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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11. 2019

‘The King’ 이라는 허상

All Hail Timothee Chalamet.




<더 킹: 헨리 5세(The King)>(2019, 감독: 데이빗 미쇼)
Feat. <할로우 크라운(The Hollow Crown)>(BBC Two)

* <더 킹: 헨리 5세>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The King>(2019) 포스터.


할은 ‘킹덤’을 이끌 능력을 갖췄음에도 스스로 감추고 거부했다. 일부러 술을 마시고 눈빛을 흐렸다. BBC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은 그것이 연기이며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한 준비였다는 방향의 해석을 택했다. 톰 히들스턴의 할은 방탕하게 망가졌으나, 밝고 확실했고, 헨리 5세가 되자 곧고 안정적으로 정면을 향했다. 헨리 5세가 즉위 후 원래 놀던 무리를 무시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 킹>의 해석은 다르다. 정말로 왕관을 원하지 않았던 할을, 티모시 살라메의 날카롭게 그늘진 얼굴을 통해 그린다. 그 방식을 보면 오히려 <할로우 크라운>보다 더, ‘텅 빈 왕관’이라는 제목에 들어맞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허나 벤 위쇼의 리처드 2세가 할로우 크라운 자체였으므로.) 왕관의 허무함이란, 말해도 말해도 끄집어 낼 게 더 있나보다.


<The King>(2019)


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만행을 지켜봤고, 동생을 살인의 구덩이에서 건지고 싶어했다. 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내달린 동생은 죽고, 할은 원치 않았던 자리를 얻는다. 원치는 않았지만, 즉위 이후 재치 있고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허나 관료들을 대할 때의 힘 있는 눈빛과, 존에게 속내를 드러낼 때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다르다. <더 킹>이 가져온 또 하나의 핵심적 카드는, 할이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세운 마지막 기준, 유일한 친구, 존이다. 그와의 대화, 그에게만 드러내는 감정, 그의 존재 유무에 따른 태도 변화를 통해, 할의 캐릭터는 풍부해진다. 존을 연기한 조엘 에저튼이 각본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존이 주제와 연결된 인물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The King>(2019)


모두의 불신과 혐오를 받으며 올라선 자리를, 할은 지켜내기 급급해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나간다. 그 재치와 평화의 제스처는 현대의 관객을 사로잡으나, 15세기 관료들의 마음은 얻지 못한다. 할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하게 된다. 자길 모욕하든 말든 상관없었던 프랑스를 공격한다. 대법관은 프랑스를 이대로 두면 ‘킹덤’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며 왕을 설득한다. 그 사이 왕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지나가듯 끼워 넣는다, ‘킹덤’은 일종의 판타지라고.  


<The King>(2019)


그렇게 할이 프랑스를 공격하는 과정은, 멋지다. 프랑스 왕세자 역의 로버트 패틴슨은 끝까지 망가져 줌으로써 할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현실적이다. 존과 할이 진흙탕에서 구르는 모습은, 게임처럼 멋진 관람용 전쟁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죽고 옷이 엉망이 되는 전쟁을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전쟁을 ‘존중’한다는 존의 말이 떠오른다.


<The King>(2019)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할은 전쟁의 대가, 평화의 보루로 ‘얻은’ 적 프랑스 왕의 딸, 까뜨린에게서 진실을 듣게 된다. 자신이 비웃었던 왕위 적법성까지 들먹이며 필사적으로 반박하는 할은, 초라해진다. 할 말이 떨어지자 동요를 억누르며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까뜨린의 얼굴엔, 더 이상 웃음기가 없다. 대법관을 죽이고 까뜨린에게 돌아온 그는 말한다,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고, 앞으로 내게 진실만을 말해달라고. 그 순간 서로를 보는 두 사람의 진지한 눈에는, 사랑이 아닌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거짓으로 가득한 왕궁에서, 거짓에서 비롯된 전쟁으로 각각 친구와 오빠를 잃은, 아직 거짓말쟁이가 되기 전인 두 젊은 왕족 간의 유대감이랄까. 아니 그런데, 할은 이미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쟁이가 돼 버렸다.


<The King>(2019)

 
이 작품의 인물들을 분류한다면,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 적과 아군 보다는, ‘할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기준이 될 것 같다. 할이 그렇게 전쟁의 합리화에 목숨을 걸었던 까닭은, 대법관의 머리에 칼을 꽂았던 까닭은, 결국 거짓에 놀아나 그토록 피하려 했던 전쟁을 벌였고, 결과로 자신에게 진실만을 말했던 이, 유일한 친구, 존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 무너져 내렸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거대한 거짓말이었다. 기록된 헨리 5세의 사망 연도가 그로부터 2년 후라는 것을 알게 되니, 아, 나까지 허무해진다. 그리고 확실해진다, 포스터에 있는 문구, ‘All hail the King’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작품은 이제까지 쌓은 모든 멋짐을 무너뜨리며, 대의라는 거짓말, 킹덤이라는 판타지, 좋은 왕이라는 허상을 깨뜨린다.


<The King>(2019)



허나 말했듯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상상에 상상을 덧붙인, 하나의 허구적 해석일 뿐이다. 헨리 5세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거의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중세의 왕으로부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허나 굳이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작품이 담은 것은 헨리 5세 이전에, 할이라는 한 사람이다. 할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웠고, 놀랍게도 어느 정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할이 노력하고 무너지는 과정에 이입할 수 있게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티모시 살라메였다.  


<The King>(2019)


할의 몸짓과 말은, 카리스마 넘치고 힘있는 동시에 흔들리고 혼란스럽다. 두 가지가 전부 가능했던 까닭에 대한 설명은, 티모시 살라메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하다. 할의 눈은 평소 그의 것보다도 쳐져 있다. 허나 아예 힘을 빼 멍한 것은 아니다. 힘을 뺀 것처럼 보이도록 힘을 주고 있다. 계속 흔들리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도, 다수를 상대로 말할 땐 분명해진다. 말투는 또 어떤가. 내 영어 실력으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영국 발음을 내는 데에만 신경 쓰느라 아예 바꿔버리지 않고, 원래의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영국 발음을 희한하게 입혀낸다. 독특한 카리스마가 묻어난다. 전투 직전 병사들에게 스피치하는 부분도 굉장하다. 그냥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다. 온 얼굴로 내지르면서도, 감정을 싣는다.


<The King>(2019)


존의 시체를 본 할은 울지 않는다. 울려다 삼키고 얼굴을 정돈한다. 이후 프랑스 포로가 너무 많다는 병사의 말에, 다 체념한 듯 시니컬한 표정으로 냉정하게 말한다, “Kill them all.” 그 차가움에, 목이 멨다.


<The King>(2019)


시영 인사로 온갖 끼를 부리며 혼을 빼놓고 가도, 할의 얼굴을 입는 순간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여 결국 눈물까지 끌어내는 대배우, 티모시 살라메는 이미 하나의 장르이며, 완성된 작품이다. ‘All hail the King’은 반어법이지만, 다음 문장은 아니다.

All hail Timothee Chalamet.


<The King>(2019)

 


+ 사적인 요약

작품을 본 까닭은 티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이야기라 놀랐고, 그런데 결국 남는 것은 티미였다. 어쩌면 이 작품의 목적은 중세 옷을 입고 영국 발음으로 대사를 읊는 티미를 담는 것이었을지도. 칼 한 손으로 돌리기, 능숙한 프랑스어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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