내비쳤다. 아이린도 관객도 즐겁게 춤추는 클레어를 보며 ‘속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외롭다던 그는 딱히 남편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쪽의 삶으로 돌아’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며, 들킬까 조마조마해 하지도 않는다. 작품은 클레어의 ‘불행’ 혹은 ‘행복’을 콕 집어 전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인 채로 ‘이쪽 세계’를 즐기고, 오히려 아이린보다 허물없이 입주 가사도우미와 대화하기도 한다. 몇몇은 자신이 ‘흑인’ 혹은 ‘백인’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클레어가(그가 특별히 두껍고 ‘하얀’ 화장을 했다는 따위의 설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인지’ 짐작하고, ‘흑인이라는’, 그러니까 ‘유색인종의 피가 섞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겉만 봐서 모른다.”고 흥미로워하거나 ‘속았다’고 분노한다.
그 ‘몇몇’은 대개 백인이다. 휴 웬트워스가 클레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까닭은,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으나 흑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사는 아이린과 달리 그를 자신과 구분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타자일 때는 흥미롭게 관람하지만, ‘나와 같은’ 인간일 가능성이 보이면 ‘위기’를 느낀다. ‘화이트’(그러나 사실 완전히 화이트는 아닌)와 ‘블랙’(그러나 사실 완전히 블랙은 아닌)사이 수많은 컬러의 피부를 임의적인 몇가지 범주에 몰아넣는 -극단적으론 ‘원 드롭 룰One-Drop Rule’ 따위의-‘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을 ‘절대적인 기준’인 척 꾸며내는 부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백인이 아닌 것들’을 골라냄으로써, 백인은 ‘우월하고 보편적인’ 인간으로 정의되었다.
작품은 그 결과값에서 출발한 정체성을 전제하여 인종주의를 폭로하거나 전복하기보단, 인종이라는 개념이 그은 경계 자체에 주목해, 그것이 원래 없었음을 설득하기-보단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흑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Nothing is black and white.”는 것을. 모든 인종의 본질은 사실 ‘패싱’이 아니냐는 물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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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친애하는 백인 여러분>,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게이브(백인)는 장학금을 신청하며 순간적으로 우대조건인 ‘소수인종’란에 체크하고 만다. 결국 장학금을 받은 후 무지막지한 죄책감을 떠안은 그의 자그마한 변명거리는, ‘조상 중에 네이티브 아메리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백인으로 ‘패싱’되는 외모를 지녔고 현재의 기준으론 백인이지만, <패싱>의 배경인 1920년대 남부라면 ‘유색인종’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가 ‘소수인종’란에 체크해선 안 됐던 까닭은 ‘의심의 여지 없는 백인이어서’가 아니라, ‘백인’으로 살며(매일 의식해야 했던 클레어와는 다르다) 특권을 누려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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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사 톰슨과 루스 네가가 ‘백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스토리의 표면적 묘사에 충실했다면 보다 ‘백인 같은’ 외모의 배우를 캐스팅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품은 그보단 소수자성을 더 경험하여 ‘알고 이해할’ 배우들을 택했다. 그게 더 ‘옳고’, 개인적으론 더 ‘어울리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당시 기준이라면 흑인으로 분류되었을 핏줄’을 지닌 배우라 해도, 평생 ‘백인’으로 살았을 것이 분명한 얼굴에 그러한 복잡한 감정이 드리워졌다면… 오히려 몰입하지 못했을 것 같다. 사실 구분이라는 게, ‘다들 백인으로 본다면 백인’인 것이기도 해서, 작품이 이끄는 대로 이해하고 관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