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You Creepy-Pretty Bowie.
-영화: <Zoom>(2015, 감독: 페드로 모렐리)
-음악: David Bowie - ‘Oh! You Pretty Things’, 1971, <Hunky Dory>
* <Zoom>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니다. 제목을 보고 이 인간이 감히 데이빗 보위를 아우르는 글을 쓰려는 건가 걱정했다면, 안심해도 괜찮다, 다행히 아니다. 불가능하다. 그는 항상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의 음악 세계, 아니 예술 세계를 다루는 건 상상도 잘 되지 않는다. 거의 본인이 작사 작곡한, 엄청난 양의 곡들을 다 외우려면 멀었고, 익숙한 곡도 들을 때마다 새롭다. 뮤직비디오나 영화에서 보여 주는 모습은, 자체로 굉장하다. 데이빗 보위는 그냥 한 때의 락스타가 아니었다. 배우이자 음악가이자 시인이자 모델이자 패션 아이콘이자 운동가이자 모든 것이었다. 그때는 역사적 현상이었고, 지금은 일종의, 신? 음. 뭐 언젠가 시도해 볼 수는 있겠으나, 지금의 역량으론 택도 없다. 여기서 다루는 건, 그저 영화에 삽입된 그의 곡 하나일 뿐이다.
꼭 음악 영화가 아니더라도, 보위가 언급되거나 그의 곡이 쓰인 영화는 굉장히 많다. ‘Space Oddity’가 ‘또’ 흘러나올 땐, 클리셰 같을 정도다. 범위도 넓다. ‘Fame’은 일부 관객이 극장을 뛰쳐나가게 했던 ‘문제작’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2018)에, ‘Sound and Visioin’은 ‘감동실화’라는 문구가 붙은 <뷰티풀 보이(Beautiful Boy)>(2018)에 쓰였다. 같은 해에 완성된, 어찌 보면 극과 극에 있는 작품들이, 보위로 연결된다. 아, 보위의 ‘낯’익은 목소리가 극장에 퍼지는 순간, 기분이 보위돼버리는 것이다.
독특하게 철학적인 가사 덕에, 그의 곡들은 엔딩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묘하게 내용과 들어맞아, 작품이나 캐릭터의 일부를 대변했다. <위 아 영(While We are Young)>(2014)에 쓰인 ‘Golden Years’가 한 예지만, 다른 글로 미루고, <Zoom>(2015)으로 건너뛴다. 한국어 제목은 ‘발칙한 판타지 팩토리’다. 맘에 드는 번역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작품의 성격을 설명해 준다. 다른 차원에 있는 세 예술가의 세계가 창작을 통해 맞물린다는 구성도, 그것을 통해 여성 대상화와 할리우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방식도 기발했다. 호불호는 갈린다. 과감하고, 삐딱하고, ‘발칙하기’ 때문이다.
엠마, 에디, 미셸이 각각 처한 문제는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에디 말마따나 ‘인간의 한 부분일 따름’인 신체 때문에, 평가 당하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섹스돌을 만드는 엠마는 애인의 ‘말실수’를 듣고 가슴에 보형물을 넣는 수술을 한다. 인기가 많아져서 좋은 것도 잠시, 애인은 인형 같다며 꺼려하고, 거리의 남자들은 대놓고 휘파람을 불어댄다. 소설을 쓰고 싶은 모델 미셸은, 엠마가 부러워했던 전형적 ‘미인’의 외모를 지녔다. 허나 바로 그 때문에 편견과 대상화에 둘러싸인다. 애인 데일은, 당신이 어딜 봐서 소설가냐, 영어는 쓸 줄 아냐고 비꼰다. 미셸을 찍는 포토그래퍼는 말한다, “텅 비워! 더 텅 비워!”.
페니스와 관련해 에디가 겪는 문제는,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데에서 오기 때문에, 두 여성과는 조금 다르다. 작품이 그를 통해 다루는 문제의 중심은, ‘왜 페니스를 이용하는가’에 있다.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에디가 택한 가장 쉬운 방법은, 제작자 사라와 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요구하는, 전형적이고 ‘잘 팔리는’ 스토리 라인은, 창작물의 예술성과 작가의 의도, 개연성마저 파괴한다. 그 ‘잘 팔리는’ 공식에 맞춰, 사라와 호로위츠가 미셸의 서사를 바꾸는 모습에서, 할리우드 자본주의의 여성 대상화/미소지니 클리셰(관객을 특정 이미지에 익숙해지게 만들며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엔딩에 쓰인 ‘Oh! You Pretty Things’와 그 곡을 만든 데이빗 보위의 ‘예쁨’은, 이 작품과 어떻게 연결될까. 당시 보위의 외형은 미디어에서 그리는 ‘예쁨’의 선을 넘지 않는 다. 흰 피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긴 팔다리에 마른 몸. 아무리 튀는 분장을 해도, ‘예쁜’ 외형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를, 전형적인 ‘여성성’을 ‘어울리게’ 입은 남성이라고 봐야 할까. 미디어 속 전형적 ‘남성성’을 파괴하는 동시에, ‘여성성’은 재생산 했다고 봐야 할까. 사람들이 세대를 가리지 않고 보위의 이미지를 숭배하는 까닭은, 외형 자체 때문일까?
당연히 아니고, 아니라는 것을 수많은 이들이 설명해 왔겠지만, 나도 한 마디 덧붙여볼까 한다. <Zoom>의 한 장면, 에디의 영화를 본 호로위츠는, ‘레즈비언은 섹시해’ 라고 한다. 어디부터 뜯어고쳐야 할지 모르겠는 이 남자의 사고방식은, ‘섹시한’ 레즈비언이 아니라, 레즈비언의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로부터 온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보위를 ‘예쁜 남자’로 소비하는 것은 보위 스스로가 아니라 미디어다. ‘예쁜’ 외모가 인기의 한 요소였다는 점은 맞으나, 보위는 그것을 깨닫고, 똑똑하게 이용했다. 스스로 대상화 되고 ‘피사체’가 됨으로써, 이미지들을 자꾸 드러냄으로써, 새롭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전달했다.
현재 우리가 새삼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아이디어다. 그의 70년대 페르소나 ‘Ziggy Stardust 지기 스타더스트’는, 성별 이분법을 넘나드는 ‘이방인’, ‘외계인’이었다. 당시 팬들은, ‘예쁘다’고 감탄하는 것을 넘어, ‘나도 저렇게 해볼까’ 라는 가능성을 얻었다. 그 ‘저렇게’의 포인트는 타고난 외형보다는, 그것을 이미지화한 방식에 있다. 그의 ‘프리티pretty함’과 ‘크리피creepy함(혹은 그로테스크grotesque함)’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후자에 비중을 두고 현재에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소녀들: K-pop 스크린 광장>(2017, 도서출판 여이연)에 수록된 손희정 선생님의 글 ‘베이비로션을 입은 여자들: 설리, 아이유, 로리콤’에서 사용된 ‘creepy’와 조금 비슷하려나.-
헌데 ‘Oh! You Pretty Things’가, 지기 스타더스트 등장 이전에 나온 곡이라는 점이 걸린다. 초기 화보들 일부에서 보위는, 긴 머리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이 곡이 속한 앨범 <Hunky Dory> 커버도 비슷하다. 긴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반짝거린다. 유명한 ‘오드아이’ 의 동공도 같은 크기로 편집돼 있다. 그가 남성이라는 까닭 만으로 ‘creepy-pretty 크리피-프리티’로 넘기기엔, 상당한 ‘전형적 예쁨’이다. (물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보위가 후렴구 마다 외치는 ‘pretty things 예쁜 것들’는, 작품이 비트는 ‘예쁨’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단 든다. 허나 여기서 생각을 멈추는 건 아마, ‘China Girl’ 뮤직비디오를 보다 말고 보위가 레이시스트racist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짓일게다.
Look out at your children
저기 네 아이들을 봐
See their faces in golden rays
황금빛으로 감싸인 얼굴들을
Don’t kid yourself they belong to you
스스로를 속이지 마, 그들은 네게 속하지 않아
They’re the start of the coming race
그들은 다가오는 종의 시작이야
The Earth is a bitch
지구는 ‘bitch’지
We finished our news
우린 우리의 뉴스를 끝냈어
Homo sapiens have outgrown their use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쓸모없어졌어
All the strangers came today
이방인들 모두 오늘 도착했어
And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여기 머물러 온 것 같아 보여
Oh! You pretty things
오! 이 예쁜 것들
Don’t you know you’re driving your mamas and papas insane?
너희가 엄마들과 아빠들을 미치게 만든다(아마 공포에 떨게 한다는 의미)는 걸 몰라?
Let me make it plain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Got to make way for the homo superior
호모 수피어리얼을 위한 길을 만들어야 해
-‘Oh! You Pretty Things’ 중. 1971, <Hunky Dory>
마지막 벌스와 후렴구를 이어 번역했다. 흐름으로 추측해 봤을 때, 각각의 부분에서 ‘You’는 다른 이를 지칭한다. 벌스의 ‘you’는 후렴구의 ‘엄마들과 아빠들’, ‘호모 사피엔스’일 것이다. 후렴구의 ‘you’는 ‘그들의 자녀’, ‘이방인’, ‘homo superior 호모 수피어리얼’이 될 ‘예쁜 것들’이다. 여기서 ‘pretty예쁜’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황금빛에 둘러싸인’ 얼굴들, 단순히 외양의 아름다움beauty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보위 스스로를 비롯한 ‘이방인들’이 가져온 ‘뉴스’, 다양성에 대한 아이디어, 논리 대신 강렬한 이미지가 만드는 충격으로 이뤄낸 그 새로움 자체의 아름다움aesthetic에 대한 찬사로 확장된다. 보위를 통해 이슈화 됐던 성 지향성/정체성에 국한되지 않고, 대입에 따라 범위를 넓힐 가능성도 지닌다. 그 다양성을 학습한 새로운 인간종은, ‘우월하다’. 그들의 ‘부모 세대를 미치게 만든’다.
<Hunky Dory> 다음 앨범이 바로,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1972)다. <Hunky Dory>는, ‘여성적/중성적’ 아름다움beauty에서, ‘외계의’ 아름다움aesthetic으로 가는 과도기의 앨범이 아닐까 싶다. ‘Oh! You Pretty Things’는 아마도, 이 앨범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날 ‘크리피-프리티creepy-pretty’ 보위에 대한 예언이다.
그리하여 이 곡은 <Zoom>이 지양하는 바를 언급하면서도, 지향하는 바와 연결된다. 작품은 결말에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완성함과 동시에, 그들의 세계를 망가뜨리면서, ‘Oh! You Pretty Things’를 흘려보낸다. 낡은 세계의 ‘전형적인 예쁨’을 버리고, ‘우월한’ 다양성의 아름다움으로 깨어나자는 뜻으로 삽입하지 않았을까. 아니었대도 어쩔 수 없다, 이미 기분이 보위돼버렸으니까.
사실 가사에 해석을 다는 건, 문학 교과서가 시를 조각내 상징을 설명하는 것 만큼이나 정확하지 않다. 뮤지션이 곡을 쓸 때, 의미를 규정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 글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답을 만들어 외우는 것과, 해석을 시도하는 건 다르다. 구교환 배우가 <메기>(2018) GV에서 ‘영화는 생물같다’는 말을 몇 번 했는데, 곡에도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라고 본다.
“너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바꿀 거야.”
<벨벳 골드마인>(1998)
이 문장을 ‘너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바꿀 거야’로 나눠, 앞과 뒤 중 어디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 없다. 진짜 중요한 건, 여기서의 ‘아름다움’ -앞에서 설명한 ‘pretty’가, 해석에 따라 지닐 수 있는 다양하고 무한한 가능성이다. ‘작가의 의도’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인류의 감수성 발달을 위해 기꺼이 ‘외계인’이 되었던, 오, 유 크리피-프리티 보위.
+ 사실 음악적으론 1970년께 내 최애 앨범 중 하나다. 특히 가사 다 너무 취향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