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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14. 2019

매기 질렌할은 매기 질렌할이다.

매기 질렌할(Maggie Gyllenhaal)



 

<스트레인저 댄 픽션(Stranger than Fiction)>(2006, 감독: 마크 포스터)
<프랭크(Frank)>(2014, 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2018, 감독: 사라 콜란겔로)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십 년 전 할리우드 영화계에 데뷔한 질렌할 남매 각자에게 주어지는 배역은 달랐다. 여러 까닭이 있었겠으나, 눈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는 ‘젠더’였다. 배우로서의 역량을 따지기 전에, 애초에 여성이 맡을 수 있는 캐릭터의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비중이 높은 역할을 맡는 경우에도 매기 질렌할은, 누군가의 ‘엄마’, ‘애인’ 따위의 수식어나,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성적 대상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같은 작품에 출연해도, 한 사람은 주인공으로, 다른 한 사람은 ‘주인공의 누나’로 캐스팅됐다. (제이크 질렌할을 사실 매기 질렌할보다 훨씬 전부터 좋아해 왔고, 연기와 작품 고르는 안목이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여성이었어도, 지금처럼 다수의 훌륭한 작품에서 주연을 맡을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허나 <도니 다코>(2001)의 감독이 단순히 현실 남매의 케미를 이끌어내기 위해 매기 질렌할을 캐스팅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기 질렌할의 엘리자베스 다코는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동생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하는 도니 다코에 묻히지 않고 독자적인 캐릭터의 매력을 뿜어낸다. 매기 질렌할의 눈과 입의 꼬리는 아래로 쳐져 있는데, 지루하거나 유하기보다는 야무진 인상을 남긴다. 촉촉하게 빛나는 눈과 오똑한 코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속에서 만난 그가 항상 개성 있고 확실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 크다.
 

<프랭크>(2014)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그의 작품을 몇 개 보지 않았기에, 중심으로 쓸 것을 둘로 추렸다. 고작 그 둘 만으로도 캐릭터의 특성과 연기를 엮어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과 <프랭크>에서 매기 질렌할은 모두 남성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로 등장한다.(수많은 여성 배우들이 수많은 영화에서 그런 식으로‘만’ 그려졌었다………) 가부장제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다른 방향의 ‘엇나가는 매력’의 클리셰를 지닌다. ‘예쁜 또라이’랄까-강한 이미지와 성격, 성적 매력으로 찌질하고 소심한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친다. 허나 매기 질렌할은, 부드러움과 강함이 공존하는 이미지와, 완성도 높지만 틀에 박히지 않은 연기로,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 부품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배우의 주체적인 개성을 보이며 매력을 남긴다.



먼저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의 안나는, 딱딱하고 멋없는 세금 징수원인 주인공에게, 삶의 다른 방향을 보게 해 주는 인물이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


발상이 신선하면서도, 진부한 면이 있는 작품이지만, 다소 찌질하고 재미없는 남성 주인공에 대비되는 다른 매력의 두 여성 캐릭터, 안나와 카렌, 그리고 그들을 연기하는 매기 질렌할과 엠마 톰슨이 몰입에 도움을 준다. 영화 줄거리에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지만, 안나 파스칼은 없어서는 안 될 캐릭터다. 베이킹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며, 이성으로 빽빽한 헤럴드의 가슴에 감성의 공간을 열어준다. 대략적인 설명으로는 정말 가부장제 속 감성적이고 가정적인 여성상의 표본으로 들리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래 봤자 다른 종류의, 확실하고 기 센, ‘그럼에도 예쁜’ 여성의 클리셰지만, 매기 질렌할의 연기는 안나를 그 정도로 끝내지 않는다.


안나는 말하자면, 헤롤드의 일거리, 더 정확히는 골칫거리다. 첫 등장부터 강렬하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화려한 문신에 어울리는 문양의 반다나를 한 채, 헤롤드를 향해 얼굴이 벌게지도록 소리를 지른다. 세금을 일부만 낸 까닭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설득하려는 의도보다는 ‘어쩌라고’스러운 뉘앙스가 담긴 말투로 말한다. 초롱초롱하게 푸른 눈은 진지하지만, 입꼬리에는 웃음기가 있다. 어깨를 약간 굽힌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들어 상대를 똑바로 본다. 힘을 뺀 머리가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 특유의 자유로움과 자신감으로,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부품처럼 움직이는 인간을 비웃는다. 과할 정도로 강한 태도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매기 질렌할이 안나처럼,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상태에서 연기하기 때문이다. 배우가 연기와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성격과 행동을 보이는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한 모습을 보여준 직후, 안나는 헤롤드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해설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식상한 전개지만, 식상하지만은 않다. 이미 관객은 매기 질렌할을 통해 안나의 진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묘사하는 것은 미끈한 다리와 가녀린 팔이지만, 아마 실제로 헤롤드가 매료된 것은 그 자유로운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된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


버스에서 헤롤드와 만났을 때의 안나는 조금 다른 이미지다. 밝은 색 티셔츠에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있다. 반다나를 하지 않아 드러난 짧은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상태다. 헤롤드가 사과하자, 금세 태도를 바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헌데 ‘태도를 바꿨다’, 는 말은 사실 조금 맞지 않는 표현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안나는 상대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낼 때, 시니컬한 종류이기는 해도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는다. 때문에 경계를 거두면, 자연스럽게 친근한 얼굴이 되어 버린다.


이후 헤롤드를 대하는 안나의 얼굴은 약간 복잡해진다. 여전히 적대감이 있지만 누그러들었고, 냉소적인 웃음기가 사라진 자리에 연민이나 정 같은 애틋함이 들어선다. 작품의 감정선은 헤롤드의 것에 집중되어 있으나, 매기 질렌할의 풍부한 표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


안나와 헤롤드 사이에 ‘무언가’가 생기는 순간은, 역시 쿠키 장면이다. 안나는 쿠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헤롤드에게, ‘굉장히 힘든 하루였잖아요’라고 말하며 쿠키를 먹으라고 강력하게 권유한다. 재미있게도 헤롤드가 힘든 하루를 보낸 것은 안나가 운영하는 빵집의 회계 감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나의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는 듣는 이를 설득시킨다. 이미 안나에게 반한 헤롤드뿐만 아니라 관객도.


스터디 그룹을 위해 쿠키를 굽기 시작했다가 하버드 법대를 중퇴했음을 털어놓는 그의 눈에는 흔들림이나 후회가 없다. ‘쿠키를 구우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나가 대학 시절 구웠던 빵의 종류를 떠올리며 하나하나 나열하는 장면은, 정말 ‘별거’다. 빵 이름은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알파벳의 낯선 조합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익숙하지 않아 시적이고 특별하게 들린다. 'ch'나 'sh'같은 발음이 많아 더 그렇다. 그 소리들이 약간 허스키해 더 감미로운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면, 매기 질렌할의 꿈꾸듯 빛나는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안나의 표정들은, 로맨스 드라마의 정석에 가까워 독특하지는 않다. 허나 장면들 자체는, 헤롤드의 어설픔과 대비되는 안나의 확실함과 티 없는 장난기 덕에 지루하지 않게 볼 만하다. 완전히 눈을 감아 주름지게 하고 앞니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즐거워하는 얼굴이 매기 질렌할에 꽂히는 포인트 중 하나다.


포인트 하나를 덧붙인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면이 빵집이기 때문에, 안나는 거의 항상 손을 사용해 일을 하고 있다. 대사를 치면서 빵 반죽을 치대고, 시선을 옮기며 쿠키를 옮긴다. 매기 질렌할은 발의 동선과 손놀림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 이상으로, 대사의 타이밍에 적절히 매치하거나, 감정에 따라 강도를 조절하기도 한다. 첫 등장에서 ‘택스맨’을 비아냥거리며 벽에 반죽을 던지거나, 헤롤드에게 쿠키를 대접하다 과거 이야기를 시작하며 쿠키를 어수선하게 쟁반에 옮기는 동작이 그 예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



다음으로 설명할 <프랭크>(2014) 역시, 매기 질렌할이 움직임과 말을 탁월하게 연결시키는 배우임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클라라는 주인공 존이 사랑하는 대상이자, 존이 동경하고 질투하는 천재 프랭크를 사랑하는, 안나처럼 남성 주연들과 로맨스로 엮이는 역할이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안나와도 사뭇 다르다. 클라라 역시 자유롭고 확실한 캐릭터지만, ‘자유로움’은 ‘종잡을 수 없음’에 가깝고, 확실하지만 예측할 수는 없다. 호불호가 확실하며, ‘불호’가 ‘호’로 바뀔 가능성이 희박하다. 안나처럼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는 않는다.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눈을 내리깔고, 우아하게 손을 올린다. 선글라스를 낀 채 팔짱을 끼고 담배를 피운다. 존이 악기 이름을 묻자 대답에 위협을 섞는 게 아니라 위협에 대답을 섞으며(“Stay away from my fucking theremin.”) 눈을 부릅뜨고, 돈이 바다에 뛰어들려 하자 멀리서 무언가를 던져 기절시킨다. 다른 멤버들이 프랭크의 지시에 따라 뜰을 달릴 때, 혼자 가만히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가 갑자기 존을 퍽 때려 넘어뜨린다. 프랭크를 앗아간 존의 다리를 잭나이프로 사정없이 찌르기도 한다. 매기 질렌할은 이 모든 행동을 태연한 얼굴로, 정확하고 단호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클라라의 '또라이' 레벨이 상급임을 표현한다.
 

<프랭크>(2014) “Stay away from my fucking theremin.”



따뜻한 기운과 풍부한 표정을 지닌 안나와 달리, 클라라의 온도는 차갑고 얼굴은 의도적으로 굳어 있다. 작품이 존의 시선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프랭크와 돈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지만, 클라라는 특히 존을 대놓고 무시하고 경계한다. 안나가 헤롤드를 경계하는 까닭은 그의 직업 때문이었고, 로맨스로 반전될 실마리가 있었지만, 클라라와 존 사이에는 애초에 기류 자체가 없다. 클라라가 존에게 관심을 보일 까닭은 단 하나도 없으며, 작품의 분위기와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전개이기도 하다. 클라라의 역할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존의 무능력과 소심함을 욕하고, 영원히 존이 ‘오르지도 못할 나무’로 남아, 그의 열등감과 오기를, 끝내는 좌절의 정도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스튜를 요리하는 존을 지켜보던 클라라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간다. 잭나이프를 야무지게 펴 감자를 찍으며 ‘이게 뭐냐’고 묻는다. 존의 요리에 관심이 있어서 묻는 게 아니다. 나무라는 듯한 투다. 다음 순간 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집에 돌아가.”라고 타이르듯 말한다. 테레민에서 떨어지라고 할 때처럼 부릅뜬 눈도, 평소의 깔보는 눈도 아니지만, 묵직하고 차갑다.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풀어헤친 앞섶은 유혹의 제스처라기보다는 어떤 위협처럼 느껴진다.


돈이 죽은 후 그가 키보드 연주자였냐는 존의 물음에 클라라는 답한다. “처음에는 돈, 그다음은 루카스, 지금은 너.” 대사 자체는 단순한 정보 전달에 불과하지만, 말에 뼈가 있다. 낮게 읊조리듯 말하며 먼 곳을 보다가 마지막 순간 존에게 시선을 주는 클라라는, 마치 재능 없는 키보드 연주자의 계보를 나열하며 존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 같다.

 

<프랭크>(2014)


존이 허락 없이 자신들의 작업을 온라인에 올린 것도 화나는데, 프랭크가 그에 관심을 보이자 폭발한 클라라는, 기분 좋게 거품 목욕을 하는 존에게 따지기 시작한다. 온 힘을 다해(어쩐지 찌질하게) 목이 가도록 소리 지르는 존과 달리, 머리끝까지 화나 있는데도 여유가 남아 있다. 연극적인 표정과 제스처, 분명하고 발성 좋은 목소리로 마치 마법사가 저주를 퍼붓듯 욕을 내뱉는다. 안나가 회계 감사를 하러 온 헤롤드에게 화내는 모습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보다 ‘악마적이다’. 매기 질렌할이 캐릭터에 맞는 감정의 옷을 다양하게 입을 줄 아는 배우임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한창 싸우다가 흥분한 존이 벌떡 일어서자, 클라라는 그의 벌거벗은 아랫도리를 보며 살짝 정신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한다. 바로 이어지는 '거품 목욕 풀 섹스신'은, 전혀 야하지 않다.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클라라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어쩔 줄 몰라하며 휘둘리는 존의 모습은, 코미디를 만든다. 그리고 격렬한 섹스 후조차, 클라라는 당당하게 존에 대한 경멸을 표시한다. ‘DISGUSTING’이라는 단어의 발음 하나하나를 곱씹듯 뱉는다. 안나가 사랑에 빠졌을 때 보여주는 풀어진 웃음을 보이기도 하지만, 표정은 비슷해도 비웃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에, 다음 순간 존을 협박해도 위화감이 없다. 클라라가 존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을 일깨우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이렇듯 클라라일 때의 매기 질렌할은 기본적으로 서늘하게 강하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프랭크를 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프랭크>(2014)


그가 가장 평온해 보일 때는 풀밭에서 담요를 두르고 테레민을 연주하고 있는 순간이다. 허나 노래하는 프랭크를 보고 있는 클라라의 표정은 편하지 않다. 묘하다. 단순히 음악에 감명받은 것 같기도 하지만, 촉촉한 눈에는 애정과 함께 복잡한 아픔이 스며 있다. 마치 프랭크의 가면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마지막 장면, 프랭크를 부르듯 노래 부르는 눈도 비슷하다. 여전히 단호한 표정이 드러내는 것은 깊은 슬픔이다. 나직한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 있다. 프랭크가 돌아와 노래하자, 울음을 막으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복잡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마이크에서 물러나 기계를 만지며 신들린 듯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클라라의, 음악과 프랭크 각각에 대한 애정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매기 질렌할의 강약 조절이 표현해낸 클라라는, 무서운 매력으로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고는, 마지막 순간에는 울도록 만들었다.


<프랭크>(2014)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제작에도 참여한 최근의 작품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를 통해 매기 질렌할은, 가장 복합적이고 섬세한, 또 가장 아름답고 비참하게 무너지는 얼굴을 보여 준다. 강한 비주얼과 개성보다는 깊은 감정에 집중한다. 묘사로는 그 자세함을 다 담을 수 없고, 상영 중인 작품이라 돌려 보며 분석할 수도 없어, 뭉뚱그려 요약하는 정도로만 써 보겠다.


리사는, 안나나 클라라처럼 주인공에게 특정 영향을 미치는, 이미지와 성격이 정확한 인물이 아니다. 작품 속에서 여러 요소들에 영향을 받으며 흔들리고 변한다. ‘엄마’나 ‘아내’ 따위의 수식어는 이야기 속에서 부차적이다. 클라라가 미스터리하지만 감정과 행동이 확실한 캐릭터라면, 리사는 눈에 다 들어오지만 감정이 복합적이어서 미스터리한 캐릭터다. 리사를 연기하는 매기 질렌할의 표정은, 항상 ‘알 수 없는데 알 것 같’다. 겹겹이 쌓인 감정을,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가슴에 와닿게 한다. 숙련된 기술로만은 할 수 없는 종류의 표현이라고 느꼈다. 캐릭터에 대한 높은 정도의 공감과 몰입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리사의 얼굴은, 유치원에서는 밝고 사랑이 넘치는 미소를 짓는 데에 익숙한 교사의 것이, 집에서는 남편과는 편안하지만 아들 딸들과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아 그늘이 있는 여성의 것이 된다. 지미를 바라볼 때는 가장 복합적이고 풍부해진다. 얼굴 근육을 크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미세한 떨림을 다양하게 보여주어 관객이 공감하고 몰입하게 만든다. 뭔가에 홀린 듯 위험한 분위기를 풍겨 마음을 졸이게도 한다.


리사는 충동적으로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행동한다. 그 과정을 작품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아니라 매기 질렌할의 얼굴로 보여준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에는 복선이 숨어 있다. 묘하고 알 수 없으나 결국에는 연결되며, 작품의 긴장감과 설득력을 높인다. 오히려 울거나 단호하게 말하는 등 정확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보다, 숨기고 억누르는 미묘한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 캐릭터나 스토리에 대한 내용은 작품에 대한 글에 주로 썼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했다.)



이미지 출처: domino.com


사실 제이크 질렌할이 아니라 매기 질렌할을, 글 목록에 먼저 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크게 관심 있는 배우는 아니었고, 앞에서 말했듯 애초에 출연한 작품을 접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스크린에서 만큼은 언제나 ‘배우’ 매기 질렌할로 내게 떠올랐다. 단 한 번도,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나,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애인 레이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맡는 캐릭터와 연기에서 클리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매료되는 배우도 있지만(내 경우는 구교환.), 클리셰가 보이더라도 그 속에서 스스로가 묻어나 독특한 배우가 있다. 매기 질렌할이 그렇다. ‘리사 스피넬리’는, 매기 질렌할의 진짜 리즈는 지금부터임을 증명한다. 할리우드에서 다양성을 포함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는 만큼, 그가 앞으로 보여줄 캐릭터에 기대를 걸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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