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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Nov 15. 2019

모리스, 마이크, 클라이브, 스캇.

<모리스>(1987), <아이다호>(1991)


 
<모리스(Maurice)>(1987,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And.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1991, 감독: 구스 반 산트)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다호>(1991)는 픽션이다. 허나 실제가 섞여 있다. 마이크의 동료들이 인터뷰에 답하듯 성판매 경험을 늘어놓는 장면은, 다큐멘터리다. 마약을 하고, 강도짓을 하고, 서로를 골리기도 하는, 쓸데없고 ‘장난 같은’ 하루하루에 대한 묘사는, ‘허슬러 라이프’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려는 시도다. 이렇듯 작품에서, 사랑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삶이다. 언뜻 신나 보이는 나날은, 불안한 자유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날의 생계, 따가운 시선, 각종 위험. 이들이 ‘자유로운’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캇과 달리 마이크에겐 돌아갈 곳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분명히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넌 내게 돈을 주지 않지만, 너에게 키스하고 싶어.” 불확실로 가득한 삶 속 단 하나 확실한 감정.
 

<아이다호>(1991) imdb 이미지.


반면, 확실했던 모리스의 삶은 사랑으로 인해 불확실해진다. <모리스>(1987)가 완성된 시기는 <아이다호>로부터 4년 전이지만, 시간적 배경의 차이는 거의 한 세기다. 동성애가 말 그대로 ‘범죄’였던 1910년대 영국의 이야기다.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생계 걱정이 없는 계급의 ‘젠틀맨’들이다. 작품은 삶보다 먼저 사랑을 그린 후, 사랑이 삶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선택을 가른다. 리슬리가 잡혀간 후, 두려움과 죄책감에 앓고 난 클라이브는, 자신을 부정하기로 마음먹는다. ‘치료’를 받기 시작하고 한참 두통에 시달리고 난 모리스는, 알렉을 만나고, 삶을 사랑으로 정의하기로 결정한다.
 
누군가의 로맨스가, 스릴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다. 관객은 그 공포를, 모리스와 클라이브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같이 사랑에 떨고, 불안에 떨고, 가족부터 하우스키퍼, 교수, 모르는 사람, 온 세상의 눈치를 보고, 실연 당한 모리스가 슬퍼하는 걸 보며 ‘저러다 들키면 어쩌지’하고 걱정한다. 내내 마음을 졸이다가 갑자기, 왜 그렇게 시달리고 숨어야 하는지 화가 나고 속이 탄다. 물론 나는 당시를 모리스의 예쁜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알지 못하지만, 배우들의 몰입도 높은 연기에 목이 멨다.


<모리스>(1987). imdb 이미지.


클라이브에겐 함께할 용기가 없었다. 리슬리를 돕지 못한 것도, 도망치듯 결혼한 것도, 모리스의 키스를 거부한 것도, 그에게 여자를 만나라고 권유한 것도 모두 다 겁나서 한 행동이다. 그에겐 잃을 게 너무나 많았다. 비겁하다고 탓할 수는 없다.(1910년대 영국에서 동성애자로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러나 모리스를 거절하는 그의 말들은 탓해야겠다. 그 문장들에선 마이크를 거절하는 스캇의 말이 겹쳐 들린다. 스캇은 남자와 남자의 관계는 돈 없이 불가능하다고 못박고, 클라이브는 오로지 플라토닉한 것이어야 한다며 밀어낸다. 둘의 태도는 언뜻 반대로 보이나, 동성 사이의 사랑/섹스에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사회가 밀어 넣은 잣대에 본인이 내린 결론을 덧붙여 나오는 논리다. 클라이브는 학문에서 근거를 찾아 플라토닉 러브 만을 받아들였고, 스캇은 현실로부터 돈이 오가는 섹스 만을 받아들였다.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마이크와 모리스는, 온몸으로 사랑의 존재를 깨달았다. 멋지고 슬프다.
 
모리스는 클라이브의 첫 고백을 ‘rubbish쓰레기’라고 넘긴 것에 대한 대가를 지나치게 톡톡히 치른 후, 본인 말대로 ‘운 좋게’(슬픈 말이다) 서로가 원하는 관계를 얻는다. 사랑은 계급도 깨버린다. <모리스>는 플라토닉부터 에로틱까지, 동성애는 너무나 ‘정상적인’ 사랑임을 모리스와 함께 머리와 마음으로 샅샅이 느끼게 해 준다. 클라이브와의 첫 끌림을 통해 사랑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것임을 일깨우고, 알렉과의 관계를 통해 어떤 형태의 사랑을 하건 ‘피와 살이 있는 인간임을’ 외친다. 클라이브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의 환하게 웃는 얼굴은 눈물 나게 아름답다. 세상에 뭐 남자가 하나 뿐인가.
 

<모리스>(1987). imdb 이미지.


반면, 창밖을 내다 보는 클라이브의 얼굴엔 씁쓸한 후회가 묻어 있다. 대학 시절의 모리스를 띄운 연출은 탁월했다. 그는 자신이 모리스의 유일한 남자가 아닌 것에 대해, 본인도 모르게 질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착을 이겨내’라느니 하는 말들을 뱉은 것일 게다. 티도 못내는 애매한 질투. 어쩔 수 없다. 그는 함께하지 못한 대가를 아마 속으로 평생 치르며 살 거다. 정말로 모리스에 대한 클라이브의 사랑이 플라토닉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허나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모리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순간 떨리는 얼굴에서는, 분명한 성적 긴장감이 읽혔다.(휴 그랜트가 확실히 표현해 줬다.)


<모리스>(1987). imdb 이미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스캇의 마음이다. 내가 스캇의 눈에서 사랑을 읽은 건 착각이었을까? 잠든 마이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재킷을 덮어주고, 무릎을 받쳐주고, 속삭이고, 걱정하고, 가자는 데로 가고 하자는 대로 하고. 한스의 연극을 맘 편히 비웃다가 마이크가 불편해하자 중단시키고, 그런 행동들이 전부 단순히 베스트 프렌드에 대한 호의였을까? 인생 시나리오를 미리 정해놓고, 남자 사이의 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정한 상태여서, 고려도 하지 않고 넘겨버렸기 때문에 본인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장례식이 겹치는 장면의 시선 교환이, ‘서로 다름을 깨닫는’, 상징으로 해석되던데. ‘그래도 버릴 수 없는 단 하나’가 마이크임을, 스캇이 깨닫는 순간으로 볼 수는 없을까. 카르멜라의 불안 섞인 표정과 앞서 이탈리아에서 보인 눈물이, 그 사실을 스캇 본인보다 먼저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애초에 셰익스피어가 그린 헨리 5세와 등치된 캐릭터였기에, 스캇의 노선은 분명했다. 따라서 그에게 밥은, 극적인 귀환을 위해 이용해먹은 존재에 불과하다. 나쁜 짓을 배우고, 나중에 버릴 용도였다. 하지만 헨리 5세에겐 마이크가 없었다. 마지막 장면, 마이크가 또다시 아이다호에서 쓰러졌을 때, 의식 없는 그를 차에 싣고 가는 사람을, 나는 스캇으로 짐작했다. (혹은 그렇기를 바랐는지도.)


<아이다호>(1991) imdb 이미지.


아무것도 정확한 것은 없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애초에 마이크와 스캇이 게이인가를 규정하지 않고 작품을 썼다고 한다. 마지막 장면도 멀리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찍었다.(‘unidentified figure’) 어쩌면 관계와 마음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작품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다호>가 날것의 이미지를 투척해 자유로운 듯한 착각을 줬다가 점점 내면으로 옥죄어 온다면, <모리스>는 꽉 막힌 압박을 바탕으로 속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껍데기를 깨어 나간다. 너무도 다른 두 영화는 각자의 방법으로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사랑을 담는다.


<모리스>(1987). imdb 이미지.


 
+ 역시 배우들은 언급해야겠다. 리버 피닉스는 자기만의 표정이 있는 배우다. 카메라나 대화 상대와 거의 눈을 맞추지 않는데, 그대로 자연스럽고 완벽하다. 그의 죽음을 떠올리니 세상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키아누 리브스 특유의 어색하고 모호한 폼은 스캇의 얼굴에 딱이었다. 존재 자체가 섬세인 제임스 윌비와 휴 그랜트는 클래식하게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특별하게 빛났다.


<아이다호>(1991)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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