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왕성 로맨스>(2021)
<해왕성 로맨스(Neptune Frost)>(2021, 감독: 솔 윌리엄스/아니샤 우제이먼)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는 솔 윌리엄스와 아니샤 우제이먼. 그들조차 ‘여러 번 보라’고 조언할 만큼(2021.11.04. GV [Film at Lincoln Center]) <해왕성 로맨스>는 ‘소화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중심’ 스토리나 인물만이 아니라 컷 하나하나와 코스튬, 소품, 가사의 문장, 인물의 이름 등 모든 디테일에 무게가 있고, 그 합은 ‘난해’할지언정 일관되고 조화롭다.
아버지가 ‘테크놀로지’라는 단어를 좋아해 동생의 이름이 ‘테크노’가 되었다고 마탈루사는 말한다. 전쟁 이후 고향을 떠나거나 콜탄 광산에서 일해야 했던 형제는, ‘테크놀로지를 캔다’는 말을 듣고 남기로 했다. 테크노는 자신이 캔 콜탄으로 ‘통신’을 시도하고, 감독관은 “꿈도 꾸지 말라”며 그를 때려 죽인다. 본인들의 손을 거친 원료로 생산된 ‘테크놀로지’로부터 배제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현실이 읽히는 전개다. 마탈루사는 그곳을 빠져나와 하염없이 걷다 초현실적인 꿈을 꾼 후,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꿈에서 그는 타인의 에너지와 연결되었는데, 그 타인은 넵튠, 초반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던 내레이터다.
‘소년’은 자신을 성추행하던 목사를 기절 시키고 도망쳤다. 챙겨 온 힐을 신고 뛰다 사고를 당했고, ‘다시 깨어남’과 동시에 육체의 모양이 바뀐다. 보이는 모습은 인터섹스intersex, 스스로 정의한 바로는 논 바이너리non-binary(“성별이 있거나 ‘소년’이었던 과거의 나”)로. 이후 만난 ‘이노센트’는 그를 취하게 만들어 제 집으로 데려가고, 아래쪽을 더듬다 기겁한다. 도망친 그는 마을을 거쳐 ‘세계’로 들어간다. 경계를 통과하며 ‘분장’이 바뀌고, 꿈에서 만났던 마탈루사와 연결된다. 넵튠이 이름을 밝히는 것은 이 이후다.
오프닝, 작품은 설명 없이 한 형상을 클로즈업해 담았다. 낯선 분장을 한 이 존재를 관객이 궁금해하고 있을 때, 하늘과,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년’의 얼굴로 화면이 이어졌고,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나는 23년이 되던 해에 태어났다.” 처음에 완전히 이해되지 않던 그 문장은 넵튠이 ’세계‘에 오던 날 다시 언급되고, 끝에 재등장하며 비로소 그 의미를 빛낸다. 그는 ‘23년이 되던 해’에, ‘넵튠’으로 태어났다. 이전 이름과 성별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개인에게 있어 그 ‘탄생’은 ‘소년’으로 규정되었던 과거를 죽이고 “그 어떤 잡지도 모습을 정할 수 없는” 이로 거듭났음을 뜻하겠고, “나는 죽음보다는 탄생이다”, “내 삶은 내 것이 아니었다”는 말과 연결해 짐작하면, 저항의 방법을 체화한-그 상징으로서의 재탄생을 의미할 수 있겠다.
“유일한 여권은 고통”이라고 메모리는 말했다. “당선인을 미리 알고 있는 선거”,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안티 퀴어적 법안들, 폭력적 남성성과 종교(목사) 등-“책에 쓰인 것이 아니면 보지 못하는 하얀(백인의) 생각과 이성애의 생각”, “이분법 범죄binary crime”에 저항하거나 상처받고, 버려진 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이 ‘세계’, ‘마탈루사 왕국’, 인터넷 쓰레기 폐기장E-waste camp, ‘가상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다. 종종 ‘고장난 듯’ 움직이는 이곳의 주민들은 현실에선 이미 죽었거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존재의 에너지가 만나며 그들 모두가 연결되고, 넵튠은 꿈속의 초월적 존재가 노래했듯 해킹을 시작한다. 그것은 흐르는 ‘전기’의 원천인 제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행위예술에 가깝게 표현된다. 그들을 착취해 채굴하던 콜탄에서 나온 원료로 만든, 그들을 배제하며 ‘일상적으로’ 굴러가던 가상세계가 멈추고, 서구 언론은 ‘시민들의 불편’을 토로한다. 러시아와 중국을 지목하며 이 ‘버려진 것들’의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하던 ‘그들’은, 결국 이 ‘세계’를 내려다보며 타겟을 포착하고 파괴한다.
그 잔해 속에 넵튠은 서 있다. 쓰러진 이들이 유령으로 되살아난 듯도 한 형상들이 북을 치며 노래하는 가운데, 저들의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내가 바로 마터 루저 킹”이라고 말한다. ‘당신들이 없앤 이들은 나와 연결되어, 내 안에 담겨 있다. 우리의 목소리를 아무리 삭제하고 수많은 ‘세계’들을 멸망시켜도, 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일 테다. “내 진실은 암호화돼 있고, 당신들의 것은 읽기 쉽지……당신들의 벽은 막지 못해, 촛불처럼 타는, 수백 번 목이 잘려도 환하게 타오르며 서 있는 이들을.” 이 동시대의 ’마터 루저 킹‘, ’버려진 순교자들의 왕‘은 읊는다, 저항의 방법론, 존재의 선언으로서의 시를.
일상 대화에 철학적 문장을 포함시키는 등 비유적 표현과 설정들로 인해 난해하다는 감상이 뒤따르는 작품이지만, 사실 그 부분들은 꽤나 직설적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의 부조리한 현실을 대사를 통해 자세히 들려주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해 비용을 깎아. 전쟁으로 기름값을 깎고 자기네들 군대에 연료를 대.”, “우리는 광물만큼 가치 있는 존재야.”, “권력은 영혼에 의지해 살아가는 로봇을 만들고 싶어해.” 테크노의 죽음에 분노한 이들이 거리를 메우거나, 사이콜로지가 몸담았던 저항세력이 탄압 당하거나, ‘세계’의 주민들이 직설적인 가사를 노래하며 카메라를 향해 엿을 날리는 모습들은 결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주요 촬영지는 르완다이고, 콜탄 광산과 전쟁의 언급을 통해 콩고 등의 국가를 분명히 떠올리게 되나, 공간적 배경이 명시되지는 않는다. ‘아이파이’라는 낯선 기기의 존재로 미루어 시간적 배경을 미래로 짐작할 수 있으나, 상황은 현재와 흡사하다. 작품은 특정 국가의 특정 이슈들에 집중하면서도, 현재진행형 식민주의-“모던 테크놀로지의 많은 부분이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대한 착취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솔 윌리엄스)을 비롯한 동시대의 국가적/국제적 폭력과 불평등 전체를 훑어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공동 감독이자 시네마토그래퍼인 아니샤 우제이먼을 비롯한 스텝과 배우들이 아프리카의 르완다, 브룬디 등지에서 출생했거나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 아티스트들의 에너지는 작품 속에서 다채로운 형태로 구현돼 독자적인 예술로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하나로 모여 흐름을 만든다.
민속과 현대, 국경을 넘나드는 음악들과 그에 어울리는 퍼포먼스 씬들은, 역동적이고 섬세한 카메라 무브, 화려하고 정교한 편집과 만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분노와 고통이 묻어나곤 하는 그것은, 흥을 돋우기 위한 양념으로서의 스타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저항의 선언이다. 사이콜로지는 “왜 공격을 해서 권력을 부수고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세계’의 주민들이 택한 혁명의 방법은 시, ‘암호화된 진실’이었다. <넵튠 프로스트>를 쓰고 함께 완성한 예술가들이 택한 혁명의 방법 역시 영화와 노래와 공연과 디자인 같은, ‘시’였던 것이다.
이 글은 절대 <넵튠 프로스트>라는 경험을 아우르지 못한다. 여러 번을 돌려봐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고,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이토록 다층적인 메시지의 모든 결을 짚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 하나라도 궁금해하거나 이해하고 싶어지기를 바라며, 최대한 작품의 워딩을 사용해 서사를 정리하고 소개하는 방향으로 적었다. 해석보다는 이 울림을 서로 공유하고 ‘시’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해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그러니까….. 카야 프리가 “Fuck Mr. Google”을 외치며 카메라를 향해 네온 오렌지빛 매니큐어를 칠한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모습을, 전 세계가 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 참고 인터뷰
https://youtu.be/VpcbmqTFJu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