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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l 07. 2019

“I’m not a comic book villain”

Adrian Veidt said.


-캐릭터: 애드리언 바이트 / 오지맨디아스 (Adrian Veidt / Ozymandias)
in <왓치맨(Watchman)>(2009, 감독: 잭 스나이더)

* <왓치맨>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왓치맨>(2009)


슬로우모션과 음악을 탁월하게 편집한 <왓치맨>의 오프닝 중 한 장면, 젊은 남자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지기 스타더스트 분장의 데이빗 보위로 보이는 사람과 악수한다. 금발에 금빛 수트가 여유로운 미소와 조화를 이루는 그의 이름은 오지맨디아스, 애드리언 바이트다.  



<왓치맨>(2009)


스타일은 캐릭터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 것들을 드러낸다. 애드리언 바이트를 연기한 배우는 대부분 단정한 수트나 카라티를 즐겨 입는 캐릭터를 주로 맡곤 하는 매튜 구드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주로 말끔하게 넘긴 머리에 고급 수트를 입고 등장한다. 하지만 다르다, 보라색 때문이다. 애드리언이 주로 매치하는 색은 검은색과 금색, 그리고 보라색이다. 검은 양복을 입고 보라색 넥타이를 매거나, 어쩌면 히어로 수트를 입었을 때보다 더 튀는, 번쩍거리는 보라색 수트에 검은 폴라를 입고 금빛 브로치로 포인트를 준다. 패션에 흔히 사용되는 블랙과, 애드리언의 머리카락 색인 골드를 제외하면, 남는 건 퍼플이다. 보라색과 같은 화려한 색이 픽션 캐릭터와 만나는 경우, 주로 예술적인 면모나 풍부한 감성, 특이한 성격 등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차분하고 이성적인 애드리언에게는 좀 다른 의미다. 여러 번 여러 글에서 언급한 클라우스 하그리브스(<엄브렐러 아카데미>, Netflix)를 다시 끌어와 비교해 본다. 클라우스는 보라색 퍼 목도리에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는다. 그건 본인의 만족을 위해, ‘입으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두르는 보라색이다. 하지만 애드리언의 보라색은 ‘자기만족의 패션’ 이상이다. 확실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마다하지 않고 즐기는, 아니 전략적으로 써먹는 캐릭터를 드러낸다. 보라색이 그의 회사를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오지맨디아스임을 밝히고 목적에 이용한다는 설정과 연결해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예외적으로 탁월한 의상은, 매튜 구드의 곧은 자세, 마음 먹으면 차갑게 변하는 눈빛과 만나, 시선을 사로잡는 것 이상으로,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서늘하고 비밀스럽게 지적인 분위기를 창조해냈다.


<왓치맨>(2009)


사무실에서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는 애드리언은 웬일로 튀지 않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다. 하지만 역시, 넥타이는 보라색이다. 엷은 눈웃음을 묻히며 사진 찍기 좋은 자세를 취한다. 여유로우나 꼿꼿하다. 그 폼과 미소는 방송용 이미지를 위한 연기다. 자신을 숨기는 동시에 원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가면, 궁극적으로는 신념과 욕구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속내를 감추지 않고, 예의바른 언어를 사용해, 그러나 직설적으로 속내를 표현한다. ‘질의응답이라면서 질문은 없다’거나, ‘왓치맨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평가를 받는 건, 당신들 언론이 선정적인 기사를 쓴 탓’이라는 말들을, 굳이 돌려 하지 않는다.


<왓치맨>(2009)


이후 댄과 대화하며 사용하는 말투는 분명하고 진지하며, 눈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 ‘로어셰크는 소시오패스, 코미디언은 사실상 나치’라는 등 옛 동료들을 태연한 말투로 비난한다. 이렇듯 애드리언은 모든 것에 평가와 판단을 내리고, 딱히 감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끝까지 ‘이 인물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로어셰크가 세상으로부터 숨어 다니면서도 나레이션으로 관객에게 모든 것을 드러낸다면, 애드리언은 스스로를 대중에 공개한 듯 보이나, 사실상 관객과 작품 속 세상 모두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왓치맨>(2009)


결말까지 연결해 설명하면, 본인이 똑똑하다는 것을 아는, 그래서 이미 결정한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고지식한, 연기하는 법을 알고 있어 위험한, 캐릭터다. 말과 웃음 사이의 굳은 표정과 차가운 눈은, 일종의 이미지적 복선이다.


<왓치맨>(2009)


[왓치맨 활동을 하며 오지맨디아스 수트 차림으로 코미디언과 대립하는 애드리언의 말투는 딱딱하고 진지하며, 말하는 방식은 분명하고 직접적이다. 입가는 경직되어 있다. 흐트러진 자세로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담배를 피워대며 상대를 비웃는 코미디언과 비교된다. 코미디언이 조롱하며 나가자 허공을 응시하는데, 가면에 눈 주위가 가려져 노려보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섬뜩하다. 그리고 그 눈은, 코미디언의 장례식에서 우산 아래 보이는 그늘진 얼굴과 연결된다.


<왓치맨>(2009)


이처럼 그는 대개, 곧은 자세로 얼굴도 몸도 잘 움직이지 않는다. 뻣뻣하다기보다는, 굳은 채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해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본인의 글 ‘매튜 구드(2), The Insane.’ 에서 인용)



<왓치맨>(2009)


맨 앞에서 설명한 ‘보라색 수트’ 장면으로 돌아가본다. 그 수트를 입고 ‘연설’하는 장면은 캐릭터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일단 대사가 그렇다. ‘내가 유일하게 유대감을 느낀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 이라며 스스로를 인류 위의 존재로 인식한다. ‘인류를 좀먹는 악을 제거해 하나 된 세상을 이루어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이 구절은 ‘인류를 좀먹는 악을 제거해 하나 된 세상을 이루어’라는 공적인 목표와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 것’ 이라는 사적 자아실현으로 나눌 수 있다. 무게 중심은 앞과 뒤에 동일하게 실려 있으며, 사실상 애드리언 스스로 그 두 종류의 목표를 하나로 보고 있다. 자아 도취적 착각이라 하기에 그는 너무 똑똑하다.


<왓치맨>(2009)


애드리언의 기본적인 화법은 직접적이고 분명하다. 몰아붙이는 산업 권력자들의 공격에 순순히 응해 주는 듯 하면서, 기를 누르고, 이후 쉽게 주도권을 빼앗아 협박한다. 긴긴 스토리텔링을 할 때의 일정하고 안정된 톤의 목소리는 음악처럼 리듬을 이룬다. 부드럽게 굴러가던 목소리와 웃음기가 돌던 눈에 힘이 실리고, 이를 악물거나 입을 일그러뜨리기도 한다. 허나 여전히 절제된 자세와 걸음걸이, 말투를 놓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오지맨디아스 살인미수’를 꾸며내 왓치맨 살인범 리스트에서 빠져나가는 동시에 ‘인류를 좀먹는’ 인간 몇을 제거한다. 내용은 진심이지만, 동선과 대사, 표정까지 완벽하게 계산된 연기다. 그리고 이는, ‘수퍼히어로 오지맨디아스의 인류 구원 대서사시이자 애드리언 바이트의 업적 달성 시나리오’에 포함된 장면 중 하나다.


<왓치맨>(2009)



대개 픽션 속 수퍼 히어로는, 히어로 수트를 벗고 개인으로 존재할 때 드러나는 면모가 있다. 주로 사랑하는 사람, 가족, 과거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허나 작품은 애드리언의 개인사나 감정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대신 겉모습과 태도, 가치관을 부각시킨다. ‘열 일곱에 혼자가 됐다’는 과거를 털어놓기는 하지만, 특정 목적과 결론이 있는 이야기의 도입부, 감정이 배제된 서술일 뿐이다. 애드리언 바이트는 오지맨디아스 그 자체다. 그 삶에 거시적인 목표 말고 다른 것이 끼어들 자리는, 적어도 <왓치맨> 안에서는 없다.


<왓치맨>(2009)


애드리언은 스스로를 특별하게 잘난 존재로 여긴다. 아마, ‘타고난 지적 통찰력을 지닌 애드리언 바이트에게는 세상을 구하고 (알렉산더 대왕과 같이) 인류를 하나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성격상 신을 믿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일종의 사명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


<왓치맨>(2009)


애드리언은 화학 에너지의 위험성을 알기에 대체 에너지를 찾고, 핵을 막으려 노력하는 등 지구 환경 보호와 인류의 존속을 위한 방법을 찾고 실천한다. 차분하고, 이성을 잃는 법이 없으며, ‘반전주의자에 채식주의자’ 이기까지 하니, 언뜻 바람직한 지도자 상으로 보이지만, 그 기반에 깔려 있는 논리는 폭력적이다. 함께 일한 과학자들에게 독배를 주고는 자신을 파라오, 그들을 피라미드에 산 채로 묻힌 하인들에 비유한다. 파라오와 피라미드에 대한 동경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듯, 그의 이상은 천재적인 개인의 독재다. ‘코미디언은 나치’라고 하면서도 ‘인간 본성은 악하며, 바뀌지 않는다’는 코미디언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파시즘적 시스템을 만들어 ‘결과적인’ 평화를 이루어낸다.


<왓치맨>(2009)


‘폭력으로 쌓은 평화’. 그 과정에서 애드리언은 수많은 인간들을 살해하고, 존을 ‘파괴의 신’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존은 애드리언에게, 이상을 실현할 수단이자, 그것을 이해해 줄(실제로 이해해 준) 유일한 동료다.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 받으면서도 사실상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염증을 느낀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만이, 지구를 구할 까닭이다. 스스로를 인간과 분리 시키는 존은, 오히려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며, 인간적이다. 반면 애드리언은, 존을 신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 남극에서 홀로 모든 것을 지켜보는 그가 사랑하는 지구는, 자신이 지배하는 지구다. 하지만 표면적 유명세보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의 논리가 지배하는 지구다.


<왓치맨>(2009)


애드리언은 빠르다. 댄은 전력을 다해 숨을 몰아쉬며 달려들어야 하지만, 애드리언은 우아함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동작과 함께 단어를 강조하며 말을 이어 간다. 로리가 쏜 총알에 맞은 척 굴러떨어진 후, 총알을 잡은 손을 펴 보이며 살짝 웃는다. 로어셰크가 죽고 존이 떠난 후 이성을 잃은 댄이 달려들자, 피하지 않고 마치 자애로운 신이 자신의 피조물을 받아들이듯, 두 팔을 벌려 댄의 주먹을 받아낸다. 애드리언을 완전히 사랑할 수 없는 까닭이자, 그럼에도, 캐릭터로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보이는 장면이다.


<왓치맨>(2009)



자신을 막겠다는 로어셰크에게 애드리언은 말한다. “I’m not a comic book villain나는 만화 속 악당이 아니야.” 댄이나 로리, 로어셰크의 시선에서 보면, 애드리언은 동료를 배신하고 사람들을 죽인 악당이다. 소름끼치고 얄밉고 짜증난다. 하지만 애드리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느리고 유치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라 가소로운 방해물이고, 그 자신은 영웅이다. 그가 무엇인지, 작품은 정확히 말해 주지 않는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카메라가 담는 애드리언의 눈은, 아름답고 잔인하게 빛났다. 그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확신에 찬 눈빛과 모두를 압도하는 포스(그리고 금빛과 보랏빛….)에 말려든 순간, 게임은 끝난 거다.(무슨 게임….)


<왓치맨>(2009)


<왓치맨>(2009)


‘오지맨디아스, 왕 중의 왕’ 아마도 오지맨디아스 스스로, 비석에 새긴 문구다. 카메라는 댄과 로리가 떠나고 폐허에 홀로 서 있는 애드리언을 위에서 잡는다. 바라던 바를 이룬 후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쓸쓸하고 씁쓸해 보였다. 너무 똑똑해 친구도 사랑도 만들 수 없었던, 지구에서 가장 잘난 남자 애드리언 바이트. 그가 그렇게 자신이 세운 피라미드 속에 영원히 홀로 남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왓치맨>(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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