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Wallners의 “다른 세계”

Wallners, <End Of Circles>(2025)

by 않인


Wallners가 첫 정규 앨범을 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어파이어>에 삽입돼 유명해진 ‘In My Mind’를 쓰고 부른, 바로 그 그룹이다. 사운드트랙이 멋진 영화야 하고 많지만, 이처럼 이미 잘 알려진 것도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작곡된 것도 아닌 노래가 영화의 분위기를 (거의)주도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후 수 년 동안 Wallners siblings는, 레코드 작업을 서두르거나 SNS를 통한 홍보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다만 몇 달, 때로는 한두 해 간격으로 EP나 싱글을 공개하며 고유한 존재감을 새겼다. 이런 그룹이 ‘정식 데뷔’를 해야겠다는 필요를 느껴 앨범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거칠게 적으면 포크-드림팝 앨범인 <End Of Circles>는, 컨셉 앨범으로 분류할 수는 있으나 컨셉 앨범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리라 짐작한다. 아마 음악 조각들이 모여 이루어진 세계가 그러한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End Of Circles>에는 달과 숲과 바다와 꿈, 떠난 ‘너’와 남겨진 ‘나’가 있다. ‘나’는 오늘은 오지 않을 ‘너’를 그리워하며 홀로 ‘그림자놀이’를 하고(‘Shadowplay’), 까닭모르게 내 세계를 떠난 ‘너’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하며, 언젠가는 모든 게 ‘쉬워질 거’라고 노래한다.(‘Easy’) 그리고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음’을, ‘우리가 함께 어울렸던 공간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고, “이제 전부 끝났음”을 인정한다.(‘Games’) 화자는 간절하게 바라기보다는 추억하고 체념하거나 막연한 재회를 기약한다. 성급히 골라 옮긴 이 부분들은 서사보다는 정서, 인상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인터뷰를 참고해 적어보면, 발너스가 창조하거나 우연히 발견한 이 “other world”는 잊힌 지 오래인 느린 환상과 아날로그의 세계를 닮았다. 대개의 곡에서 일종의 상실감이 감지되는 이유도 거기 닿아 있을 수 있겠다. ‘세계’라 함은 송라이팅 방식, 사운드 요소, 가사에 쓰인 언어 등이 모여 결과적으로 형성된 ‘분위기’다. 설계도가 있는 미니어처 건축물보단 선이 모호하고 약간 뭉개진 회화에 가깝다. 노스텔직한 동시에 아포칼립틱한 그림이다: 이는 <End Of Circles>에 한해서는 모순되는 표현이 아니다.


아홉 트랙은 짜임의 규칙이나 테마의 구체화에 얽매이지 않은 채 흐른다. 독보적인 음색으로 귀를 사로잡는 보컬은 유일한 개성이 되는 대신 유연하게 표정을 바꾼다. 압도하는 경우도 있으나 둘러싸이거나 물러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조화롭다. 인상에 남는 것은 싱잉이 아닌 그것을 포함한 그룹사운드, 트랙색이다. 그래서인지 앨범을 처음 주욱 재생했을 때 귀에 단번에 꽂힌 것은, 그 비중이 터지고 반전되는 그룹사운드에 기울어져 있는 두 트랙이었다. ‘End Of Circles’, ‘After All Everything’으로, 각각 ‘Intro’ 뒤와 ‘Outro’ 앞에 배치됐다. 신중하게 리스너의 뇌리로 틈입해 점차 영역을 넓혀가는 ‘End Of Circles’의 피아노 리프는, 한 걸음 뒤에서 밀도있게 울부짖는 멜로디 기타와 만나 짙은 여운을 남긴다. 보컬은 여백을 꽤나 두고도 충분한 울림을 준다. ‘End Of Circles’가 쌓아온 구성을 유지하며 클라이맥스를 증폭시키는 방식이라면, ‘After All Everything’은 트위스트를 노린다. 몽롱한 잔해를 차근차근 축적하다 러닝타임 절반이 지난 후 숨을 고르더니, 이내 목적지를 슈게이징으로 ‘좁히며’ 사운드를 ‘확장하고’ ‘끌어올린다’. 가능하다면 적막한 공간에서 눈을 감고 들어보기를.


앞뒤로 세 번째는 포크를 기반으로 두는, 저마다의 고유성이 상당한 트랙들이다. 어쿠스틱 기타에 무거운 베이스, 연약한 건반이 들리는 ‘Shadowplay’, 이번엔 에코를 섬세하게 입힌 음울한 보컬이 곡의 얼굴이다. 달빛이 은은한 호숫가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Games’는 대단원 직전 색다른 정서를 환기한다. 신스와 어쿠스틱 기타의 경쾌한 합주에 보컬이 얹히는가 싶더니, 후렴에서 별안간 겹겹의 화음과 베이스가 끼어들며 긴박하고 노스탤직하게 고조된다. 헌데 1,2절 모두 러닝타임 절반이 지나기 전에 끝나버린다. 신시사이저 솔로에 흐느끼는 보컬을 먹먹한 기타가 따르며 나머지 2분 남짓을 채우고, 입장시 그랬듯 빠른 속도로 깔끔하게 퇴장한다.


한 뼘 더 중앙으로 향하면, 비교적 ‘편안하다’고 느껴질 만한 트랙들이 있다. 피아노 발라드인 줄로만 알았던 ‘Old Fashioned’는 느릿한 템포에 맞추어 서서히 웅장해지더니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마무리의 애상 어린 기타 연주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과연 우아하고 old fashioned(in a great way)한 트랙. 심플한 기타와 건반에 읊조리는 보컬이 전부인 ‘Dreaming Of The Sea’는 베드룸-포크라고 하면 될 듯하다. 전개에 서프라이즈도 없어서 긴장을 완전히 풀고 누워 감상해도 좋겠다. 앨범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Easy’는 캐치하다. 리드미컬한 건반과 기타를 중심으로 차분하되 지루하지 않게 나아간다. 딱히 실험적인 부분은 들리지 않… 아, 이게 혹시 직접 녹음했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인가?([Kronen Zeitung] 참고) 나직한 보컬은 평소보다도 아련하다. 문장 끝을 툭 내려놓거나 미세하게 떨고, 살짝 잠기기도 한다. 후반부, 후렴구 주위를 에워싼 세이렌같은 코러스가 화룡점정.


가장자리에서 출발해 가운데로 향하며 트랙을 대강 묘사하고 보니, 앨범의 모양이 그려지는 것도 같다. 아마 1번부터 9번까지 순서대로 적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허나 이 피스들은 뒤죽박죽 듣고 수용하더라도, 자유롭게 유동하고 서로 엮이며 제자리를 찾아간다. ‘Intro’의 부드럽게 반복되는 멜로디를 타고, 세계는 청자를 흡입한다. 그러고 나면 안팎의 위치가 뒤집히기 시작한다. 세계가 청자의 내면으로 잠입하는 것이다. ‘Outro’, 공기 중에 메아리로 흩어지는 허밍처럼, 어느새 <End Of Circles>가 피부에 스며들었음을 깨닫는다. 그 흔적은 잊었던 세계를 재방문할 매개나 낯선 꿈에 휘감길 실마리가 되어준다.


https://youtu.be/81toZio7qqM?si=ryQJJZ5r81vlISsq

'End Of Circles'


“곡을 만드는 것은 또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또한 의미한다. 현실이 꼭 나쁜 것은 아니나, 스스로를 다른 어딘가에 빠지도록 하여 이 다른 세계,로 흡입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주 멋진 일이다.”

“세상의 속도와 최신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다는 건 우리에게 있어 인센티브다. 음악은 피난처가 되어 속도를 늦출 수 있게 한다. 그곳이 우리가 보다 집으로 느끼는 곳이다.”

- Wallners, [Kronen Zeitung]



* 참고 인터뷰

https://www.krone.at/366948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디보스의 극적인 (퀴어) 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