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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26. 2019

가장 날것의 움직임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배우: 마티아스 쇼에나에츠(Matthias Schoenaerts)
 
-영화: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2015,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러스트 앤 본(De rouille et d’os)>(2012, 감독: 자크 오디아드)
 
* 위 두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게 <대니쉬 걸>(2016)은, 감독의 스토리텔링 보다는 배우들의 연기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에디 레드메인, 알리시아 비칸데르, 벤 위쇼 등의, 여리고 섬세해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들이 채운 화면은 아름답고 눈물났다. 한창 이야기가 전개되던 와중, 한스가 화면에 등장했다.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헉 하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소위 ‘남자다운’ 얼굴이었는데, 그 속에 너무나도 섬세한, 그런데 전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뭔가가 만져졌다. 극장을 나와 울먹이는 마음을 추스른 뒤, 그 배우의 이름을 검색했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생소한 발음. 벨기에 출신 배우였다. 이후 예상치 못한 순간들에 스크린에서 만난 그는, 항상 한스처럼 거짓 없는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비거 스플래쉬>(2015)

 
그 중 하나가 <비거 스플래쉬>(2015)의 폴이었다. 거의 작품 내내 인상을 쓰고 있는 인물이다. 서 있을 때는 꼭 언제든 싸움에 응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어깨는 굽히고 목을 쭉 뺀 채 팔과 다리를 넓게 벌려 중심을 잡고, 걸을 때는 그 상태로 어기적어기적 움직인다. 앉아 있을 때는 등을 아주 뒤로 기대어 팔을 팔걸이에 걸치고, 손은 불안한 듯 얼굴 가까이에 둔다. 얼굴에는 항상 긴장이 어려 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들어 해리를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특히 마리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굳힌다.


폴이 계속해서 해리를 경계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마리안의 연인은 자신임에도, 불안할 것이다. 애초에 해리가 마리안을 ‘넘겨줬’으니, ‘빌려줬던’ 것을 언제든 ‘빼앗아’ 갈 것 같은 기분. 해리의 말처럼, 폴은 해리를 ‘tolerate’한다. 계속 화가 나지만 ‘쟤 같은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참고 참는다.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안으로 눅힌다.


<비거 스플래쉬>(2015)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눈빛은 강렬하다. 부리부리하지는 않으나 단단하게 박혀있는 느낌이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서툴러 무뚝뚝해 보이지만 여리고 순수한, 그런데 그 ‘여리고 순수한’ 성격이 불 같은 성질과 만나서 예민하게 자주 폭발하는 사람일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어색해하고 싫어한다는 것도 느껴진다. 해리가 멋대로 친구들을 부르자 읽던 책을 얼굴에 푹 덮고 사람들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 상태로 있는다. 아프고 피곤한 마리안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같으면서도, 세상과 자신 사이에 마리안 혹은 카메라를 놓아 거리를 둔다.


<비거 스플래쉬>(2015)


폴은, 마리안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듯 노래하는 해리를, 사람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서 바라본다. 조명에서 벗어나 반쯤 숨어 있는 얼굴은 빛이 들지 않아 더 어두워 보인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본, 풀숲에 숨어 있는 재규어가 생각나기도 한다. 한편에는 금방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 것 같은 ‘짐승’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같은 맥락으로 티 없이 순수한, 한 곳만 바라볼 것 같은, 그래서 역시 ‘동물적인’ 순정이랄까 그런 게 있다. 마리안에게 몸을 전부 감싸는 드레스를 골라 준 후 ‘오늘 밤 말하지 말라’며 입술을 먹을 듯 키스하는 장면에서, 폴의 불안감과 사랑, 소유욕과 살짝의 폭력성이 모두 느껴졌다. 엄청나게 정신없게 만드는- 애처로운 섹시함 또한. 페넬로피가 갖고 싶어할 정도의 이상하고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비거 스플래쉬>(2015)


바로 전에 올린 ‘루카 틸다 다코타’ 글에, 페넬로피가 폴에게 자살 시도했던 일을 묻는 장면에서 “진지하고 순수하고 착한 어른 남자 폴을, 스물 두 살 짜리 ‘애’에 불과한 페넬로피가 잡아먹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라고 썼다. 폴은 마치 페넬로피에게 시선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애써 카메라로 눈을 피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이후 수영하는 모습을 자신에게 전시하는 페넬로피를 대할 때는, 해리에 대한 경계와는 다른 귀찮은 경계심이 묻어나지만, 절벽에 올라 먼저 유서 이야기를 꺼낼 때는 그 경계가 어느 정도 풀려 있다. (아마 페넬로피와 자고) 내려온 후의 폴은, 티내지는 않지만 확 달라진 것이 보인다. 얼굴에 그늘이 없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약간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안타깝게도 폴의 그늘 없는 얼굴은 오래 가지 않는다. 원래 수심이 가득했기에, 몸싸움하다 해리를 죽인 후 죄책감과 걱정으로 타오르는 것이 많이 티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세하게 다르다. 경찰은 몰라도 마리안은 알 수 있는 정도로. 주변 사람이나 환경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불편함을 ‘참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비거 스플래쉬>(2015)


마리안과 둘만 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폴은, 한참을 망설이다 ‘살리려고 했다’는 말을 뱉고는 마리안에게 안겨 아이처럼 운다. 아주 입을 씻고 속이기에 폴은 너무나 여렸고, 그래서 자수할 용기도 없었다. 뭐 폴을 변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 순간 만큼은, 거짓말이나 연기를 못하는 그가 홀로 얼마나 속을 썩였을지 보여 안쓰러웠다. 배우가 할 일은 잘잘못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고, <비거 스플래쉬>에서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비거 스플래쉬>(2015)


<러스트 앤 본>(2012)


그의 정제되지 않은 솔직함은 사실 그보다 몇 년 전, 프랑스 영화 <러스트 앤 본>(2012)에서 흘러 넘쳤던 바 있다. 연출이 강렬한 작품이다. 특히 뜨거운 햇빛 그대로를 사용한 화면들이 인상적인데,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분위기에 탁월하게 어울렸다. 상대 역인 마리옹 꼬띠아르는, 완전하고 완벽한 연기로 ‘다른 사람’이 되어 감탄을 자아내곤 하는 배우다. 그와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방식은, 그들이 연기한 스테파니와 알리처럼 아주 달랐다.
 


<러스트 앤 본>(2012)


이야기의 시작, 알리는 아들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움츠러든 어깨,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손, 어두운 얼굴빛과 눈 밑의 그늘이 추위 때문 만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돈이 없어 기차에 몰래 타고, 아들이 배고프다고 하자 객석을 뒤져 승객들이 남긴 음식물을 찾아 함께 먹는다. 알리의 효율적인 움직임에는 수치심의 뉘앙스가 전혀 없다. 열심히 토마토를 베어 무는 입술이, 배고파서 그런 건데 뭐 어때,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욕구 자체에 충실하기 때문에 관객도 딱히 (주제넘게)동정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된다.


그가 먹거나, 뛰거나, 자는 등 생활하는 모습은, 배경처럼 평범하다. 우아하거나 고상하지는 않지만, 말할 것도 없이 삶 그 자체 같아서 오히려 폼이 나고, 집중하게 된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거칠고도 깔끔한 얼굴, 덩치 있는 몸과 대비되는 맑은 눈은, 자연스러운 알리를 자연스럽게, 연기하지 않는 알리를 연기 같지 않게 표현한다.
 

<러스트 앤 본>(2012)



알리는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아니다. 복싱을 오래 했고,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해왔기 때문인지 몸이 먼저 나간다. 그게 알리의 매력이자 흠이다. 아들을 때리지는 않지만 폭력적으로 대하고, 체육관에서 춤추는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바라본 다음에 작업을 건다. 그러느라 아들을 데리러 가는 것도 잊는다. 첫 만남에서는 스테파니에게 복장이 어떻다느니 하는 무례한 말까지 한다. 정말 멍청한 마초의 전형이고, 실재한다면 상종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왠지 밉지가 않다. 그 얼굴이 너무나 건강하고 맑아서,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 같아서, 아직 철이 덜 든 애 같아서. 모르는 건 알려주면 될 것 같고, 변화를 요구해도 속이 건강하고 단단해서 금방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으로 느껴져서였다.
 

거짓말이나 연기는 전혀 할 수 없는, 아니 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듯한. 그 ‘아무 생각 없음’이,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를 괜한 동정이나 거부감 없이 대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기도 하다. 스테파니에게서 온 전화를 받은 알리는, 잊고 있던 친구를 대하듯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한다. 그녀가 다리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안됐다는 말은 않는다. 알리에겐 사람들에게 으레 있는, ‘예의를 빙자한 위선’이 없다. 스테파니는 그런 단단한 순수를 느꼈기에 잘 모르는 알리에게 전화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줄, 그래서 자신도 다시 그렇게 만들어 줄 사람이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깨달았기에.


<러스트 앤 본>(2012)


기어이 스테파니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 알리는, 수영을 할 거냐고 묻는다. 스테파니는 어이없다는 듯 대응하지만, 알리의 표정은 다리는 ‘문제’가 아니라는 듯 태연하다. 그는 지나치게 배려하려고 노력하지 않아 스테파니를 ‘보통’으로,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했던 방식으로 대한다. 결국 스테파니는 돌고래를 부르듯 휘파람으로 알리를 부르고, 그가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물에 들어가게 된다. 멀찍이 바라보는 카메라에 담긴 알리는, 꼭 돌고래 같다. 그는, 돌고래 조련 일을 하다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에게 온, ‘돌고래처럼’ 그녀를 안아 줄 남자 였는지도 모르겠다. (스테파니는 나중에 알리를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된다.)


<러스트 앤 본>(2012)



스테파니를 대하는 알리의 태도는 이후에도 어김없이 태연하다. 만나는 여자에 대해 묻는 스테파니의 눈은 알리를 향해 있는데, 그의 눈은 요거트를 향해 있다. 피하는 것도,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순간의 욕구와 행동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요거트를 먹고 싶으니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 뿐이다. 열심히 뚜껑을 따고 핥아먹고 분주하게 스푼을 놀린다. 그러면서도 바로바로 대답하고, 햇빛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스테파니를 종종 바라본다.
 

‘이 몸으로 섹스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스테파니에게 알리는 말한다, ‘당신이 원하면 해보면 된다’고, 간단하다고.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하던 걸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다닌다. 표정은 부드럽지만 진지하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얼굴은, 그 제안이 부담스러운 동정 혹은 장난으로 들리지 않도록, 와닿도록 만든다. 단순해서 믿음직스럽다. ‘섹스하자’ 해서 하는 섹스가 어색할 법도 한데,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스테파니와 달리, 알리는 움직임과 욕구에만 집중해 스테파니도 저절로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


<러스트 앤 본>(2012)



알리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속으로 파고들지 않고 하루하루에 집중하기에, 스테파니와 같이 마음이 무너진 사람을 챙길 여유가 있다. 삶을 살아내느라 지쳐 있지만, 사느라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 ‘원하는 것’이란, 딱히 원대한 목표나 화려한 꿈은 아니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 몸이 이끌리는 곳을 향한다.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말한다, ‘당신이 돌고래를 좋아해서 돌고래와 함께 있는 일을 했던 것처럼, 나도 싸우는 걸 좋아해서 싸우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게 끝이다. 알리의 담백한 표정과 분명한 눈에는 덧붙일 수식어가 없다. 단순해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가,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두 눈에 담겨 있었다.
 

<러스트 앤 본>(2012)


싸움터에서의 알리는 정말로 야수 같다. 건드리기도 무서운 에너지가 느껴진다.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우던 중 쉬는 시간에 갑자기 차 시트에 머리를 박는데, 끓어오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발작적으로 하는 행동 같기도 하지만, 찰나에 드러나는 눈과 입에 두려움이 섞여 있다. 맞고 있다가, 차에서 내려 눈을 맞추며 천천히 다가오는 스테파니를 보고는, 괴성을 지르며 상대를 누른다. 돌아오는 차에서도 신나서 높은 소리를 내지른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싸워본 자만이 알 수 있을 것 같은 감정들을 얼굴에 실감나게 입힌다.


<러스트 앤 본>(2012)


싸울 때 분명하게 한 곳을 향하는 알리의 눈은, 아들을 대할 때 가장 어수선하다. 사랑하긴 하는데, 대하는 방법이 서툴다. 성질을 죽이지 못해 상처를 주기도 한다. 미안하기는 한데, 사과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장난감을 준 후 자꾸 재밌니, 좋니, 하고 물으며 눈치를 본다. 서투른 아버지의 마음을, 납득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다시,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눈이다.


<러스트 앤 본>(2012)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스테파니를 대하는 알리의 모습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알리는 스테파니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다른 여자를 꼬셔 클럽을 나가고, 그에 대해 화내는 스테파니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벌컥 짜증을 내며 몸을 들썩이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스테파니가 자신의 감정과 원하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자, 곧바로 수긍하며 슬쩍 고개와 눈을 함께 끄덕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얼굴에 장난기를 묻히며 ‘자자’는 신호를 보낸다. 어이없고 어이없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웃는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순수하고 담백한 얼굴을 보면, 알리를 용서하는 스테파니를 이해하게 된다.
 

<러스트 앤 본>(2012)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으며, 그냥 좋으면 좋은 대로 몸을 굴리는 듯 보였던 알리가, 스테파니에게 ‘끊지마’, 라고 말하는 순간은 굉장했다. 휙 사라져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역시 하지 않는다. 알리를 아는 스테파니에겐 ‘미안해’라는 말보다 ‘끊지마’라는 말이 더 많은 의미였을 것 같다. 알리는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날 버리지 마’라고 말한다. 아들을 잃을 뻔 했던 순간, 펑펑 울며 힘든 걸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삶의 의지를 찾게 도왔던 스테파니였고, 그 순간 자신도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에 조명이 어두워지며, 알리가 훌쩍임 사이로 문득 뱉는 ‘사랑해’가 얼마나 벅차던지. 그 짧은 대사에서, 적을 수 없을 정도의 진심이 느껴졌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가 쌓아온 캐릭터와 그 순간의 연기가, 흔한 말을 엄청나게 만들어버렸다.  
 

<러스트 앤 본>(2012)



 
내가 본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연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각적이고 본능적으로 ‘연기’ 같지 않게 연기하곤 했다. 그의 분위기는 건강하다. 덩치 있는 몸과 각진 얼굴 때문은 아니다. 연인의 이름을 남기고 자살 시도를 했던 남자건, 불법 게임판에서 싸우는 파이터건,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으면서도 중심을 잡고 스스로를 잃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깊은 곳 어딘가에는, 웅크린 채 떨고 있는 뭔가가 있다. 아직 본 작품이 많지 않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몇십 개를 봐도 설명할 수 없을 듯한 - 영원히 다듬어지지 않을 것 같아 빛나는 날것의 덩어리가 - 그것이 그의 다른 모습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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