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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11. 2019

Ema is Ema.

<에마>(2019)


<에마(Ema)>(2019, 감독: 파블로 라라인)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마>(2019)


다음은 에마에 대한 설명이다.
에마는 어머니와 자매들과 자랐다. 열두살 많은 안무가와 결혼해 아이를 입양했다. 아이가 동생의 얼굴에 불을 붙인 사건 이후 파양했다. 사회복지사를 찾아가 아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복지사를 매수해 아이를 입양한 부모와 학교를 알아냈다. 부모 각각을 유혹해 남자의 아이를 갖고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취직했다. 이쯤 되면 <에마>는 일종의 ‘막장 드라마’인가 싶다. 허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에마를 설명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에마는 저 문장들로 단정할 수 없는 존재다. 작품도 그것을 알고 있다. 에마를 ‘나쁜 년’, ‘팜므파탈’, ‘또라이’, ‘악녀’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우나>(2016)의 주인공이 우나였던 것처럼, <에마>의 주인공도 에마다. 자꾸 내면을 들여다보듯 그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와, 그가 자신의 말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대사는, 에마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나같아도 저러겠다’ 까지는 아니어도, ‘쟤 왜저러지’를 대뜸 뱉지는 못하도록 한다. ‘이해할 수 있다’와 ‘저럴 수도 있겠다’ 사이 어디쯤에서, 관찰하게 한다.


<에마>(2019)


전개가 친절하지는 않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미 어떤 일이 벌어진 상태에 관객을 던져놓고는, 에마와 가스톤의 오락가락하는 대화를 통해 퍼즐을 맞춰나가도록 돕는다. 처음엔 아이와 부부가 함께 식사를 하는 그림만 보여주고, 에마가 뭘 꾸미는 거지, 라는 궁금증을 유발시키다, 마지막에 폴로를 사이에 두고 두 부부가 대면하는 장면을 블랙코미디스럽게 연출함으로써 ‘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게뭐야 싶은 사람들도 있었겠으나, 나는 그 괴상함이 흥미로웠고, 취향이었다. 한술 더 떠, 에마가 엄마와 자매들, 가스톤, ‘그’ 부부까지 둘러앉혀놓고, 성공한 자신의 계획을 태연하게 설명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에마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모여 앉은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클로즈업된다. 남편의 지친 눈과 부부의 내리깐 눈, 동생의 겁에 질린 눈은 에마가 아닌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결말은 더욱 ‘괴상’하다. 에마가 아이를 낳자, 두 가족은 정말로, 하나가 된다. 폴로는 엄마 아빠를 더블로 갖게 됐다. 모두의 시선은 에마를 향한다. 날 선 느낌은 아니다. 복잡한 성격의 것이어도, 사랑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들은 전부 에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것이다. 에마의 시선은 아이를 향하다, 모두를 향한다. 계획이었던 뭐던, 그들 하나하나에 대한 에마의 마음은 어느 정도 진심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에마는 자신의 능력, 사랑받고 사랑하기를 타고난 능력으로 새로운 형태의 대가족을 만들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에마>(2019)


가족과 부부, 아이에 초점을 두고 스토리를 풀어 쓰긴 했으나, 또 중요한 건 에마의 춤과 동료들이다. 에마에겐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춤 이라는 삶의 방식,이 있고, 그것을 함께하고 에마를 지지해주며 ‘괴상한’ 계획을 멋지다고 말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 화학 약품을 내주고, 자기 차를 불태우라고 하고, 집에 재워 주는, 함께 가스톤을 비웃고, 그가 혐오하는 레게톤을 추는 친구들. 밖에서 보면 별나고 무섭기까지 한 무리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나름의 삶과 논리를 지닌 개인들이 있다. 이들이 만드는 색과 움직임, 불붙은 거리, 레게톤에 맞춘 격렬한 안무, 파티의 조명, 그런 것들이 화면을 압도하고 관객이 빨려 들도록 한다. 그러고 보니 첫 장면은, 불타는 신호등이었다.


<에마>(2019)


시선이 신호등으로부터 서서히 내려오자 에마의 뒷모습이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실 이후에도 관객은 좀처럼 에마의 의도나 진심을 짐작할 수가 없다. 카메라는 가스톤과 에마 자신, 제 3자의 시선을 번갈아 취하며 에마를 ‘관찰’한다. 가뜩이나 보통의 사람과는 조금 ‘다른’ 감정의 메커니즘이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에마인데, 까닭은 알려주지 않은 채 행동만 툭툭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전개에 서스펜스를 주는 데엔 성공했다. 허나 에마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건 다소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쁜 년’으로 대상화되곤 하는 여성들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은 인상적이었지만, 그게 또 시도에서 끝난 건 아닌지, 에마를 다르게 대상화한 건 아닌지 고민이 됐다. 이것이 대상화인가 아닌가, 대상화라면 긍정적인 척 하는 대상화인가 아니면 정말로 긍정적인 대상화인가는, 생각을 좀 더 해봐야 겠다. 에마가 종종 하는 ‘나 예쁘냐’는 질문도 걸리고, ‘그래서 엄마가 된다’는 클리셰가 결론이냐,는 삐딱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에마가 결국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는 모호하다. 감독도 정확히 모르는 것 같고, 어쩌면 그게 이 작품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는 분명하다. 이해했건 아니건 난 에마와 사랑에 빠졌고, 그건 그 ‘완벽한’ 얼굴 때문 만은 아니라는 것. 무얼 하건 당당한 태도와 사랑 넘치는 눈빛, 힘있고 유연한 몸짓과 분위기, ‘괴상한’ 생각과 감정-
그 모든 것이 모여 에마를 이룬다.


<에마>(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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