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Vincent, <All Born Screaming>
St. Vincent
<All Born Screaming>(2024)
* 인용에는 오역 가능성이 있음
세인트 빈센트의 음악은 안전하거나 안락하지 않다. 밀도나 강약과는 상관 없이, 긴장을 풀어 주기보단 조이고, 머릿속을 비워 주기보단 은근히 꼬이고 엉키게 만든다. 실험적으로 열려 있는 사운드 조합이 청각을 담당하는 뇌에서 쓰지 않던 영역을 깨우는 것만 같다. 그의 레코드엔 정서/주제면에서 폐쇄적인 데가 있었고, 바로 그것이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송라이터에게서 비롯되어 세상으로 뻗었다가 종종 원천으로 돌아가는 내러티브. 익히 아는 세계에 코드를 대입해 완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기보단, 고대했던 외계의 초대를 수락하는 기분으로 열어보곤 했다. 이입이라고 적기는 힘들고, ‘몰입해 관계 맺기’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겠다. 수많은 이들이 동일한 곡을 접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그 관계는 일대일의 은밀한 종류였다. 아티스트가 창조한 세계에 흡입돼 골목골목을 황홀하게 헤매다 마침내 빠져나와서, 뱃속 내밀한 곳에 그 미로가 새겨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흔적은 몰입한 청자가 색다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자신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것이 세인트 빈센트의 음악이었다.
‘세인트 빈센트’보다는 ‘애니 클락’의 개인적/음악적 기원을 돌아보는 듯했던 2021년의 <Daddy’s Home>조차 어느 정도는 그랬다. 이후 3년, ‘공백기’는 아니었다. 그동안 나온 여러 싱글들과 커버 레코딩/퍼포먼스는 각기 달라, 좀처럼 다음 앨범을 예측키 어렵게 했다. 4월 26일 공개된 <All Born Screaming>에는 그 전부가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6+n피스 앨범의 유산과 커버들-메탈리카, 포티쉐드, 케이트 부쉬, 롤링스톤즈, 너바나 등-까지 비치는데, 그것들을 섞어 고차원의 화학적 결합을 완성하곤 다 놓아버린 느낌이다. 세인트 빈센트는 다시 한 번 안주를 거부했다. 실험하고, 파고들고, 넓히고, 압축하고, 덜어냈다.
제 세계를 충실히 쌓은 아티스트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밀고 나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마스터피스가 태어난다,는 법칙은 대개 옳다. <All Born Screaming>은 그런 작품이다. 물론 애니 클락이 ‘하고자 하는 것’을 않은 적은 드물었다. 스타 프로듀서 잭 안토노프와 협업한 직전 두 정규 앨범의 소위 ‘대중성’에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타이트한 구조와 캐치한 멜로디, ‘꽉 차있되 너무 시끄럽지는 않은’ 그룹사운드의 센슈얼 얼터너티브 록, <MASSEDUCTION>(2017). 그 팝적 섹시함은 외로움과 불안, 중독에 절어 있었고 때문에 아름다웠다. <Daddy’s Home>(2021)은 70년대풍 사이키델릭 블루스와 라운지팝의 루즈함을 택하며 전작과 분리되려 했으나, <MASSEDUCTION>의 정서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늘 그래 왔지만, 이번엔 제작 과정부터 더욱 그렇다. 음반을 발매한 ‘Total Pleasure Records’는 애니 클락이 <All Born Screaming> 녹음을 위해 세운 스튜디오다. 프로듀서는 ‘세인트 빈센트’ 홀로이며, 곡의 크레딧도 데이브 그롤과 케이트 르 본을 제외하곤 ‘애니 클락’ 뿐이다. 인더스트리얼 록을 중심으로 바로크 팝, 일렉트로닉, 레게, 사이키델릭, 메탈까지 들어와 조화를 이루는 이 레코드는 과연 흥미롭다. 나사를 풀어 놓아주는 그대로 풍부하다. 구조의 압박은 최소화하고, 퍼즈-블래스트, 사운드 반전, 강약을 세심하게 배치했다. 밀도와 여백이 공존하는, 절제미가 있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 사랑, 재탄생에 관한 스토리텔링과 메타포가 담긴 트랙들에 시네마틱한 뉘앙스가 있음에도, 캐릭터는 희미하다. 비교적 최근 앨범들에서 세인트 빈센트는 커버 아트, 뮤직비디오, 라이브 무대까지 앨범의 페르소나에 맞춰 스타일링해 왔다. <All Born Screaming>의 스트레이트 헤어, 옅은 메이크업, 심플한 흑백의 상하의에는, 캐릭터성을 지우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몇 되지 않는 신곡 라이브 영상을 살피면 역시 조금 다른 태도가-퍼포먼스에서 ‘연기’를 별로 신경쓰지 않음이- 느껴진다.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가장 사적이었던 <Daddy’s Home>에도 세인트 빈센트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허나 픽션적 디테일을 배제하고 포괄적인 언어를 사용한 <All Born Screaming>의 ‘여지’는 본격적이다. ‘저마다의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라’며 아티스트가 리스너에게 넘겨주는 이 앨범의 페르소나는 ‘그대들 누구든’이다.
“(……) 그런 레코드들을 통해 나는 페르소나를 가지고 놀거나 정체성을 해체했다. 당시에 내가 거기에 있었고, 그런 것들을 탐구하는 데에 흥미가 있었으니까. 또한, 나는 퀴어다, 나는 코드를 어떻게 뒤집는지 안다. Jump Street부터 해왔다, 그러니 당연히 내 작업에서 그것들을 탐구할 것이다. 당연히 나는 정체성과, 코스튬과 젠더를 퍼포먼스 차원에서 탐구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건 내 의식의 일부였으니까. 그럼에도 <All Born Screaming>에서는, 내가 그 지점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It’s not concept in any sort of way. It’s just life, death and love.”
“처음 반쪽은 지옥의 계절이며, 삶의 폭력성을 다룬다. 두 번째 반쪽은 깨달음이다, 물론 세계에는 고통과 커다란 상실과 자기혐오가 있지만, 커다란 기쁨과 아름다움 또한 있다는. 나는 삶이 얼마나 짧은지 날카롭게 인지하고 있고, 사랑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위해 살아갈 만한 게 정말로 없다. (.…..) (Love)it’s the hardest thing in the world and yet dead simple at the same time.”
- Annie Clark, interviewed by. Ali Shutler [Dork]
죽음과 삶-괴로움과 즐거움의 밀접성,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사유는 세인트 빈센트의 작품에서 낯설지 않다. “What could be better than love?”(‘Smoking Section’), “If life’s a joke, then I’m dyin’ laughin’”(‘The Man’) 전작들의 픽셔널한 콘셉트 사이에 시적인 직설로 끼어들었던 실마리들이 (아마도 “숲속에서의 기나긴 산책”을 통해) 모이고 엮인 것일까.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는 애니 클락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송라이터 본인이 ‘내 의도를 신경쓰지 말라’는 투로 말하니.) 다만 록스타의 서프라이즈 선물을 샅샅이 즐기기 위해, 느슨하게 이어지는 서사로 트랙을 훑는 작업을 해 볼 수는 있겠다.
https://youtu.be/F8oWtoDqxZs?si=UB3FTVyZQ2tZDIG-
첫 트랙은 ‘Hell Is Near’. 음산한 리프와 마이너 키 보컬로 열린다. 이 음울함은 곡이 진행되며 베일을 벗듯 감미롭게 피어난다. 악마의 속삭임을 모방하듯 몽롱한 가성의 보컬링은, 엔딩 무렵 긴 호흡의 노이지한 그룹사운드와 어우러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2절의 블루스-포크틱한 기타 연주와 엔딩의 피아노… 신중하고 디테일한 사운드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캄캄한 세계에 들어선다. 이 흐름 안에서 “지옥이 가까이 있다”는 오히려, 안정감과 약간의 기대가 담긴 서술로 들리기도 한다. 가까이 가려는 주체가 ‘나’이며, 그는 ‘지옥까지 거의 다 왔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자기파괴의 감각은 어떤 출발점이다.
“Give it all away, you give it all away / ‘Cause the whole world’s watching you”
“천사들이 내려와 숨쉬지 않는 너를 데려갔”고, “너의 모든 부분이 내 안에 있”다. “I breathe you out / Breathless, breathless, breathless”, “And I’ve been mourning you since the day I met you”: ‘Reckless’에서도 ‘너’의 정체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나(아티스트)’의 예술적 자아이거나, 사랑의 감각 자체일 수도 있다. 건반과 고요한 보컬, 하모니로 느릿하게 흘러가는 ‘Reckless’는, 들이쉰 숨을 가두고 귀기울이게 되는 트랙이다. 2분 35초 즈음의 퍼즈-블래스트. 총소리(“London sun, the air’s like a shot”)”스럽게 끊기는 사운드와 함께, 곡은 비로소 숨을 토한다. 내면의 불안이 엉겨붙어 멎었던 심장이, 터지며 다시 뛰는 듯하다. 그 박동은 ‘Broken Man’에서 통제를 잃고 폭발하고, ‘Flea’에서 뒤틀려 날뛴다. 인더스트리얼 하드록, 펑키하거나 메탈릭한 디테일이 잘 짜여 있는 두 트랙을 이어 듣는 재미는 대단하다. 유명한 ‘데이브 그롤의 드럼’과 역시 유명한 ‘애니 클락의 기타’가 각자의 몫을 훌륭하게 한다. ‘뜨겁게 타오르는’ ‘Broken Man’ 비디오는 또 어떤가.
https://youtu.be/RYJxPg6quL4?si=7FD2BtfWl5dcJxSB
가사는 ‘broken’이라는 상태가 곧 자아가 되어버린, 스스로와 주변을 파괴할 위기에 처한 인간을 묘사한다. ‘Reckless’에서 “I’m cracking up”이라던 화자는, 이제 “How could you see me now? / If I stopped cracking up myself”라고 묻는다. 거리에서 “king size killer”인 화자는 “earthquake shaking” 중이다. 인간이라면 대부분 알 테다, 부서지기 직전이거나 이미 부서진 내면이 공격성을 띠고 표출되는 상태를, 일그러진 얼굴을 온 세상이 들여다보는 듯해, “뭘 봐?”라고 쏘아붙이게 되는. 이 위태로운 정서는 ‘Flea’의 허기를 거쳐 ‘Big Time Nothing’의 허무에 닿는다. 리드미컬한, 에너제틱한, 이 타이트한 글램-펑크funk 기반 트랙은, 텅 비어 있다. 합창으로 반복되는 후렴을 자동으로 흥얼거리다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I look inside, I look inside, I look inside, nothing.” 경쾌한 멜로디에 담긴 공허. 아이러니가 성공적으로 쓰였다. 벌스의 명령문들은 ‘스타의 덕목’, 범위를 넓히면 ‘사회인의 덕목’으로도 읽힌다. 이를 풍자하며 사운드를 반어적으로 사용한 곡은 과장하면 아티스트마다 하나씩은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기시감이 듦에도 ‘Big Time Nothing’은 독자적으로 흥겹고 괴롭다. ‘Flea’와 연달아 들으면 <MASSEDUCTION>의 몇 곡과 겹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Smoking Section’이 떠오르는 ‘Violent Time’은 다음 트랙으로 적절하다. 펑키한 기타 연주에 취해 있을 때, ‘Big Time Nothing’은 기습적으로 끊어진다. 볼드한 바로크-누아르-블루스풍 전주, 거친 날숨 소리가 들린다. 그 숨은 보컬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연약한 진동을 유발하고, 엔딩의 기나긴 하울링과 함께 떨어져나간다. 그 절박한 날숨을 앨범 전체의 클라이맥스나 전환점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세 트랙의 연이은 ‘banger’ 뒤에 배치된 ‘Violent Time’의 드라마틱하고 긴 호흡은, 피부를 조이며 긴장감을 최고로 끌어올린다.
https://youtu.be/mtY1vRh7QwQ?si=0csQWtbL0T4zj1UK
“When all of the bombs inside / All of the wires I hide / All of the wasted nights chasing mortality / When in the ashes of Pompeii / Lovers discovered in an embrace for all eternity”
- ‘Violent Times’
‘그 와중에도 내 목소리를 듣고 있던 당신’은 신이나 신적 존재로 읽히기도 하지만, 화자 자신이나 로맨스의 대상, 혹은 ‘사랑’이라는 해석이 더 끌린다. ‘필연적으로 유한성을 좇다 발견한 유일한 무한성’. ‘you’가 누구든/무엇이든, ‘The Powers Out’의 화자가 말을 건네는 상대와 유사하리라 짐작한다. ‘Violent Times’의 혼돈은 화자에게 집중돼 있었다. 정전에서 비롯되는, 아니 정전으로 인해 드러나는 ‘The Powers Out’의 혼돈은 주위의 낯선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결국엔 화자에게로 돌아온다. (“That’s why I never came home”) 느린 템포로 호소하는 보컬, 사이키델릭한 기타 연주는 점차 고조되다 후렴에서 강렬하게 찢어진다.
‘Sweetest Fruit’에서 레코드는 구체적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세인트 빈센트는 전작에서 ‘The Melting of the Sun’을 통해, 여성 예술가로서 자신의 영웅들을 기린 바 있었다. 한층 밀접한 레퍼런스가 있는 ‘Sweetest Fruit’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동료 퀴어 아티스트들을 기린다. 1절은 SOPHIE를, 2절은 (첫 오픈리 게이 정치 풍자 만화가) Daniel Sotomayor를. 세인트 빈센트는 몽환적인 멜로디를 타고 시공간을 초월해, “달에 닿으려 했던 나의 소피”, “미국을 찾기 위해 버스를 탔던 나의 대니” 곁에 (말하자면 영적으로) 머무르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헌사를 보내는 듯하다. 그 모호함, “스윗”함, “프루티함”: ‘Sweetest Fruit’의 매력과 가치는 거기 있다. 후렴의 “You’re the natural, baby / You don’t have to quit / Sweetest fruit”에서 곡은, 송라이터와 두 아티스트에게서 ‘펠로우 퀴어’들에게로 확장된다.
“I’m at the back of my head / Watching my life happening / Watching the sink filling red / And I’m not stopping it / I have to visit so many planets / Before I find my own / I fall asleep in the golden highway / Before I finally find it”
- ‘So Many Planets’
때문에 이어지는 ‘So Many Planets’의 “행성” 내러티브에서 더욱, 소외alienation와 떼어놓을 수 없는 예술성, 그리고 외계alien적인 아름다움을 연상하게 된다. 그 맥락을 살피면, 어렵지 않게 보편의 것-내 것으로 가져올 여지도 있다. 흥겨운 레게 리듬에는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보컬링이 얹힌다. 피로와 무기력의 향이 짙게 풍기지만 포기의 예고는 아니다. 앞선 글에서 다룬 <Only God Was Above Us>(Vampire Weekend)에도 있던 “let go”의 감각과 닮았다. “내 행성”이라는 건 어쩌면 판타지, 그것을 찾는다는 건 곧 죽음의 안식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내 행성을 찾기 전 정말 많은 행성들을 방문해야 한다”는 서술은 상호 연결의 필요성에 대한 암시 같기도 하다. 우리는 저마다 ‘내 것이 아닌’ 행성들을 떠돌다 조우하는 것이다. 핵심은 “마침내 찾는” 달성이 아니라 “찾고 방문하는 과정”에 있고, 거기엔 비명이 가득하다.
https://youtu.be/VefkG-Re4_Q?si=b9YwUpKpujUXZss7
“I was a pantomime of a modern girl, those were the days, and I was miserable / A karaoke version of Leonard’s ”Hallelujah“, my whole damn life, I had never exhaled”
- ‘All Born Screaming’
‘All Born Screaming’: 이제껏 들려준 조각들을 종합해 ‘well’의 톤으로 돌아보는 듯한 이 엔딩은, 여유롭게 경쾌하다. 수 층으로 쌓였던 긴장과 경계를 푼 아티스트가 툭 터놓는 속내 같은 벌스. 후렴구 “We’re all born screaming”에 이어지는 효과음 ‘eah’의 모호한 딜리버리는 ‘yeah’의 변형, ‘으’와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며, 반복 끝에 “well”이 된다. 이 김새는 소리는 인간의 삶과 닮아 있어 적절하다. 7분가량의 러닝타임 반이 지날 즈음, 꽤나 길게 늘어지던 반주가 멎는다. 이번에는 드라마틱한 폭발을 위한 정지는 아니다. 심장 박동처럼 간결한 드럼과 다채롭게 변주하는 기타에 맞춰, 여러 겹의 하모니로 쌓은 가성의 보컬이 “All Born Screaming”을 수없이 되풀이하기 시작한다. 열 트랙은 각각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나, 레코드를 한 흐름으로 듣는다면- 앞선 죽음과 파괴와 상실, 혼돈과 고통과 공허와 즐거움의 소리들은 이 ‘하모니’로 수렴한다. 합창은 어느 순간, 특정한 화자의 것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것으로 와닿는다. 아티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놓고 “만트라”로 읊는 마무리, 이는 오히려 ‘레코드는 당신들의 것’이라며 건네주는 제스처로 읽힌다. 애니 클락이 말했듯- 리스너들이 각자의 의미를 부여해 “무한한 프렉탈로 피어나게 하도록”.[Apple Music]
“레코드는 황홀한 만트라로 끝난다, 우리는 모두 비명을 지르며 태어난다는. 우리는 모두 이 안에 함께 있다는.” “(……) 나는 현대적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편을 가르는 분쟁faction과 ‘에코 체임버’에 위치하도록 디자인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구덩이에 다 함께 있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지. 그게 휴먼 컨디션이다, 그 아름다움과 brutality(잔인함/야만성/폭력성)가.”
“(앨범의) 뒷이야기는 우주적이다. 그 뒷이야기는, 불행하게도 모든 개인이 살면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가끔은 음악이 다 말해준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뒷이야기가 불필요하다.”
- Annie Clark, interviewed by. Ali Shutler [Dork]
https://youtu.be/BWkxzcWt51w?si=8xeizVV5iYJaeZrJ
이쯤에서 이 레코드를 가능하다면 한번은, 스트리밍 앱이 아닌 유튜브 비디오로 재생해 보라고 제안한다. 오디오 게시물에는 앨범 커버 대신, 각기 다른 화보 이미지가 떠 있다. 검은 배경, 인형처럼 정지해 있는 세인트 빈센트, 그 곁에는 자주 오렌지색 메리골드가 있다. 지옥불의 색과 닮은 생기의 예고. 메리골드는 내내 그 자리에 있었다.
“Empty cup and a can full of marigolds”(‘Hell Is Near’)
비명은 괴로움에 찬 것일 수도, 기쁨에 겨운 것일 수도 있다. 그 정서와 경험은 때로 공존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낳으며’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해도, 그건 살기 위함이다. 거기 ‘살아있음’이 있다. 익숙한 철학인가? 예술가의 업이 그것 아니던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을 독자적인 언어로 빚어내 세상에 영감을 선사하기. <All Born Screaming>의 언어는 ‘이도저도 될 수 있는’ 지루한 관념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아티스트 자신의 예술과 삶을 반영하는 동시에, 청자의 삶에 밀착해 ‘당신의 이야기’가 되려 한다. 듣는 각자에게 떠오르는 ‘뒷이야기’가 있다면 아마 그게 ‘맞으’리라. 세인트 빈센트의 음악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매번 달리 ‘세인트 빈센트적’(sound like herself**)이었다. 그의 작업 중 메시지적으로 가장 ‘단순한’, ‘받아들이기 쉬운’ 앨범인 <All Born Screaming>은, 또다시 새로운 그다움을 노래하며 첨예한 아름다움으로 타오른다.
** : 애니 클락은 말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를 인용하면, 아티스트의 최종 목표는 그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sound like themselves의 의역)이다. (아마 내가 마일스의 표현을 망친 거 같은데…)”[Apple Music]
* 주 참고 인터뷰
https://readdork.com/features/st-vincent-play-cover-april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