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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26. 2019

에비의 영화

<블러드 심플>(1984)


 
<블러드 심플(Blood Simple)>(1984, 감독: 조엘 코엔)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블러드 심플>(1984) 트레일러.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볼 때마다 구성과 연출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왜 쟤들은 저 모양으로 이야기를 배배 꼬나, 하고 한숨이 나오지 않는 까닭 중 하나는, 깔끔하고 심플한 연출이다. 같은 소재를 어떻게 그리는지에 따라, 질리는 막장 드라마가 될 수도, 쫀쫀한 텐션의 스릴러가 될 수도 있는 법. 회상이나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상황, 상황, 상황들만 담백하게 나열한다. 반복해 등장하는 대사도, 별 것 없어 보이는 움직임도, 전부 제 역할이 있다.
 
이렇게 당연해서 하나마나한 찬사는, 한 문단이면 충분할 것 같다. 어차피 평론가처럼 반듯한 글을 쓸 주제는 못 되니, 코엔 세계의 법칙을 새삼 늘어놓기보단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한 캐릭터의 서사에 편중된 감상을 좀 써보려고 한다. 놀라 커다래진 에비의 눈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서사라고 해봤자 기본적으로는 다 클리셰다. 하지만 ‘바람 핀 아내와 직원의 살인을 남편이 청부업자에게 의뢰하는데, 결국 배신과 오해로 남편과 바람 핀 남자와 청부업자가 모두 죽는다’는 심플한 줄거리는,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인다. 표면적으로 사건의 발단은, ‘에비의 바람’이다. 하지만 에비의 입장을 들어보자. 마티는 그녀에게 못된 말들을 뱉었다. 총을 선물했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했고, 정신과에 데려갔고, 질환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마저 믿지 않았다. 굳이 그녀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마티가 문제 없는 남편으로 보이진 않는다. 에비와 레이를 죽이려고 한 부분까지 갈 필요도 없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은 것보다, 마티가 감시를 붙인 것이 먼저라는 것을 떠올리면.
 
두 사람의 본격적 시작은, 레이의 고백이었다. 상대에 대한 마음의 크기와 상관 없이, 레이는 에비에게, 끔찍해지고 있는 결혼에서 벗어나게 해 줄 틈이었을 것이다. 허나 못된 말 대신 친절한 말을 할 뿐, 레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질투에 휩싸인 마티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다. ‘에비가 다른 남자들과도 잤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는 근거 없는 내용을 믿고, 사랑하는 여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똑같이 의심하고 넘겨짚는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해서 풀려는 에비를 무시하고, 멋진 척 비련의 주인공인 척만 해대며 그녀를 떠난다. “I don’t know what you’re talking about. I swear I didn’t do anything funny. 당신이 무슨 말 하는 지 모르겠어요. 난 미친 짓 한 거 없어요.”라고 에비는 꾸준히 열심히 진실을 말했다. 왜 사랑한다면서, 그 말을 믿지 않고 듣지를 않느냔 말이다!
 
그들은 사랑이 정신을 흐렸다고 변명할 것이다. 에비는 어쩌면 아무도 완전히 사랑하지 않았기에 가장 이성적으로 행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법보다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웠기 때문에. 결국 소유욕과 물욕에 집착하던 남자들은 다 죽어버리고, 에비만 남았다. 멍청한 놈들 차라리 잘 됐다 싶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겪고 살인까지 해야만 했던 에비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에비가 집착 대신 진짜 믿음에 근거한 사랑을 줄 사람을 찾았으면, 아니 다 됐고 그냥 홀로 잘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블러드 심플>(1984)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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