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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Nov 07. 2019

선악의 로맨티스트

에반 피터스(Evan Peters) in AHS



에반 피터스 in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Evan Peters in <American Horror Story>)
 
-캐릭터:
테이트 랭던 in 시즌1 ‘저주받은 집’
(Tate Langdon in ‘Murder House’)
키트 워커 in 시즌2 ‘정신병자 수용소’
(Kit Walker in ‘Asylum’)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FX, 이하 AHS)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 중 하나는, 눈물이다. 온갖 극한 상황에서, 슬픔의, 공포의, 혼란의, 때로는 기쁨의 눈물이 흐른다. 그렇게 자주 우는 장면이 나와도,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눈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배우마다, 캐릭터마다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즌1 ‘저주받은 집’, 릴리 레이브가 흘리는 노라의 눈물은 구슬처럼 뚝뚝 떨어진다. 정제된 우울이 은근히 만져진다. 테이트의 눈물은 다르다. 소위 ‘질질 짜는’ 느낌이다. 에반 피터스는 테이트의, 아이 같기도 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혼란을 직구로 들이민다. 배우들은 눈물의 표정을 달리해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낸다.

‘저주받은 집’의 원래 제목은 ‘Murder House 살인의 집’이다. 제목이 이야기해주듯, 수많은 이들이 살해당해 유령으로 머무는, 한 저택에 대한 얘기다. 하여 메인 캐릭터의 반 이상이 유령이다. 사람이었다가 죽어 유령이 되기도 하고, 유령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어도 살아있을 당시 사연이 나오기도 한다. 유령/사람의 구분은 캐릭터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다. 선/악 구분도 모호하다. 각각의 사연과 욕망이 다 다르면서도 비슷하고, 일관되면서도 예측하기 힘들어, 매 화 난리가 난다. 대신 유령들에겐, 각각의 분위기가 존재한다. 살아있어 삶이 있는 인간들과 달리, 일관된 감정이나 욕망에 사로잡혀 사라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아기에 집착하지만, 집을 꾸미고 다투기를 반복하는 채드와 패트릭의 공격성과, 남자와 섹스하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헤이든의 공격성은 다르다. 모이라의 공격성은 건조하고 달관적이다. 쓸데없이 해맑은 트래비스와 여전히 수술에 미쳐있는 몽고메리 박사까지도,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각자의 욕망이 다르고 가끔은 예측할 수 없지만, 이야기가 다 끝나면 보인다, 그들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하지만 단 한 사람, 아니 한 유령 만은, 끝까지 파악할 수가 없다. 테이트 랭던이다. 엄마 애인 몸에 불을 지르고, 평범한 십대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채드와 패트릭이 아이를 가질 생각을 않는다며 잔인하게 살해하고, 노라에게 아기를 만들어 준다며 남편인 척 비비안을 덮친다(당시 비비안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것은 ‘강간’. 작품은 의심 없이 못박는다.). 테이트가 저지른 범죄는 다양하고 많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엄마에 대한 결핍 따위로는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이다.


AHS 시즌1. imdb 이미지.


바이올렛의 말처럼 ‘어둠 그 자체’ 라서일까? 테이트에겐 묘하게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채로 보면, 오히려 피 흘리는 십대 유령들이나, 패트릭과 채드가, 적개심으로 가득해 위험해 보인다. 그 공격성의 원인을 제공한 자인데도- 그들을 대하는 테이트는, 너무나 당당하고, 결백해 보이기까지 한다.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면, 테이트가 한 짓의 일부를 알고도 지켜 주려 하는 바이올렛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채드와의 언쟁 끝에 잠깐 번뜩이는 눈과, 패트릭을 ‘유혹’하다가 맞고 웃는 태연한 모습에서는, 테이트의 다른 면,이 보인다.

죽일 때의 동작은 분명하고 능숙하고 효율적이다. 표정은 거의 없다. 멍하지도 않고, 힘들어하거나 분노하지도 않는다. 재미나 여유를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시체를 바라볼 때는, 죄책감이라도 있는건지, 묘하게 축 처진 분위기가 어린다. 희생자를 찾아 학교 곳곳을 누비던 휘파람 소리의 여유와, 총을 겨누는 순간 드러난 땀에 젖은 얼굴의 흔들리는 긴장은 위화감을 일으킨다. 경찰이 방에 쳐들어왔을 때는 장난스럽게 손가락 총으로 머리를 날린다. 같은 ‘악’이라도, 다르다. 둘 다 예측할 수 없어도, 시즌2 (악마)유니스일 때 릴리 레이브의 에너지가 강하고 확실하다면, 테이트일 때 에반 피터스의 것은 여리고 혼란스럽다.


AHS 시즌1. imdb 이미지.


그것이 아마 바이올렛을 만나기 전 테이트의 상태일 것이다. 뭔가에 사로잡혔는데, 그게 뭔지 본인도 잘 모르는, 삶의 기준이 없는 상태로 목적이나 까닭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바이올렛이 테이트의 ‘삶’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그의 전무후무하고 유일한 기준이 된다. 연인, 보호자, 종교, 그냥 모든 것. 범죄에 목적이 생긴다. ‘엄마’의 이미지를 느꼈던 노라에게 아이를 주기 위해 무작정 모르는 여자를 강간했던 것처럼, 테이트는 마음을 준 사람을 위해선 ‘뭐든’ 한다. 이상하고 과하고 폭력적인 방향으로 행동한다. 헌데 위하는 마음 자체는 너무나 진심이어서, 말문이 막힌다.

테이트가 바이올렛에게 무언가를 제안하고 나서 덧붙이는 말이 있다. ‘only if you want to 오로지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이처럼 바이올렛을 대할 때의 테이트는, 배려심 넘치는 순수한 로맨티스트다. ‘네가 내게서 멀어진 것 같다’며 울먹이다가도, ‘네가 가라고 하면 가겠다’고 악의 없이 말한다. 정말로 바이올렛이 꺼지라고 하면 꺼진다. 바이올렛을 위해 몰래 하는 행동에는 살인까지도 포함돼 있지만, 그녀 앞에서 만큼은 너무나 바람직하고 듬직한 동시에 여리고 지켜주고 싶은 남자친구의 모습이다. 엄청나게 신경 쓰기 때문에 행동이 과하지 않고 섬세해서, 때로는 담백하기도 하다. “Hi I’m Tate. I’m dead. Wanna hook up? I don’t think so.” 하는 -일종의 자조적인- 얼굴이라니. 테이트 랭던은 ‘사랑에 빠지면 예뻐진다’는 말의 표본같다. 똑같이 헝클어진 금발과 창백한 얼굴로 불쑥 불쑥 나타나도, 1화와 4화의 분위기가 다르다. ‘예뻐’ 졌다.


AHS 시즌1. imdb 이미지.


(11화)테이트가 비비안을 해했음을 알게 된 바이올렛이, 그와 헤어지는 장면은,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지?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어떻게 저런 종류의 인간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단순하면서도 알 수가 없다.) 사과와 호의를 뱉는 진지한 목소리와 인상 쓴 이마에, 진심이 잔뜩 어려 있다. 바이올렛이 그가 저지른 죄를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려고 하자, 모르겠다며 회피한다. 알고 있으면서도, 바이올렛을 잃기 싫어 스스로마저 속인다. 그리고 진짜로 속는다. 그게 가능한 인간이 바로 테이트다. “I don’t know. 모르겠어.” 라고 순진하게 말하는 순간, 눈을 잠깐 피하는데, 눈물이 어린다. 찔려서 나오는 동요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 변화 때문이다. 입가와 뺨을 찡그리며 얼굴을 흔든다. 머리카락에 반쯤 가린 눈은 바이올렛에게 고정돼 있다. 눈물이 떨어진다. 여리게 떨리는 목소리로 헷갈리는 듯 “Why would I do that? 내가 왜 그랬겠어?”을 반복한다. 말끝을 완전히 마무리하지 않는다. 훌쩍이기 시작한다. 목소리는 점점 가늘게 까지고, 얼굴은 구겨진다. 갈수록 바이올렛이 아니라, 자신에게 묻는 것 같다. 네 번째 반복할 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이를 악문다. 눈은 여전히 여리다. 바이올렛이 흔들리지 않고 죄를 나열하자, 답하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상황이 견디기 힘들어 흘리는 눈물이다. 혼나는 아이 같기도 하다. 염치없는 사과 부터, “I was different then, you were the only light I’ve ever known. 난 그때 다른 사람이었어, 넌 내가 만난 유일한 빛이야.” 라는 뻔한 말까지, 전부 진짜임을 알겠어서 미치겠다. 사랑한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내는 콧소리, 아련한 미소,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내지르는 절규까지. 길게 묘사를 늘어놨지만,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굉장한 장면이었다. 테이트에 대한 감정은 갈수록 혼란스럽지만, 에반 피터스에게 만큼은 맘 놓고 반하게 되는.

마지막, 테이트는 바이올렛이 흥미를 보인 집주인 아들을 죽일 듯이 노려본 후, 찾아가 위협한다. 질투심에 해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다. 죽이려는 건 맞지만, 바이올렛을 위해서란다. 그녀가 외롭지 않게 너도 유령으로 만들어야겠단다. 바이올렛은 그걸 누릴 자격이 있단다. 아이고, 이 비뚤어진 순정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에반 피터스는 끝까지, 시청자에게 정확한 판단력을 돌려주지 않는다. 벤에게 ‘You son of a bitch’라고 할 때의 다 포기한 듯한 미소와 눈물 고인 눈은 또 다르고, 끝까지 바이올렛을 기다리겠다며 창문 너머에서 지켜보는 눈빛은 또 다르다.


AHS 시즌1. imdb 이미지.


테이트는 ‘싸이코패스’인가? 그냥 사랑에 빠진 남자앤가? 매 순간마다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질 정도로 헷갈린다. 모든 것이 연기 같기도 하고,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러 개의 인격을 가진 것 같진 않다. 다르지만, 같은 사람의 모습이다. 에반 피터스는 장면 하나하나의 상태에 집중하면서도, 테이트 랭던에게만 있는 광기 어린 혼란과 괴상한 순정을 놓치지 않는다. 완전히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독특한 연기라는 짐작이 든다. 그렇게 에반 피터스는, 자기도 모르게 시청자를 가지고 논다. 좋아하려면 진저리 치게 되는데, 잊으려면 자꾸 생각나는 이상한 캐릭터가 바로 에반 피터스의 테이트 랭던이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시즌2의 키트 워커는 다르다. 불확실하고 쌔한 느낌이 없다. 목소리부터 다르다. 평소엔 둘 다 허스키하고 나직하지만, 테이트의 목소리는 어딘가 흔들리고 몽롱하다. 발음도 흐릴 때가 많다. 키트는 차분하고 분명하며 안정적이다. 테이트의 기준은 바이올렛이다. 비뚤어지고 기울어져 있다. 키트의 내면엔 곧은 기둥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람을 믿고 선의를 내비친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60년대 미국, 엘마가 관계를 밝히는 것을 꺼려할 때,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것’ 이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그 감수성 이랄까. (물론 백인 남성이라서 걱정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도 하겠으나)백인 남성인 키트는 올곧은 사랑으로 기득권층의 비정상적인 잣대 따위는 쳐내버린다. 극한 상황에서도 그 기둥은 굳건하다. 그레이스와 함께 있다 들켜 맞을 상황에 처하자, 망설임 없이 ‘그레이스는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믿지 못해 고자질한 래나와 함께 가자고 설득하며, ‘나라도 그랬을 것’ 이라고 조용히 말한다. 표정은 굳어 있지만, 원망은 없다. 그 태도들은 담백하다. ‘내가 널 위한다’는 것을 과시하지 않아 믿음이 간다. 곧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도, 진짜 잘못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건강한 사람의 것이다.


이렇게 에반 피터스가 테이트와 차이를 두고 쌓은 키트의 됨됨이는, 그가 블러디페이스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을 때도, 확신을 준다. 시청자가 헷갈릴 때는, 오로지 키트 스스로가 헷갈릴 때다. (4화)스레드슨의 이야기를 듣는 키트의 이마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자신을 범인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문장들을 곱씹는다. 차분하고 강하게 부정하지만, 표정에 점점 망설임이 묻어난다. 눈은 멍하게 확장되고, 눈물이 어린다.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에반 피터스는 키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혼란을 입힌다. 이제까지 차별화했던 테이트를 상기시키며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테이트는 다 알면서도 ‘내가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부정하는 것이고, 키트는 전혀 자기가 했다는 생각이 안 들면서도 ‘내가 했으면 어쩌지’라고 걱정하는 것이다. 주드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그의 결백을 확신하게 된다. 버텨왔던 무언가가 없어진 사람 같다. 고개는 무너지고, 발음은 울먹임과 함께 뭉개진다. 울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울음 사이에 단어들을 섞어 쏟아낸다. 벌게지고 힘 빠진 눈으로 곧게 상대를 바라보며 나직하고 분명하게 “Help me find god. 신을 찾도록 도와주세요.” 이라고 하는데, 바로 다음 순간 눈물과 함께 고개를 쏟으며 말을 흐린다. 둘 다 정신없이 죽죽 울더라도, 테이트와 키트의 울음은 다르다. 에반 피터스는 인물의 특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혼란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테이트는 심하게 연약해 보여도 다음 순간 무슨 짓을 할 지 불안한데, 키트는 그냥 안쓰럽다. 아니 주드 수녀고 판사고 검사고 형사고, 이 모습을 보면 그가 타인을 고의로 해칠 만한 인간이 아님을 직감할 것만 같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엘마와 그레이스를 대하는 태도는, 각각 일상과 극한 상황 속에서 키트의 상태를 드러낸다. 엘마에게 보이는 로맨틱에선, 바이올렛을 보는 테이트의 눈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절망으로부터 비롯된 맹목적인 숭배 대신, 어른의 능숙하고 안정적인 사랑이 보인다. 그레이스와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절박하고 안타깝게 휘몰아친다. 하지만 여전히 방향은 건강하다. 동질감을 바탕으로 의지하고, 의지가 된다. (8화)환상 속에서 급변하는 표정과 목소리를 비교하면 차이가 드러나지만, 둘 다 믿음직스럽고 진실되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그레이스를 대하는 키트를 관찰하면 그의 사람됨이 보인다. 테이트와 달리 기준이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으므로, 오히려 상대를 온전히 배려하게 된다. 상황에 따라 변해도, 결국 중심으로 다시 돌아온다. 키트는 상대방에게 집중할 줄 안다. 그레이스의 고백을 들으며 인상을 쓰고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녀를 본다. 입이나 얼굴이 아닌, 말 자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얼굴이다. 그 상태로 말한다, “I believe you. 널 믿어.”. 인상을 펴고 웃음기를 살짝 묻히며 “You’ll fly again. 넌 다시 날게 될 거야.” 라고 한다. 상대의 말 이후 딱히 고민의 간격을 두지 않는데도, 진심이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그의 믿음에 믿음이 간다. 희망을 갖는 게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희망을 갖게 된다.

키트는 꼬아 생각하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해결법을 찾는다. 그래서 이간질이 통하지 않는다. (4화)혼자 판단하고 멀어지는 대신, ‘왜 거짓말했냐’고 곧바로 묻는다. 평소의 나직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상기된다. 카랑카랑하고 깔끔하게 높아진다. 키트의 목적은 거짓말을 한 그레이스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진실을 듣는 것, 이다. 거짓보다 아픈 진실을 듣는 키트의 표정은 무너짐과 동시에 분명한 감정을 나타낸다. 벽에 얼굴과 손바닥을 밀착하고 있는데, 물기 어린 눈은 아련하게 깜박이고, 입술은 떨린다. 그레이스가 ‘날 혐오하냐’고 묻자, 곧바로 답한다. 역시 간격을 두지 않는다. “No, I admire you. 당신이 존경스러워.”. 생각에 잠긴 눈을 하고 있지만, 분명한 믿음이 느껴진다.

키트에겐 망설임이 거의 없다. 행동의 기준이 분명해 판단이 빠르다. (11화)돌아온 그레이스를 보는 키트는 머뭇거린다. 일단 놀랍고, 반가운데, 휘몰아치는 감정의 겹도, 묻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에반 피터스는 순간의 표정과 한 문장의 대사 만으로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고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키트답다. 서두르지도 않고, 괜히 돌려 말하지도 않는다. 상대로 하여금 저절로 입을 열게 만드는 적절하고 정직한 태도다. 엘마의 죽음을 전하며 그레이스가, ‘내가 아니라 엘마랑 미래를 만들고 싶었던 거 안다’고 악의 없이 조용히 말하자,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너지지도 않는다. ‘네가 특별하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듯, 약간 화마저 나는 듯 이마를 찡그린다. 허나 물고 늘어지지 않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며 바로 청혼한다. 빠른 시간 안에 여러 감정을 오가지만 혼란스럽지 않고, 순식간에 판단하고 결정하지만 성급하지 않다. 분명하고 곧다.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는 창백한 얼굴이, 선하게 아름다워 슬프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이제까지 설명한 그레이스-키트 투샷 에서는, 중심이 키트 쪽으로 조금 치우쳐있었다. ‘여자를 지키는 남자’ 구도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캐릭터 성격과 비중 차이다. 키트의 뚜렷한 곧음이 작품의 시선 중 하나로 쓰이기 때문이다. 키트와, 또 하나의 시선인 래나의 투샷은, 다른 종류의 유대감과 긴장감을 화면에 불어넣는다. 두 사람이 재회하는 장면은 특별하다. 처음부터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에 더 감격스럽다. 래나가 끔찍한 일을 겪은 후 키트를 온전히 믿게 된 순간, 의지할 사람이 서로밖에 남지 않은 상태의- 절박한 그러나 끈끈한 우정. 둘 다 강인하고 똑똑한 위인들이라, 상황이 절망적인데도 뱃속이 믿음으로 가득 차오른다. 사라 폴슨과 에반 피터스의, 로맨틱 없는 단단한 케미가 집중력을 높인다.

진정제 탓에 몽롱한 키트는, 잠꼬대처럼 비극을 전한다. 래나가 바늘을 빼고 뺨을 감싸자 눈을 뜬다.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눈을 내리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이야기에 집중한다. ‘스레드슨이 블러디페이스’라는 것을 알고 분노할 법도 한데,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이 살짝 확장되는 정도로 표현한다. 약과 놀라움이 섞인 탓도 있으나, 감정에 매몰되는 대신 타인을 살피는 것이다. “그가 널 해쳤어?” 라고 묻는, 목소리는 아직 흐릿하지만 진심은 또렷하게 느껴지는 문장에, 키트라는 인간의 기본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키트의 곧음은 오히려 병원을 벗어난 후 위기를 맞는다. 그레이스와 함께 집에 돌아왔는데, 죽은 줄 알았던 엘마가 아기를 안고 있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셋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괴상한 상황을 함께 겪었고, 달리 방도가 없음을 이해해 서로 배려한다. 두 아내와 한 남편 그림이 썩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둘을 보는 키트의 눈은 미세하게 달라졌다. 물론 각각에 대한 진심과 사랑이 들어있으나, 전처럼 달콤하지는 않다. 살짝 지쳐 있다. 미소의 환한 빛도 옅어졌다. (‘놀랍게도’ 질투심 때문이 아니라)외계인 트라우마 때문에 결국 엘마가 그레이스를 죽이자, 키트는 정말로, 곤경에 처한다. 그의 기준은 사람, 바르고 확실한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고 지키는 데에서 오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한, 게다가 서로를 해한 상황은 처음 맞닥뜨린 것이다. 겨우 뽑은 도끼를 들고 속옷 바람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얼굴엔 피와 함께 처음 보는 멍한 혼란이 묻어있다. 에반 피터스는 ‘고장이 나버린’ 듯한 연기를 통해, 키트의 마음을 읽게 해준다.

 비극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키트는 돌아온다. 래나를 찾아가 브라이어클리프를 무너뜨리자고 말한다. 우울함이 묻어나지만 여전히 곧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용서를 통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학대했던 주드를 퇴원 시켜 돌본다. 그렇게 똑똑하고 용감했던 래나가 명성에 파묻혀도 키트만은 변하지 않는 것도, 거짓 없는 그 눈에 만큼은 래나가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가장 친근한 얼굴의 성인saint, 키트 워커. 어쩌면 그 선함 때문에 외계인이 그를 택해 비극으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키트는 모두를 설득 시킨다. 그리고 키트를 설득 시키는 것은 에반 피터스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이상한 악evil의 로맨티스트 테이트와 평범한 선good의 로맨티스트 키트. 선과 악으로 나누긴 했어도, 그렇게 단순한 차원의 차이는 아니다. 아마, 마음의 건강함이나 공감 능력에서 오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테이트일 때의 에반 피터스가 속에 블랙홀을 두고 치우진 감정에 몸을 맡겼다면, 키트일 때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상태를 표현하면서도, 또렷한 중심은 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테이트는 영원히 예측 불가한 변수로 남고, 키트는 작품의 곧은 시선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테이트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들지 않음으로써, 키트를 속속들이 이해함으로써, 에반 피터스는 완벽하고 섬세하게 각각을 담아낸다. 화면 전체를 캐릭터의 상태로 채워 흔든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AHS 시즌1 비하인드컷.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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