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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Nov 14. 2019

미스티 데이’s 마이웨이

Misty Day



-캐릭터:
미스티 데이 in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3 ‘마녀 집회’
(Misty Day in American Horror Story ‘Coven’)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FX) 시즌3, 마녀 학교 교장 코딜리아는 학생들에게 현대판 마녀사냥으로 화형 당한 젊은 마녀 이야기를 해 준다. 그렇게 뉴스 거리로 소비되는가 싶었던 그녀는, 2화에서 살아 등장한다. 악어를 불법포획한 밀렵꾼들을 향해 강렬한 눈빛을 쏘며 걸걸한 억양으로 정신 나간 듯 중얼거린다. 죽은 악어를 되살려 밀렵꾼들이 물어 뜯기도록 둔다. 히피풍의 목걸이와 치마, 길게 헝클어진 금발의 곱슬머리, 검게 칠한 눈가, 늪지의 마녀 미스티 데이다.


이미지 출처: carboncostume.com


미스티 데이는 자연과 친하다. 속세를 벗어나 오두막에 홀로 있는 모습이 어울린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빙빙 돌거나, 땅에 물을 주고, 돌아다니며 열매를 따먹는 모든 움직임들은,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듯 느긋하고 나른하다. 미스티의 시골 억양은 시즌1의 콘스탄스처럼 항상 붙어 있는 건 아니나,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튀어나와 매력을 발산한다. 매디슨을 살려달라고 조이가 애원하자, “Give me that mud.”라고 할 때, ‘머드’를 ‘므어드’ 하고 늘여 뱉는, 바로 그 발음이다.

조이를 처음 만난 미스티는, 들떠 감격스러워한다. 마냥 밝지는 않다. 우울하고 다급하고 정신없는 바이브다. 애원하는 눈빛으로 붙잡지만, 조이가 부담스러워하자 물러선다. 카일 옆에 누워, 사랑이나 정 보다는, 온기가 있는 존재가 옆에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이 담긴 미소를 짓는다. 조이가 다시 오자 뿌듯해하며, 예술가가 새 작품을 선보이듯 카일의 치료된 몸을 보여준다. 떠나려 하자 금방 발끈해 울먹인다. 무기력한 슬픔도, 강력한 분노도 아니다. 외로움이다. 카일이 내치자 바로 포기하고 놓아준다. 울음이 터지는 듯 얼굴을 찡그리지만 훅 한 번 삼키고는 음악에 맞추어 빠르게 빙빙 돈다. 스스로를 다잡는다. 경계에 선 감정의 줄타기를 환상적으로 해내는 릴리 레이브를 통해, 미스티 데이는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욕심 없이 은둔해 사는 듯 보여도, 미스티의 눈은 깊은 외로움으로 그렁그렁하다. 상처가 쌓여 무뎌졌고, 길어진 혼자만의 생활에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지만,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마음이 자꾸 패인다. 다른 생명을 쉽게 치료하는 미스티는, 자기 마음의 상처는 치유하지 못한다. 허나 그녀에게 있어 외로움을 달래는 것보다 중요한 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다. 동족을 찾지만 절박하지는 않다. 매디슨을 치료한 후, 자고 가라는 조이를 보지도 않은 채, 카일도 매디슨도 니네가 알아서 하라고 손을 휙 뿌린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세일럼에 들어온 후에도, 미스티는 딱히 뭔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머틀이 ‘네가 수장’이라고 하니까 슬쩍 웃어보인다. 어색하지만 기분 좋은 싱긋이다. 그냥 동족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새로운 능력을 발견해 내는 게 즐거워보인다. 가운을 입으며 여왕이 된 기분이라고 애처럼 신나하다가, ‘수장은 좋은 게 아니’라는 코딜리아의 설명을 듣고 몸과 얼굴이 정지해 긴장을 머금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수장이 되기 싫다고 말한다.

미스티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다. 자기가 선택하고, 원하는 대로 산다. 얽매이지 않는다. 동시에 따뜻하고, 정이 많다. 능력을 컨트롤 할 줄 아는 그녀의 마법은 평화롭다. 미스티가 가장 행복해 보일 때는, 스티비 노래를 들으며 빙빙 돌 때나, 생명을 살려 냈을 때다. 부활 마법은, 미스티에게 너무도 어울린다. 미스티의 마이웨이는 평화롭고 멋지다.

미스티 데이는 모든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좋을 대로 움직이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능숙하고 실용적인 동작으로 냉장고를 털거나, 온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동안 혼자 식물을 만진다. 주문을 외울 때나, 생명을 되살릴 때, “I got bad vibes.” 등의 예언스런 말을 뱉을 때는, 눈을 번뜩이며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공기를 형성한다. 나도 그녀의 주문에 걸릴 듯 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식물이 살아나는 걸 보고 코를 찡그리며 아이처럼 좋아한다. 저 순수한 웃음에 누가 안 빠져들까. 머틀이 피아노로 우울한 선율을 연주하자,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듯 의자 한쪽에 걸친 다리를 떨며 눈을 익살맞게 뜬다. 이것이 바로 타고난 마녀이자 귀여운 영혼 미스티 데이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사람을 잘 믿지만, 믿음을 저버린 자는 용서치 않는다. 자신을 생매장한 매디슨을 보자마자 패기 시작한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게 아니다. 미스티는 마법을 쓰지 않고 싸우는 법을 안다. 뚜벅뚜벅 걸어가 정확한 동작으로 치고, 내리찍고, 발로 찬다. 표정은 강하고 냉정하다. 매디슨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촌년 파워가 이런거다 이년아!’ 하는 느낌이다. 정정 해야겠다, 귀여운 영혼 미스티 데이는, 무시무시한 파이터다.

미스티는 스티비 닉스를 매우 사랑한다. 단순한 팬심이 아니다. 은인처럼 우러러본다. 홀로 있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살아갈 까닭을 줬던 것이 바로 스티비의 음악이다. 스티비의 뒷모습을 보고 누구냐고 묻는 얼굴에 이미 눈물이 어려 있다. 스티비가 뒤돌자, 휙 기절한다.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듣다, 일어나 빙빙 돈다. 떨리는 걸음으로 옆에 가 앉아 감격스러운 듯 경직된 미소를 띠고 뚫어져라 바라본다. 긴장해서 말은 빠르게 뜬다. 스티비가 다음 수장 시험을 잘 통과하라며 숄을 둘러주자, 고개를 엄청나게 끄덕거리며 꽉 끌어안는다. 수장이고 권력이고 뭐고 미스티에겐 스티비가 중요하다. 스티비가 와줬고, 격려해줬다. 이제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선 뭐든 할 준비가 돼 있다. 미스티는 이렇게, 어렵고도 쉬운 마녀다. 속상하게도, 이 만남은 그녀를 비극으로 몰아간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지옥에 가기 전 조이의 손을 꼭 잡으며 불안해하던 미스티의 ‘자기만의 지옥 personal hell’은, 어린 시절 개구리 해부 수업이다. 개구리를 살리면, 선생님이 다가와 칼로 베도록 만드는 상황이 무한반복된다. 미스티는 아이처럼 울상을 지으며 절규한다.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온통 넓히며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는다. 영혼은 지옥에 갇힌 채, 창백하게 질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미스티의 마지막이다. 그녀는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재가 되어 흩어진다. 아마 미스티가 벗어나지 못한 까닭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죽은 개구리를 두고 나올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마리 라보가 허망하게 죽고, 갑자기 모두가 부활 마법을 쓸 줄 알게 되고, 퀴니는 코딜리아의 수프림 파워에 가려지고, 풀리지 않고 애매하게 넘어간 설정들이 밟혀도, 그러려니 했는데, 미스티를 그렇게 소비해버린 것 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화형 당했다 살아나, 생명을 살리고 스티비를 들으며 외롭지만 나름 잘 살고 있었다. 근데 이 사람 저 사람 살리라고 이용해 먹더니, 생매장해 버린다. 그 후 원치도 않는 수장 시험에 밀어 넣고, 개구리 해부 지옥에 가두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처음엔 미스티를 차기 수장으로 치켜 세우더니, 사라지는 미스티를 붙잡으며 엉엉 우는 코딜리아에게 냉정하게 어쩔 수 없다고 말하던 머틀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미스티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냥 친구와 스티비 닉스와 생명을 살리는 즐거움만 있으면 됐는데.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물론 ‘착한’ 캐릭터에게 비극을 안기는 건 픽션에서 자주 쓰이는 설정이다. 허나 내가 너무 이입한 탓일까. 이건 캐릭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미스티 데이에겐 더 풍부하고 덜 비극적인 서사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울면서 개구리를 감싸던 미스티의 무너지는 온몸이, 자꾸 눈앞에서 맴돈다.


AHS 시즌3. 인스타그램 @horrorstorydaily




(+ 방금 시즌8 스포를 보아서 기분이 좀 누그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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