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않인 Apr 30. 2023

<사랑의 고고학>, 짧은 메모.

<사랑의 고고학>(2022, 이완민)


*  작품의 핵심 전개 포함.

 


그들은, ‘그렇게 대해도 되는’ 상대를 귀신같이 알아본다.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고 상대의 죄책감을 유도하는 교묘한 화법을 사용하며, 어쩌면 그 모든 거짓을 스스로 믿는다. 그렇게 빼앗은 에너지로 또다른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영실이 여인식이 짠 스토리 상자 안으로 떠밀릴 때, 영화는 스튜디오의 문과 창, 조명을 이용해 그 틀을 가시화한다. 관객은 떨어진 곳에서 프레임과 함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지만, 여인식이 조성한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의 날선 이야기를 온몸으로 마주해야 하는 영실은, 그럴 수 없다.

 

어째서 이토록 길어져야 했냐면, 최대한 영실의 속도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투명한 유리벽에 투과되어 똑바로 보이지 않던 여인식이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 지난 세월을 차근차근 곱씹으며 깨닫고, 제 의지로 끊어내기까지. 관객에겐 고작 세 시간이지만, 영실에게는 여덟 해였다. 영화가 지루하다고 할 수도 있고 구성이 늘어진다고 할 수도 있다. 취향과 성격, 경험의 차이다. 그러나 단 하나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영실이 답답하다는 비난이다.

 

영실은 조금씩 거절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의 무례에 화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간 겪은 일들이 변화에 영향을 미쳤겠으나, ‘경험’이나 ‘성장’ 따위의 단어를 섞어 폭력을 얼버무릴 수는 없다. “우도도 인식처럼 나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할까?”, 8년동안 여인식이 드리운 그림자에 붙들려 있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자기 의심과 주저. 화분을 잔뜩 키우고 그레타 툰베리의 연설에 감명 받는 영실, 벌목 일을 하지만 나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우도. 그들에겐 닮은 데가 있고, 우도는 여인식과는 분명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실에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누에치던 > 채미희 같은 사람이 있었듯, 강영실 같은 사람도 있다. 갈수록 쿨하고 당당하고 자신이 무엇이고 지금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만 아는 인물들로 가득해지는 픽션의 세계에서, 이런 이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이완민 감독의 작업은 소중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프터썬만의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