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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l 29. 2019

무게를 아는, 그들의 방식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 as 플립 짐머맨.



-영화:

<블랙클랜스맨(BLACKkKLANSMAN)>(2018, 감독: 스파이크 리)

Feat.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The Man Who Killed Don Quixote)>(2018, 감독: 테리 길리엄)
<패터슨(Paterson)>(2016, 감독: 짐 자무쉬)

* <블랙클랜스맨>의 구체적인 장면과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블랙클랜스맨>(2018) 포스터.


아담 드라이버에 관해 처음 쓰는 것은 아니다. 몇 작품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이 맛보기로 대충 적혀 있는 두 페이지 짜리 글이 이미 블로그와 브런치에 올라가 있다. 다시 읽어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대강 다듬어 놓은 상태다. 그때는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고, 이 정도로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상한 것은 명확한 계기가 없다는 점이다. <패터슨>(2016)을 보기 전 까지만 해도, ‘얼굴도 모르고 얼굴을 봐도 별 감흥이 없는’ 배우였으나, 지금은 놀랍게도 <데드 돈 다이>(2019)에 대한 나의 기대가 ‘짐 자무쉬’와 ‘아담 드라이버’ 두 이름에 (과장을 보태면) 거의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로건 럭키>(2017)


이전 글에 언급한, <로건 럭키>(2017)의 ‘술 마는 장면’을 보고 멋있다, 연기 잘한다, 고 감탄하기는 했으나, 거기서 그쳤었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를 본 후 배우에 눈을 둘 새도 없이, 시대를 뛰어넘는 스토리텔링에 감탄하면서도 그마저 가려버리는 섹시즘sexism에 질려하고 있었을 뿐인데, <블랙클랜스맨>(2018)을 보다가, 소파와 합체한 플립이 등장했을 때부터 내 입은 이미 쩍 벌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이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모르겠다. 아직도 아담 드라이버에 대한 관심이 ‘연기에 대한 감탄’에서 ‘덕질’로 넘어가는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내게 더 특별한 배우라고 할 수 있겠다. 서서히 빠져들었고, 앞으로 더 빠져들 예정이므로, 아담 드라이버에 대한 두 번째 글, 아마도 마지막은 아닐 글을 쓰기로 했다.  



<블랙클랜스맨>(2018)


<블랙클랜스맨>은, 실존 인물 론 스톨워스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허나 과거의 일화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이야기를 현재 해야 하는 까닭’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그린 북>(2018)과 다른 점이다. 물론 <그린 북>은 잘 만든 영화다. 개인적으론 마허샬라 알리 상 받은 거 보고 기뻐 날뛰었다.) 조금 지나치거나 아쉬운 부분도 있기는 했으나, 시원스럽게 풀어가는 연출이 전체적으로는 매력있었다. 허나 내가 보기에 이야기를 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론과 플립을 맡은 배우들의, 서로 달라 어울리는 분위기와, 중심을 단단히 잡고 있는 연기였다. 론 역할의 존 데이빗 워싱턴이 다이나믹하고 여유로운 연기로 흐름을 만든다면, 플립의 아담 드라이버는 그 흐름이 빗나가지 않도록 방향을 잡는다.


<블랙클랜스맨>(2018)


플립은, 론 스톨워스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축이지만, 크게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다. ‘흑인’ 경찰 론의 ‘유대인/백인’ 조력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아담 드라이버는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면서도, 플립이 단순히 이야기의 부품으로 기능하고 버려지지 않도록, ‘그 정도로 요약할 수 없도록’ 캐릭터의 깊이를 더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빈 곳을 채운다.  ‘군더더기 없기 깔끔하게.’ 그것이 아담 드라이버가 가장 잘 하는 것 중 하나다.  


<블랙클랜스맨>(2018)


늦은 론이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자, 키 큰 단발머리 남자가 소파에 길게 누워 있다. 그가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지미, 신입이 늦었네요.” 담백하다. 대개 텃새 등의 괴롭힘으로 이어질 법한 이 말이 그냥 그 상황에서 끝나도, 캐릭터의 일관성이 깨지지 않을 정도다. 누워 있는 자세도 마찬가지다. 재수 없거나, 양아치 같거나, 게을러 보이지 않고, 그냥 소파의 일부처럼 자연스럽다. 배경에서 누워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는 동안 슬며시 몸을 일으킨다. 인상적으로 삐딱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다음 순간 론의 옷에 마이크를 숨기며 상황 대처 요령을 일러 주는 차분한 모습에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플립은 그런 사람이다. 의뭉스럽지 않다. 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하는 말, “침착해, 우리가 듣고 있을거야.”가, 그렇게 진실 되고 믿음직스럽게 들릴 수가 없다.

플립은 분명하게 말을 전달하고 싶을 때, 팔다리를 벌려 중심을 잡고 앉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눈썹과 눈을 올려 상대를 본다. 언성을 높이거나 인상을 팍 쓰지는 않지만, 아담 드라이버의 진중한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 모든 것이 귀찮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것도 대충 넘기지 않는 듯한 태도는 시선을 끈다.  


<블랙클랜스맨>(2018)


과장을 섞어가며 KKK 단원과 통화하는 론의 목소리를 듣는 플립의 뒷모습은, 긴장되어 있다. 의자를 살짝 돌린 채 귀 기울이는데, 반의 반쯤만 보이는 얼굴은, 앞 얼굴이 다 보이는 주변 형사들의 것에 비해 사뭇 진지하다. 대화가 길어짐과 함께 의자를 삐걱거리도록 띄엄띄엄 돌려 마침내 완전히 론을 향한다. 론이 전화를 끊자 묻는다, “방금 네 진짜 이름을 말한 거야?” 잘 해보라며 비웃고는 다시 의자를 돌리는 모습이 얄밉지 않은 것은, 역시 적절하게 담백한 태도 때문이다.


<블랙클랜스맨>(2018)


괜히 가볍게 격려하는 것보다, 위험을 부를 수도 있는 실수를 가르쳐 주는 것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함께하는 것이, 플립이 동료와 일하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론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동료로서 최선을 다한다. 론의 말을 지적하거나 계획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흑인 신입’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 오히려 이것저것 묻고 따지는 플립의 행동은, 편견이 없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며, 생산적이고 바람직하다.


<블랙클랜스맨>(2018)


좁은 방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계획을 설명하는 론과, 자리를 잡고 앉아 이것저것 묻는 플립의 모습은 조화를 이루며, 각자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론이 아이디어를 내고 틀을 짜며 ‘잘 될거’라고 사기를 돋운다면, 플립은 디테일을 점검하고 만약을 대비하며 ‘안 되면’을 묻는다. 론이 KKK단과 목소리만 닿는 반면 플립은 직접 위험에 뛰어들어 대면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의 정도가 달라서라기보다는, 둘의 성격과 일하는 방식이 달라 생기는 차이다. 론에겐 플립에게 부족한 저돌적이고 능청스러운 면이, 플립에겐 론에게 부족한 꼼꼼하고 진중한 면이 있다. ‘부족’하다고 해도 아주 약간이어서, 각자도 훌륭한 경찰이지만, 둘이 만나면 서로 보완해주며 최고의 결과물을 낸다.  

론은 ‘내 말투를 따라 해야 한다’며 어깨를 쫙 펴고 인상을 써 폼을 잡고는, 손짓을 섞어가며 연극하는 것처럼 내지르는 발성으로 대사를 읊는다. 플립은, 종이를 뚫어져라 보며 조심스럽게 대사를 따라 읽는다. 지미와 론과 관객은 웃는다. 플립은 프로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프로 형사다. 잠복수사는 그의 일이고, 따르는 연기도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태클을 걸면서도, 열심히 연습한다. 이후 KKK단을 속이는 플립의 연기를, 아담 드라이버는 플립답게 보여 준다. 가짜 론 스톨워스의 표정과 말투는 원래 플립과 아주 미세하게 연극적으로 다르다. KKK단에겐 진심으로 와 닿는 그 모든 혐오발언이, 관객과 론에겐 속 빈 단어들로 들리는 까닭이, 내막을 알고 있기 때문 만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 질 정도의 절묘한 차이다. 말에 ‘감정’이 섞여 있지만, 영혼이 없다.

 

<블랙클랜스맨>(2018)


플립은 스스로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캐릭터를, 의심까지 받아가며 연기해야 한다. 정체가 탄로 날 경우 그 ‘연기’에 대한 보복 뿐 아니라 혐오범죄 까지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목숨을 걸고 상황을 조종하며 필요한 정보를 캐내야 한다. 플립은 딱히 ‘평소에 연기를 하는’ 종류의 인물은 아니지만, 결코 재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재치의 얼굴이 담백할 뿐이며, 오히려 그 방식이 효과적이기도 하다. 론이 능청스럽고 능숙하게 연기하며 위기를 모면한다면, 플립은 담담한 태도로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네 주소를 찾아갔더니 웬 흑인이 나오더라’는 펠릭스의 말에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응 거기 내 주소 아니야’ 하고 말을 넘긴다. 장황한 변명이나 과장된 제스처는 의심을 더할 뿐이다. 아담 드라이버 특유의, 이마에 주름을 새기며 눈을 치켜뜨고 한쪽 입을 약간 올리는 얼굴은, 다 별 것 아닌 듯 느껴지게 만든다. KKK단의 의심을 잠재우고, 관객의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블랙클랜스맨>(2018)


밀실에 갇힌 플립은 ‘너 유대인 아니냐’며 위협하는 펠릭스의 눈을 피하지 않고, 침착한 톤으로 비꼰다. 중심을 잡고, 상대에게 눌리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해내고, 이마를 찡긋거리거나 입으로 장난스러운 소리를 내는 여유도 잊지 않는다. 이후, 임기응변으로 돌을 던진 론에게 펠릭스의 총을 빼앗아 쏘는 것으로 ‘보여주는데’, 멀어져 가는 차에 대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지른다. 플립답지 않은 행동이다. 이전의 긴장을 풀어내기 위한 과장된 제스처로 보인다.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단단하게만 보였던 플립의 긴장과 두려움이 묻어난다. 허나 그것으로 끝이다. 경찰서로 돌아와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의 위험성을 론에게 토로할 때도, 절대 큰 소리를 내거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입장을 설명한다. 오히려 ‘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언성을 높이는 것은, 론이다.


<블랙클랜스맨>(2018)


플립은 론처럼 열정이 넘치는 경찰은 아니다. 스스로 말하듯 그에게 경찰은 ‘직업’이고, 사건 해결은 ‘일’이다. 일을 안하거나 ‘적당히’ 하고 만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일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들은 널렸다. 다만 경찰이라는 자리의 의미를, 론과는 다른 온도로 느끼는 것 뿐이다. 성격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백인 남성’이라는 특권 때문이다.

KKK단이 배척하는 ‘유대인’이지만, 겉으로 확실히 구별되는 특징은 아니고, 처음에는 스스로도 딱히 무게를 두지 않는다. 잠복 수사를 하기 전, ‘유대인 목걸이’를 빼라는 지미에게 플립은 말한다. “유대인 목걸이가 아니라 다윗의 별이에요.” 이어 론이 유대인이냐고 묻자, “몰라, 그런가?(I don’t know, am I?)” 라고 웃음기 없이 대강 답하는데, 그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중요한 장면이다. 이후 변화하는 모습에 진정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대화 자체에서도, 플립이 한 마디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블랙클랜스맨>(2018)


플립은 ‘특권층’의 역할이 단순히 ‘차별을 하지 않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살짝 입체적이고) 바람직한 예시다. 원래도 차별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론과 함께 일하며 생각의 폭을 넓히게 된다. 론에게 자신의 특권과 소수자성에 대한 인식 변화(난 그냥 백인 소년white boy 처럼 자랐어. 성인식도 하지 않았어. 근데 다짜고짜 끌려가서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고….. 요새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를 고백하는 플립은, 딱히 크게 동요하는 얼굴을 하거나 단어에 감정을 싣지는 않는다. 손에 쥔 KKK단 명함을 내려다보며 빠르게 중얼거리는데, 내리깐 눈이 떨리는 듯 하고, 얼굴 근육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마음의 혼란과 고민의 깊이가 느껴진다. 담백하게 ‘이건 필요 없다’며 론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자리를 뜨는 뒷모습은, 가볍고도 무겁다. 특권을 버린 만큼의 가벼움과, 바로 그 특권에 대한 의식이 생긴 만큼의 무거움이 아닐까 싶다. 두 무게는 상쇄될 수 없는 것이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아담 드라이버가 그 무게를 알고 연기하는 배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클랜스맨>(2018)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 플립의 개인사는 작품에 딱히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몇 마디 만으로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아담 드라이버의 목소리와 눈빛에 있었다. 그의 담백하고 진중한 연기는, 플립이 일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블랙클랜스맨>(2018)



아담 드라이버는 연기할 때 멋지다. 팬들이 ‘잘생김을 연기한다’고 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아담 드라이버의 캐릭터들은, 클리셰적으로 멋진 행동을 딱히 하지 않는다. 딱 필요한 정도의 표현, 평범하고도 독특한 표정이, 특이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


그의 연기는 대개 쿨하다. 군더더기 없다. 굳은 표정으로 온갖 감정에 매력까지 드러낸다. 헌데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는,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 톤이 다른 작품에서와 다르게 과장되어 있었다. 자잘한 연극적 제스처와 과잉된 표현들이 요구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유독 삐그덕거렸다. 연기가 별로였다기보다는, 배우를 감독이 잘못 사용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서로 잘 맞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하는 것은 보이는데, 촌스러운 흰 수트와 선글라스처럼,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위적인 유머와 ‘언제적 기사도’ 까지 담으려니, 더 어색하다. ‘그럼에도’ 잘한다. 몰입시킨다. 멋있다. 말하자면 좀 그랬다, 는 것이지,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와 매력이 구시대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이 작품에 끝까지 집중할 수 있었던 까닭 중 하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


이와 달리, <패터슨>에서 짐 자무쉬와 아담 드라이버의 케미는 최고였다. 짐 자무쉬는 이제까지 없었던 종류의 그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아담 드라이버는 이제까지 없었던 그다운 연기로 그것을 보여 주었다.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는, 순간의 어색함마저 자연스럽게 포착하는, 연기 같지 않은 연기였다. ‘패터슨’이라는 인물의 얼굴에, ‘패터슨’이라는 장소를 담아냈다. 짐 자무쉬가 그리는, 일상과 평범한 사람들의 예술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 감독과 배우는 다음 작품도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데드 돈 다이>에 대한 기대를 좀 더 풀어놓자면, 짐 자무쉬 영화의 특징을 알기에 그 온도를 미지근하게 맞춰 놓고 있다. 하지만 짐 자무쉬가 쓴 대사가 아담 드라이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것 또한 알기에, 그 크기는 불어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데드 돈 다이>(2019) 캐릭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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