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배웁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Mar 12. 2019

다채롭게 담백한, 마이클 B. 조던

-배우: 마이클 B. 조던(Michael B. Jordan)


-영화:
<크로니클(Chronicle)>(2012, 감독: 조쉬 트랭크)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Fruitvale Station)>(2013, 감독: 라이언 쿠글러)
<블랙 팬서(Black Panther)>(2018, 감독: 라이언 쿠글러)


* 위 세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issuu.com


“포토샵 한 것처럼”-<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2012)에서 제이콥(라이언 고슬링)의 몸을 본 해나(엠마 스톤)의 대사다.- ‘완벽한’ 몸과 깔끔하게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 이름을 검색하면 상의를 탈의하고 근육을 드러낸 사진이 반 이상이다. 눈썹을 찌푸리고 무표정으로 있으면 진중한 매력이 흐르고, 씩 웃으면 장난꾸러기 같다. 요새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많은 배우 중 하나, 마이클 B. 조던에 대한 얘기다. 물론 (내 취향은 아니나) ‘핫’하고, 멋있지만, 그는 ‘배우’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면 외모보다는 연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그를 처음 본 것은 <크로니클>(2012)에서였다.


<크로니클>(2012)


이미 이전의 글들에서 언급했듯, 주인공 앤드류(데인 드한)의 능력을 움직이는 것은 감정이다. 반면 마이클 B. 조던의 스티브는 이성적인 편이다. 강에 빠진 차의 운전자를 구하러 가장 먼저 뛰어드는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성이 곧바로 이타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가 작품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어쩐지 경험이 많을 것 같다.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우면서도 과시하지는 않는다. ‘사람들 얼굴을 잘 기억해서 정치인이 꿈’이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하지만, 그가 사람을 볼 때 신경 쓰는 것은 단지 얼굴만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무심한 듯 따뜻한 스티브의 배려는 앤드류의 위태로움을 잡아준다. 가족에 대해 묻고, 상태를 걱정하고, 학교에서 재평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아빠를 내동댕이친 앤드류가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혼자 괴로워하고 있을 때 폭풍을 뚫고 그를 찾은 것도, 오랜 친구이자 사촌인 맷이 아니라 스티브였다.


<크로니클>(2012)


결국 자기도 모르게 폭발해버린 앤드류의 힘 때문에 스티브는 죽게 되고, 작품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허나 영화가 끝나고도 오래도록 안타까웠다. 앤드류가 중심을 잡는 것을 도우려 했던 스티브의 따뜻함이, 더 깊어질 수도 있었을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이른 나이에 져버린 삶들이. 어쩌다보니 캐릭터 자체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어져버렸지만, 데인 드한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앤드류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지녔다면, 마이클 B. 조던 또한 스티브처럼 곧은, 따뜻한, 여유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포인트다.


<크로니클>(2012)



<크로니클>의 스티브는 이야기 구조 상 역할이 한정되어 있어 연기의 범위가 넓지 않았으나, 다음 설명할 두 작품에서는 마이클 B. 조던의 다양한 얼굴과, 과하지 않고 담백한, 그러나 분명하게 감정이 드러나는 연기를 볼 수 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포스터.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는 스물 둘의 오스카 그랜트가 아무 이유 없이 경찰에게 총을 맞은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하루 동안 오스카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보여준다. 원제는 ‘Fruitvale Station’으로 완전히 다르다. 수입하면서 제목을 잘 바꿨다고 생각하는 드문 케이스다. 겹치는 단어조차 전혀 없지만, 건조하고 일상적인 뉘앙스는 비슷하다.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단어들이 오히려 의미를 깊고 정확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사건이다. 그 무게를 분명히 하려는 듯, 작품의 처음과 끝에는 당시의 실제 영상과 해설이 삽입되어 있다. 허나 오스카의 캐릭터와 상태를 보여주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도 한다. 사건의 부당함과 끔찍함을 드러내는 것은 후반부의 재현으로 충분하다고 감독은 판단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이었건 그렇게 죽어야 했을 까닭은 없었다는 것을, 관객은 이미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 작품이 오스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설득하는 것은 감정이다. 드라마적인 요소를 통해 감정적 커넥션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그렇게 사실과 각본, 연출이 섞여 만들어진 ‘영화 속 캐릭터 오스카 그랜트’는, 삶을 살아내려 애쓰면서도 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며, (아마도 보호본능으로) 다혈질이지만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인간이다. 영화는 그를 완벽하거나 티 없이 결백해 보이도록 미화하지 않는다. 그대로 드러내서 더 정이 가게 만든다. 그 인물 구성이 이야기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은, 연기하는 배우에게 있다. 마이클 B. 조던은 그것을 적절하게, 연기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지나치지 않게 감성적인 영화의 톤과 잘 어울리는 연기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주제의 깊이를 더하며, 더 나아가 왜 오스카가 ‘결백하지 않게 되었는지’부터 고민하게 만든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간 일터에서도, 그는 웃음과 친절을 잃지 않는다. 순수한 의도로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상황 설정은 사실과 각본이 섞인 것이지만, 표현의 몫은 배우에게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여유로운 표정과 사람 좋은 미소는 그것이 그의 일상임을 알게 해 준다. 메니저에게 화내며 애원을 하다 거절당하고 난 직후에도, 동료와 손님은 웃는 낯으로 대한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애인 피나의 말처럼 ‘인생이 장난인 듯’ 보일 정도로 장난스런 웃음을 달고 사는 오스카지만, 혼자 있을 때는 다른 분위기가 풍긴다. 작품에는 유독 말없이 혼자 있는 그의 얼굴을 잡는 씬이 많다. 차를 타고 두리번거리는, 쭈그려 앉아 강물을 바라보는, 주방에 기대 있는 얼굴들. 이마에는 고민의 흔적인 주름이 져 있고, 눈은 생각하느라 크게 떠진 채로 멍하거나 아련하게 쳐져 있다. 입은 심각하게 다물려진 채다. 마이클 B. 조던은 절대 표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은 대개 드라마틱한 감정을 얼굴에 잔뜩 써놓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고민과 좌절을 떠안은 채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보통 오스카가 택하는 방법은 ‘괜찮은 척’이다. 직장에서 잘리고도 피나에게 말하지 않은 채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보려고 하고, 면회 온 엄마가 얼굴의 멍에 대해 묻자 답 없이 말을 돌린다. 안 괜찮아도 괜찮은 척 하는 것이 오스카의 타고난 성격일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삶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이클 B. 조던은 덤덤한 표정 속에 생활의 깊은 피로를 숨기고 있다가, 피나에게 ‘피곤해’, 라고 말하는 장면과 같이 짧은 순간에 언뜻 드러낸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오스카가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는 개가 차에 치였을 때다. 주유소에서 차에 가스를 넣다가 발견해 놀아주던 개가, 잠시 한눈 판 사이에 뺑소니를 당하자, 그는 한참 소리 지르며 차를 쫓아가다, 터덜터덜 돌아와 도로에 널브러진 개를 안아든다. 힘들어도 슬퍼도 울지 않던 오스카는 눈물을 글썽인다. 흰 티에 피가 묻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방금 만난 개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딸과 개구지게 놀아주는, 달라지기 위해 대마초를 강에 버리는, 모르는 사람의 생선 요리를 돕기 위해 전화를 거는, 오스카의 삶이 흐르는 동안 관객의 마음은 요동친다. 그가 밝게 웃을수록 괴롭다. 그 끝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로 주목받은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이후 마블 프랜차이즈 영화 <블랙 팬서>(2018)를 맡게 되고, <크리드>(2015)에 이어 마이클 B. 조던을 다시 한 번 주연에 캐스팅한다. 이번에는 사뭇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적인 악당 에릭 킬몽거로 말이다. 캐스팅을 고민하던 감독에게, 함께 작업했을 당시 본 마이클 B. 조던의 눈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교도소의 면회실이나 지하철에서 다툼이 일어날 때 보여주었던 똑바로 뜬, 상대의 기를 누르는 눈이.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


<블랙 팬서>(2018)


짧은 드레드락과 다듬어진 수염, 패셔너블한 안경, 오버핏 청자켓의 카라에 붙어있는 털까지. 그 모든 것이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온몸에 여유를 두르고 있으며, 걷거나 말할 때는 리듬을 타듯 고개를 약간씩 건들거리며 꺾는다. 상대가 동요할 만한 내용을 이야기할 때는 말에 살짝 힘을 주지만, 여전히 말투는 태연하다. 에릭 킬몽거는 자연스럽게 폼 나는 행동 속에 상처와 분노를 숨긴다.

첫 등장에서는 숨기고 있던, 목표를 서서히 드러내는 킬몽거는 무섭게 멋있다. 그냥 도둑질하고 돈 벌며 사는 건달처럼 보였던 그의 눈빛이 확 불타오른다. ‘It gonna be okay’라고 말하며 인질이 된 동료에게 총을 쏴버리는 순간, 표정과 말투의 담담함이 잔인해 소름이 돋는다. 허나 캐릭터로서의 매력 또한 돋는다. 그는 몸, 목소리, 얼굴을 허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 멋 나게 사용한다.


<블랙 팬서>(2018)


와칸다식 영어 발음 사이에서 혼자 미국식 영어로 리듬 타듯 말을 뱉는 그에게선 단순한 이방인의 것 이상의, 다른 분위기가 흐른다. 트찰라의 말에 반박하며 턱을 들고 코를 찡그리는 표정은 비아냥거리는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러다 갑자기 와칸다 말로 소리치며 정체를 드러낼 때,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후 싸움 장면에서도 이 시원시원함은 이어진다. 머리나 기술보다 몸과 감정이 앞서는 트찰라를, 킬몽거는 간단히 제압한다. 상처 난 얼굴에 어린 분노가 폭발할 겨를도 없다. 마침내 폭포에 적을 던진 그의 표정에서는 기쁨보다는 그동안의 아픔이 읽힌다. 왕의 상징인 목걸이를 걸자 눈물이 어린다. 담담한 표정 사이 속내의 여린 공간이 잠깐 드러나는 순간, 관객의 마음은 잠깐 무방비가 된다.


<블랙 팬서>(2018) 트레일러에서 캡처한 탓에 표정이 다채롭지 못해 아쉽다....


모래 속에서 아버지의 환영을 본 킬몽거는 응어리진 감정을 숨기지도, 폭발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대충 훔친다. 그 아무렇지 않은 동작이 더 짠하다. 결국 또 남은 것은 닳고 닳은 분노. 와칸다의 운명을 좌우할 자가 지닌 힘의 원천이 분노라니, 위험하다. 허나 (나만 그랬는지는 몰라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킬몽거를 응원하게 된다. (트찰라 미안. 슈리 미안. 오코예 죄송합니다. 킬몽거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블랙 팬서>(2018)



내가 <블랙 팬서>를 다시 볼 까닭이 있다면, 켄드릭 라마와 에릭 킬몽거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여러 모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지만, 취향이 아니었고, 주인공 ‘캐릭터’가 영 매력이 없었다(채드윅 보스먼 말고 트찰라). 혈통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정의로운 왕자님은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다. 토르 시리즈에서 토르가 등장할 때마다 로키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듯 말이다. 많이 다르긴 해도, ‘트찰라-킬몽거’의 친족 간 왕위 대결 구도는 ‘토르-로키’를 떠오르게 한다. 허나 로키가 마블 시리즈 여러 편에서 입체적으로 활용된 것과 달리, 킬몽거는 그냥 깔끔하게 죽고 만다. 아쉬우나, 납득은 간다. 캐릭터 성격상 패배하면 죽는 게 설득력 있는 전개다. 로키는 겁이 많지만 꾀도 많고, 연약한 만큼 복잡하고 의뭉스럽다. 그래서 잘 살아남고, 어쩌면 그게 목적이기도 하다. 반면 킬몽거는 비틀렸으나 곧고, 꼬였지만 분명하다. 방법이 어쨌든, 확실한 목표와 나름의 대의와 논리를 지녔다. 감정과 표정이 풍부한 로키와 달리 킬몽거에게 남은 것은 단단한 분노가 대부분이었다.


<블랙 팬서>(2018)

 
칼에 찔린 순간조차 그의 입은 여유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기발했어.’라며 상대를 칭찬하는 가벼운 말과 달리, 표정은 물리적인 고통과 패배의 괴로움, 허무함, 억울함 등,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들로 꽉 차 무겁다. 동시에 어쩌면 단순하기도 하다. 킬몽거의 시간은 스스로 말했듯, 아버지가 죽던 날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덩치 큰 몸은 어른의 것이었지만 얼굴에 어린 표정은 아이의 것이었다.  마이클 B. 조던이 정확한 타이밍에 캐릭터에게 담백하거나 다채로운 옷을 입힐 줄 아는 배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장면이다.



<블랙 팬서>(2018) 에릭 킬몽거 캐릭터 포스터.


그래서 그의 차기작이 궁금해진다. 선택은 그의 몫이지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무엇을 연기하든 그의 매력은 흘러넘칠 테니, 나는 <블랙 팬서> 아니 <에릭 킬몽거>나 돌려봐야겠다.



이미지 출처: malefashiontrends.com


매거진의 이전글 ‘퇴폐미’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