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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13. 2019

‘대배우 리를티미(Little Timmy)’ (2)

-배우: 티모시 살라메(Timothee Chalamet)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영화: <레이디버드(Ladybird)>(2017, 감독: 그레타 거윅)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버드>(2017)


<레이디버드>(2017)의 카일은 아예 ‘다른 종류’다. 이야기 속에서 입체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주인공 크리스틴의 시선으로 그려지며 그녀에게 특정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는, 대상화되는 인물이다. 좋게 보면 어두운 매력이 있는 똑똑한 부잣집 도련님이지만, 이 글에서는 카일을 탈탈 털어 까댈 것이니, 시니컬한 뉘앙스로 나쁘게 표현해보겠다. 잘생기고 재수없으며, 겉멋만 들었다. 물론 크리스틴은 카일을 좋아하지만, 깊은 공감에 의한 것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크러쉬’, 순식간에 빠져들어 곧 사라질 감정에 가깝다. 카일 곁에 있는 크리스틴은 위축되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카일은 구제불능의 나르시스트다. 오직 관심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다. 사랑을 속삭이지만 표면적이고, 상대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딱히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무리에서도 항상 동떨어져 있(어 튀어 보이고 싶어한)다. 자동차에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괜히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 모든 말과 행동에 ‘쿨하게 보이려는 의도’가 배어 있어, 오히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카일이 처음 제대로 카메라와 눈을 맞추는 것은, 크리스틴이 그에게 본격적으로 눈길을 주기 시작하는 카페에서지만, 사실 초반에 예배당에서 잠깐 얼굴을 비춘 적이 있다. 홀로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눈과 몸에 힘을 뺀 채 세상이 귀찮은 듯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지나가듯 잡힌다. 티모시 살라메가 영화를 본 가장 큰 이유였던 나는, 오 저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하고 딱 알아보긴 했지만, 배우를 모르는 관객이더라도 ‘쟤 뭐지’ 하고 한구석에 의문을 품을 만한 포스였다.


<레이디버드>(2017)


다시 카페로 돌아가보자. 카일은 야외 테이블에서 담배를 피며 하워드 진의 책을 읽고 있다. 실제로 읽고 있겠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다면 읽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카일은 멋지게 보이려고 내면까지 만들어내는 사람 같다. 먼저 말을 건 것은 크리스틴이지만, 긴장되어 가쁜 숨을 겨우 누르는 그녀와 달리 카일에겐 전혀 당황한 구석이 없다. 눈은 게슴츠레하고 말투는 나른하다. 카일은 엘리오나 다니엘과 다르게, 상대에게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능숙하게 다루며 빠져들게 하는 캐릭터다. 다시 말하면, ‘작업을 거는’.


“I wish you had been.”이 작업 멘트인 것을 알면서도 크리스틴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까닭을 관객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풀린 눈으로 씨익 웃어주고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 카일에게 누가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관심을 거둔 듯 책을 향했던 시선을, 크리스틴이 뒤돌자 그녀에게 보내며 손톱을 깨무는 옆모습이 거리를 두고 화면에 들어온다. 어쩌면 단순한 흥미를 표시하는 제스처지만, 괜히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하게 만드는, 관객의 마음도 침대 머리에 카일의 이름을 적는 크리스틴의 것처럼 들뜨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레이디버드>(2017)



카일의 모든 대사는 무심하다. 평소에는 꿈꾸는 듯 나른하다가, 아빠가 암에 걸렸다고 말할 때 약간 우울해지는 정도다. 하지만 ‘방금 네가 한 일은 매우 아나키스트 같은 것’이라던지, ‘정부가 휴대폰에 추적 장치를 단다’는 등의 내용을 뱉는 얼굴은 매우 심각하고, 목소리 톤은 타이트해져 있다. “위치추적기를 뇌에 집어넣기까지는 시간문제야.”, 라고 카일이 말하자 크리스틴은 웃는다. 그런 그녀를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다 약간 혼란스럽고 상처받은 듯 시선을 돌린다. 크리스틴은 더 이상 비웃지 못한다. 관객도 티모시 살라메의 그 얼굴 때문에 어쩐지 대놓고 웃을 수가 없어진다. 와 얘 정말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관심은 책을 읽고 겉멋 든 힙스터 특유의 것이라 우습다. 카일을 그리는 작품의 의도도 아마 그럴 것이다. 진짜 코미디를 잘 하는 배우는, 과장하지 않는다. 그 순간, 아니 <레이디버드> 러닝타임 내내 티모시 살라메가 그렇다. 그의 연기가 드러내는 카일은, 진지해서 우습고, 깊다고 착각해서 얄팍하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에서 카일의 속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음악도 말도 연애도 섹스도(…), 대충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티모시 살라메는 맡은 역할을 잘 알고 있다. 돈 버는 것을 비롯해 이것 저것에 집착하는 다니엘을 연기할 때와 달리, 모든 표현을 나른하고 힘을 뺀 톤으로 한다.


<레이디버드>(2017)



방금 카일이 대충 하는 것 중 섹스도 있다는 언급을 했다. 하이틴 영화에서 대개 어설프지만 로맨틱하게 그려지는 ‘(첫) 섹스’ 장면은, <레이디버드>에서 코미디가 돼버린다. 기본적으로 연출이 그랬고, 크리스틴의 높은 기대와 긴장 탓도 있었지만, 역시 카일 때문이다. 자신만 생각하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태도는 섹스할 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거의 크리스틴에게 몸을 휘둘리며 방으로 끌려들어가, 능숙하게 콘돔 포장지를 찢고, 당연한 듯 자기가 누워버린다.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한 크리스틴이다. 두 세 번 정도의 움직임 후, 카일은 길고 나른한 숨을 뱉는다. 끝난 거냐고 물은 후 먼저 괜찮다고 말해 주는 크리스틴을,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대한다. 오 이 멍청한 남자애를 대체 어쩌면 좋을까. 너무 자기 중심적인 게 당연해서 뭐라고 할 수도 없다. 티모시 살라메의 얄밉도록 태연한 얼굴은, 그래 뭐 네가 좋았다면 됐다, 고 포기하게 만들어버린다.


이후 카일은 크리스틴에게 ‘난 네가 처음이 아니었다’며, 처음 섹스한 상대의 이름과 이제껏 같이 잔 사람의 수까지 말해버린다. 화내는 크리스틴에게 왜 ‘moody시무룩’ 하냐고 묻는다. 애초에 자기가 대충 듣고 대답해놓고는, 모든 것을 그녀의 기분과 착각의 탓으로 돌린다. 또 ‘대의적인’ 얘기를 꺼내다 닥치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집어드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얄밉도록 태연한’ 얼굴이, 이번에는 말문이 막히고 미련 없이 정이 똑 떨어지게 만든다.


<레이디버드>(2017)


크리스틴을 프롬 파티에 데려가는 와중에도 그녀의 의사는 존중하지 않고 멋대로 일정을 바꾸며,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무시한다. 카일은 크리스틴과 ‘함께’ 있지만, 사실 뒷좌석의 친구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처럼 비웃는 눈을 하고 있다. 그렇게 크리스틴을 줄리의 집 앞에 내려주며 암묵적으로 헤어지는 장면을 끝으로, 무늬만 화려한 벽 같던 카일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카일은 거기까지지만, 티모시 살라메는 남는다. 그 비호감 연기 덕에 오히려 배우의 호감도가 상승한다. 카일의 것이지만 사실 티모시 살라메의 것인, 얼굴과 표정, 목소리와 말투의 디테일이 매력으로 남는다. 이를 테면 크리스틴의 말에 종종 보이는 반응-실눈을 뜨고 팔자 눈썹을 만들며, 입가에 약간 웃음기를 묻힌 채 입을 비틀면서, ‘t’ 받침을 완전히 발음하지 않고 늘여 뱉는 “What?”. 굉장히 짧고 간단한 대사지만 티모시 살라메 특유의 매력이 드러난다.    


<레이디버드>(2017) 촬영현장.



에즈라 밀러를 좋아하기 전 월플라워의 패트릭을 좋아했고, 루니 마라를 좋아하기 전 밀레니엄의 리즈베트를 좋아했듯, 처음에는 그냥 엘리오가 좋았으나, 티모시 살라메는 엘리오가 지워질 정도로 카일을 잘 해냈다. 인터뷰에서 연기나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그의 다른 얼굴들이 궁금해졌다.


https://youtu.be/q9Gd-uMSnkk

연기에 대해 말하는 티모시 살라메.


티모시 살라메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의껏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꾸며내지 않았음이 느껴져 더 놀랍다. 연기에 대해 말할 때는 후광마저 생긴다. 눈빛은 바뀌어, 진지하게 빛난다. 허나 장난치거나 쑥스러워할 때는 영락없는 ‘리를티미’다. 공식 석상에서 의자를 건들거리다 뒤로 꽈당 자빠지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역시, 현실의 티모시 살라메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는 엘리오인 것 같다. 뭐랄까, 때묻지 않은 매력이 있으면서도, 진중할 때는 ‘성인(adult / saint)’ 같다.


https://youtu.be/lY156CB8Djw

넘어지는 리를티미....




영화 밖의 티모시 살라메에겐 (아직?) ‘스타의 이미지 관리’ 뉘앙스가 없다. 가끔은 어색하고 속이 들여다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이 더 가깝게 느껴 각별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앞에서도 썼지만, 팬들이 부르는 그의 애칭은 ‘리를티미little Timmy’ 혹은 ‘릴팀lil’ Tim’이다.) 아마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 솔직함이 영화 속 배우 티모시 살라메의 바탕인 동시에, 영화 밖 유명인 티모시 살라메의 장점이다. 여기 그것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 있다.


https://youtu.be/Yk2h9GS6i04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한창 아미 해머와 인터뷰를 돌고 있을 때, 그는 우디 앨런의 신작 출연 사실을 알린다. 짧은 영어로 대강 해석해 보니, 일단 리포터가 “뉴욕에서 우디 앨런 영화를 찍는다며? 그거 어메이징한데.” 라고 먼저 말한다. 그리고 “그거 너한테 버킷리스트 같은 거였니?”라고 묻자, 티모시 살라메가 답한다. “맞아 정확해. 팬으로서 뉴욕스토리, 맨하탄, 애니 홀 같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너무 좋아…(……)..이 모든 경험이 소름끼치도록 엄청나(tremendous).” 여기서는 이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옹호한 것이 아니라, 우디 앨런의 팬이고 그와의 만남이 어메이징 했다고 이야기한 것 뿐이기는 했다. 이후 우디 앨런의 성폭행 혐의가 이슈가 되고, <어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출연 결정에 대해 질문을 받았으나, 정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것이 논란이 됐다.
 

허나 얼마 후, 그는 본인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글을 올린다.


출처: 티모시 살라메 개인 인스타그램 @tchalamet

 
첫 단락의 마지막 문장과 뒤의 단락만 최대한 직역으로 옮겨 보면,
 
““(...........) 좋은 역할이란 단지 일을 맡을 자격을 얻는 것 뿐만이(?) 아니라는 게- 지난 몇 달 동안, 불의와 불평등, 무엇보다 침묵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움직임을 목격하면서, 내게 훨씬 분명해졌다.


작년 여름 우디 앨런과 작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최근에 질문들을 받았다. 당시에는 계약 의무 때문에 확실히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이다; 나는 그 영화 출연으로 이익을 얻고 싶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출연료 전액을 세 단체에 나누어 기부하기로 했다- TIME’S UP(타임즈 업: 미국 영화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성범죄와 성차별에 대항하는 운동이자 단체.), The LGBT Center in New York(뉴욕 LGBT 센터), and RAINN(Rape, Abuse & Incest National Network: 미국 최대 규모의 반 성폭력 단체). 모든 사람이 당연한 존중과 품위를 받을 수 있도록 싸우고 있는, 용감한 예술가들이 어깨를 맞대는 데에 보탬이 되고 싶다.”
 
물론 유명인으로서의 ‘대처’ 인 면도 있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그의 ‘대처’는 누구들과 다르게 적절하고 훌륭했고, 진심이 느껴졌다. 출연료를 보낼 단체 선정에서도 철저한 고민이 보였고. 이제 그만 봐야겠지만, 우디 앨런 영화 중에 좋아하는 것들도 꽤 있어서, 솔직히 그 속에 있는 티모시 살라메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웠다. 그치만 잘 됐고, 잘 했다. 그는 멍청한 팬(나)보다 훨씬 생각이 바른 배우다. 스스로 솔직하면서도,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 사람’이다.



https://youtu.be/pq4CidnVMGw


95년 생인 티모시 살라메는, 이미 연기로 ‘인정’의 수준을 넘어 찬사를 떠안았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미국 아카데미 후보에까지 올랐으니 말 다했다. 그가 이제까지 주로 맡은 역할은 현재의 나이에만 가능한 배역들이다. 그 ‘어린’ 인물들에 어울리는 나이에, 이미 완성된 연기를 보여준다. 아니,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라서 더 완벽하다. 앞으로는 아마 더 다양한 캐릭터를 맡게 되지 않을까. 웨스 앤더슨과도 작업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 팬들의 기대를 한껏 높이는 중이다.


뉴욕타임즈에서 찍은 고작 일분짜리 영상(위)에서, 그가 단지 귀여운 ‘리를티미’가 아닌, ‘배우 티모시 살라메’라는 깨달음이 다시 한 번 왔다. 창백하고 어두운 얼굴이 눈 앞을 떠나지 않는다. 악당 역할을 맡으면 어떨지 몹시 궁금하다. 이미 대배우인 ‘리를티미’의, 앞으로 차곡차곡 쌓일 필모그래피를 그려보는 세상 행복한 팬의 글은 여기서 마친다.



+ 5월에 <미스 스티븐스>가 개봉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폭풍 이후 한국에 티모시 살라메 작품이 하나씩 들어오고 있어 행복하다. 이제 <뷰티풀 보이>만 수입하면 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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