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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n 18. 2019

그 뮤지션은 배우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as 브라이언 슬레이드



-배우: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Jonathan Rhys Meyers)
-캐릭터: 브라이언 슬레이드 in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1998, 감독: 토드 헤인즈)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벨벳 골드마인>(1998) ‘Baby’s on Fire’



음악은 대개 음악 자체로 존재한다. 허나 음악 없이 존재하는 영화는 드물다.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해 그의 음악을 소재로 삼는 영화라면 더 그렇다. 픽션인 경우, 뮤지션을 연기하는 것은 물론, 배우다. 헌데 그 ‘배우’가 이전에 주로 활동했던 분야가 음악인지 영화인지에 따라, 화면에서 주는 느낌이 좀 다르다.(두 활동을 함께 하는 예술가들도 꽤나 있고, 선을 긋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음은 인정한다.) <버레스크>(2010)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뛰어난 무대 퍼포먼스 능력으로 연기를 커버하는 느낌이었고, <프랭크>(2014)의 마이클 패스벤더는 연기로 노래마저 커버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스타 이즈 본>(2018)을 예로 든다. 레이디 가가는 ‘배우’로서 매우 훌륭했다. 허나 무대에 선 모습에서는 브레들리 쿠퍼와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레이디 가가의 것은 프로 뮤지션의 음악적 퍼포먼스 느낌이 강해, 무대를 압도하며 가슴을 울렸고, 브래들리 쿠퍼의 것은 무대에 선 인물의 감정과 상태에 집중하게 해 주었다. 매우 미세한 느낌적 느낌의 차이일 뿐이고, 그래서 무엇이 더 좋았다는 평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인지도 모른다. 다만 두 요소 중 하나가 살짝 두드러져 서로 다른 모양의 매력을 주었다는 말이다. 어느 쪽이건 관객의 마음에 캐릭터를 들여놓는 역할을 했다.  



<벨벳 골드마인>(1998) ‘The Ballad of Maxwell Demon’


여기 예외가 있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다. 그는 ‘배우’다. 푸르고 맑아 로맨틱하면서도, 뜨는 방법에 따라 카리스마 넘치거나 잔인하게도 변할 수 있는 특별한 눈(<매치 포인트>(2005)에서 양면을 모두 볼 수 있다.)을 비롯해,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이 솟는 이목구비, 외모에 대한 묘사를 먼저 한 것이 후회될 만큼 매력적인 연기, 그리고 그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폼과 분위기는, 로맨스, 스릴러, 액션,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 한가운데에서 빛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배우다. 헌데 영화 속에서 뮤지션의 역할로 무대에 선 그는, 어쩐지 달랐다. ‘뮤지션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고, ‘영화에 담긴 뮤지션’에 가깝다고 하기엔 영화적인 분위기를 지울 수 없었다. 배우와 뮤지션의 미묘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었다. 자꾸 보면 볼수록, 반하면 반할수록, 점점 멀어져 저 위에서 반짝이는 ‘스타’의 모습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뮤지션 같은데, 다 보고 떠올리면 배우의 느낌이 강해진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어딘가,에 있었다.



<벨벳 골드마인>(1998)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대표적인 캐릭터 중 하나가 바로 <벨벳 골드마인>(1998) 속 브라이언 슬레이드다. <벨벳 골드마인>의 제목은 데이빗 보위의 곡 ‘Velvet Goldmine’에서 따왔으며, 데이빗 보위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 하지만 보위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에 그의 곡과 이름을 직접적으로 쓰지 못했다.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는 ‘맥스웰 데몬Maxwell Demon’으로 대신했고, 그 상징인 번개 무늬도 비슷한 다른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내용을 비롯해 여러 연출이나 이미지, 삽입된 글자의 스타일마저 데이빗 보위를 연상시킨다.
 

<벨벳 골드마인>(1998)


하지만 다르다. 나는 <벨벳 골드마인>을 본 후에 데이빗 보위에 대해 알고 좋아하게 된 케이스인데, 작품을 계기로 찾아보게 된 것 뿐, ‘작품 때문’은 아니었다. 다시 봐도 ‘데이빗 보위의 탁월한 재현’으로 느껴 지지는 않았다- 않는 그대로 굉장했다, 직접적으로 따올 수 없어 애매하게 만들어낸 이미지와 캐릭터 전부- 오히려 모델이 된 스타와 복잡한 거리를 두고 있어 더 자유롭고 매력적인 작품이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데이빗 보위는 데이빗 보위대로, <벨벳 골드마인>은 <벨벳 골드마인>대로 사랑하게 되었고,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독자적인 하나의 아이콘으로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데이빗 보위와는 별개로 묘사할 것이다. 다만 작품이 말하는 방식이 보위의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스타일과 이미지가 시대와 메시지를 담는다. 작품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잭 페리와 같은 ‘외계인’, 그에게 빠져들고 이미지를 모방함으로써 다른 세상을 맛보고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던 아서와 같은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영국의 악’이라 칭하는 기득권 세력을, 역시 상징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



<벨벳 골드마인>(1998) ‘Sebastian’


<벨벳 골드마인>의 화면은 탁하면서도 화려하게 반짝인다.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스타일과 분위기가 화면 전체로 확장된 느낌이다. 길게 웨이브 진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할 때는 새벽처럼 뿌옇게 몽환적인 청순함이, 연분홍 곱슬머리에 보라색 왕자님 같은 의상을 입고 눈을 내리깔거나 치뜨며 하얀 배경에서 걸어 다닐 때는 순수하고 새침한 섹시함이, 총을 맞는 연극을 벌이기 전, 온통 번쩍이는 의상에 날개를 달고 무대에 선 순간에는 날카롭고 시퍼렇게 차가운 우아함이, 맥스웰 데몬 분장을 하고 몸을 유연하게 흔들거나 꽃잎을 흩뿌릴 때는 한밤중처럼 캄캄하게 절망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벨벳 골드마인>(1998) ‘Tumbling Down’


이미지를 더 설명하기 전에 사운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그가 부른 노래가 커버 곡의 성격 자체로 매우 훌륭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오로지 그 노래를 듣기 위해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볼 정도니까. <벨벳 골드마인> OST앨범에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목소리로 녹음된 곡은 ‘Baby’s On Fire’와 ‘Tumbling Down’ 둘 뿐이지만, 영상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들을 수 있다. ‘The Ballad of Maxwell Demon’의 경우, 앨범에 들어간 것은 다른 이의 보컬이지만, 영화에는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부른 버전이 나온다. 비음을 섞어 높게 내는 날카롭고 분명한 목소리는 일부러 거칠어 더 매력적이다. 초반에 부르는 ‘Sebastian’에서는 살짝 허스키하게 내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벨벳 골드마인>(1998) ‘The Whole Shebang’


다른 보컬이 덧씌워진 장면에서도 위화감이 그리 들지 않는 까닭은, 그가 노래 할 줄 아는, 음악 공연을 어떻게 하는지 아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뒤집어, 모든 라이브 퍼포먼스 장면은 ‘연극적’이기도 하다. 음악에 맞춰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카메라를 자꾸 응시하며 일부러 몸을 꼬고 입을 비튼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무대에 선 뮤지션들은 모두 ‘연기’를 하겠으나,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것은 차원이 다르다.


‘The Ballad of Maxwell Demon’ 뮤직비디오에서는 라이브 무대와 비교해 더 분명하고 약간 다른 성격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춤과 일상적 움직임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몸짓이라고 할까. 손을 꼬거나 목을 흔들거나 천천히 걷고 눈을 내리깔았다가 슬며시 들어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든 동작들은 철저한 ‘연극’ 이지만, 그 각본의 원천은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타고난 특별함이다. 입은 부러 과장되게 벌리고 모호하게 드라마틱한 표정을 지으며, 몸짓과 목소리를 미묘하게 매치하는 퍼포먼스를 ‘연기’해, 그 살리기 어려운 ‘느낌’을 살려낸다.
 

<벨벳 골드마인>(1998) ‘The Ballad of Maxwell Demon’



이 영상이 등장하는 것은, 미디어/음악 산업 권력자(?: 수트를 입은 중년 남성들의 이미지)들에게 선보인다는 설정 속에서다. 이 ‘삽입된 뮤직비디오’ 장면을 보며 묘한 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관객과 영화 속 세상 사이에는 스크린이라는 벽이 하나 있다. 헌데 이 장면에는 영화 속 스크린이 하나 더 있어, 두 겹의 벽을 통해 다가온다. 무대나 TV 속 장면들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아서, 혹은 무대 아래 수많은 팬들의 시선을 통해 브라이언을 보게 된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브라이언 슬레이드를 연기하고,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무대와 뮤직비디오에서 페르소나 맥스웰 데몬을 연기한다. 두 겹의 벽을 치고, 연기하는 연기를 하기 때문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밑바닥에 영원히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


<벨벳 골드마인>(1998)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작품의 주 소재이지 화자는 아니다. 그의 모습은 나레이터, 아서, 아서가 취재하는 브라이언의 옛 지인들, 당시 무대 아래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주관적인 기억들에 의해 대상화 되어 스타, 사기꾼, 천재 등의 상징적인 얼굴로 나타난다. 무대나 TV 영상이 아니더라도, 관객은 스크린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세계의 여러 입과 눈과 카메라 또한 거쳐 그를 접하는 것이다. 속내를 말하거나,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평범하게 공감하기에는 어려운 캐릭터다. 작품은 감히 그의 존재나 마음을 짐작하고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관찰하듯 거리를 두고 최대한 조각들을 모으는 방식을 택했다. (감독이 밥 딜런을 그린 작품 <아임 낫 데어>(2007)의 방식에도 유사한 면이 있다.)



<벨벳 골드마인>(1998) ‘Ladytron’

 
감독은 뮤지컬이나 연극, 때로는 만화 같은 연출을 적절히 삽입해 작품의 이미지에 독특함을 더하거나 메시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맨디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일종의 뮤지컬 느낌인데, 브라이언이 노래 가사를 립싱크하며 이어진다. 그는 달빛이 환한 밤 나무 아래서, 맨디의 입에 대고 노래하며 리듬을 타다가 키스한다. “I use you and I confuse you난 널 이용해 혼란에 빠트려”라는 가사에 매우 어울리는 캐릭터/장면/표정이었다. 맨디의 힘 빠진 눈은 브라이언에게 잔뜩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분명 맨디를 향하고는 있지만 브라이언의 눈에서는 명확한 감정이 잘 읽히지 않는다. 한껏 아름다워 혼란스럽게confusingly 만들 뿐이다.
 

<벨벳 골드마인>(1998) ‘Bittersweet’


이처럼 대부분 ‘분명하지만 알 수 없는’ 얼굴을 하는 브라이언이지만, 커트 와일드를 보는 눈 만큼은 이토록 ‘복잡하고도 알기 쉽’다. 맨디는 그가 이미지 메이킹을 현실과 혼동했다고 말했으나, 그 이미지, ‘만들어진’ 커트와의 관계야말로, 진짜 브라이언의 삶일지도 모른다. “Man is least himself when he talks his own person. Give him a mask and he’ll tell you the truth.”는, 연출 장치로 삽입된 연극 속 대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브라이언의 솔직한 메시지이자 작품의 시선이 된다. 이미지라는 보호막이 진짜를 드러낼 수 있게 해 준다면, 왜 이미지 속에서 살면 안 되는가? 다들 ‘꾸밈없는 진짜 너를 보여줘’ 라고 말하면서, 벌거벗긴 채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하는데.
 

<벨벳 골드마인>(1998)


나는 말하고 싶다, 커트의 대사처럼 ‘세상을 바꾸려다 우리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이미 ‘그들’은 세상을 바꾸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을 담은, 예술에 영감을 받은 예술,인 이 작품도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는, 그 핵심 브라이언 슬레이드를 탁월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또한 그렇다는 것을.


<벨벳 골드마인>이 그리는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새로운 것을 구상하기보다는 남들이 가진 반짝이는 것을 가져와 완전하고 독특하게 자기화 한다. 작품이 노골적으로 말하듯 ‘다른’, 타고난 감각과 분위기로. ‘이미지’를 만든 것이 누구건, 브라이언이 입는 순간 그것은 완전히 그의 것이 된다. 자발적으로 대상화 됨으로써, 자신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의 시야를 넓히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찾게 한다. 이미지와 스타일로 이루어진 스타, 진짜 자신을 드러내게 해 주는 가면을 쓰고 새로운 세계를 연 브라이언 슬레이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그와 닮아 있었다.


<벨벳 골드마인>(1998) ‘Baby’s on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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