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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Nov 10. 2019

본능적 로맨티스트

에반 피터스(Evan Peters) in AHS (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에반 피터스 in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2)
(Evan Peters in <American Horror Story>)

-캐릭터:

카일 in 시즌3 ‘마녀 집회’ (Kyle in ‘Coven’)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FX) 초반 시즌의 대표적 로맨티스트 에반 피터스. 시즌3에서 그는 시즌1의 바이올렛 테이사 파미가와 다시 로맨틱한 호흡을 맞춘다. 테이트-바이올렛이 떠오르면서도 많이 다른 분위기다. 현대 버전 키트 워커 같기도 한, 사교동아리(에서 홀로 멀쩡한) 회장 카일이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슬쩍 내놓는 눈에서, 이미 만만치 않은 매력이 엿보인다. 허나 그의 선한 장난기는 끔찍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그라든다. 완벽하게 바람직한 소년으로 한 번 죽었던 카일은, 매디슨과 조이의 어설픈 마법에 의해 되살아난다. 생명이 다시 붙었지만, 몸도 정신도 완전히 살아나지는 못했다. 인간과 좀비의 중간쯤 되는 상태로 존재한다.

죽기 전엔 키트, 되살아난 후에는 테이트와 비슷해 보이지만, 카일은 테이트와도, 키트와도 다르다. 7화에 잠깐 나오는 문신 샵에서의 기억은, 아픈 삶 속에서 꿈을 갖고 밝게 지냈던 카일의 속내를 드러낸다. 엄마가 언급되고 잠깐 어두워지는 표정과 애써 짓는 미소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키트처럼 바르고 곧고 행복해 보였지만, 매일을 가난과 엄마의 성폭행 속에서 견디고 있었고, 겨우 호감 가는 사람을 만났는데 죽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아닌 상태로 되살아났다. 카일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 그냥 사람이 되지 못하고 조이에게 기댄다. 좀비 버전 테이트 같기도 하다. 허나 테이트가 바이올렛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카일은 조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다. 본능적 끌림을 기반으로 하지만, 집착보다는 생존에 가깝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머리는 뒤죽박죽이고, 온몸이 아프다. 괴로워하며 으르렁거린다. 몸은 축 늘어져 있고, 얼굴은 멍하게 경직돼 있다. 엄마에게 데려오자 이해가 안 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기억이 조금씩 밀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에게 안겨 질질 끌려 들어가면서 조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겁먹은 토끼 눈을 한다. 여전히 멍하게 누워 있다가, 뭔가 마음이 움직인 듯 긴장을 누그러트리고 몸을 돌린다. 헌데 엄마가 카일을 성적인 뉘앙스로 만지기 시작한다. 저항은 않지만, 몸이 거부감을 기억하는 듯 갑자기 얼굴이 확 구겨지며 울기 시작한다.

허나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네 몸이 아니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몸을 계속 불안하게 앞뒤로 흔들다가 벌떡 일어난다. 이번에는 공포보다 분노가 강하다. 인상을 팍 쓰고 밀쳐내고 몸 전체에 힘을 준 채 “No!” 라고 외친다. 전에는 하지 못했던 말을 본능을 빌려 외친다. 얕게 갈라지는 목소리다. 가슴을 쥐어짜 온몸으로 내뱉는 소리 같다. 잊었던 소리를 터트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투박한 동작으로 엄마를 내리친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카일은 말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상태다. 모든 것이 엉망인 채로 괴로워하며 본능에 몸을 맡긴다. 에반 피터스는 그것을 이해하고, 소용돌이치듯 드러낸다. 팔다리에 있는 문신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토할 듯 몸을 웅크린다. 괴상한 신음을 내며 울다 조이의 손에 들린 총을 보고 발작적으로 다리를 꼬며 피한다. 울부짖다가, 총을 뺏는다. 입에 넣는다. 그 무너져 내린 얼굴을 보고 반사적으로 조이가 총을 다시 뺏어 내던지는 건 당연하다. 죽을 떠먹으려고 애쓰다가도 한순간 폭발해 숟가락을 내던진다. 에반 피터스는 그 소용돌이가 조이를 대하며 잠잠해지는 순간도 잘 포착해, 공기의 흐름을 느리고 떨리게 만든다. 본능적 끌림이 구체적인 사랑의 형태로 바뀌는 과정을 시청자가 목격하도록, 조이와 함께 그를 마음 아프게 사랑하게 되도록 만든다.

조이가 미스티 데이의 집에 자신을 두고 떠나려 하자 그녀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르렁거린다. 곧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이 벌게진다. 조이가 다시 찾아오자 멍하게 누워 있다가, 신기한 듯 천천히,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린다. 엄마를 죽인 후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얼 빠진 얼굴로 세면대에 머리를 계속해서 박는다. 조이가 “No Kyle.” 이라고 하자, “Kyle?” 하고 낮고 거칠게 속삭인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받아들인 듯, “No Kyle.” 이라고 따라 말한다. 여전히 같은 상태지만, 조이가 옆에 있으면 안정되고, 그녀의 눈물에 반응한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와 같은 느낌으로, 천천히 떨리는 손을 가져가 눈물을 건드린다. 닦는 게 아니라 건드린다.

난리 친 대가로 손을 묶이자 신음을 뱉으며 간절하게 조이를 응시하지만, 이내 시무룩하게  몸을 축 늘어뜨린다. 처음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좀비스러운 제스처였던 그 자세는, 카일의 안쓰러운 매력 포인트가 됐다. 헤드셋을 끼워 주니 신세계를 만난 듯 오 하는 표정, 개가 다가가자 개처럼 얼굴을 비비면서 ‘dog’ 이라고 말해보는 찡그린 표정, 마녀들이 수장 시험을 치르는 와중 머틀 뒤에 서서 지루한 듯 입과 코를 엄청나게 찡긋거리는 표정 같은 것들. 사실 모두 화면의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한 얼굴들이지만, 독특하고 우스워 시선을 빼앗는다. 에반 피터스는 대사 하나 없이도, 동물적인 제스처들을 솔직하게 입음으로써 카일의 감정과 매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잠깐 동안, 카일은 삼각관계의 중심이 된다. 죽었다 살아난 매디슨의 공감하는 말을 듣고는, 몸을 움찔거리고 눈을 똑바로 맞추지 못하며 천천히 기댄다. 이후 카일은 약간 안정된 것 같아 보인다. 침대에 앉아 똑바로 조이를 보다가, 매디슨이 옆에 앉아 팔을 뻗자 따라 팔을 뻗는다. 장난스럽고 순수한 미소가 떠 있다. 허나 조이는 카일에게 매디슨과는 한참 다른 의미다. 에반 피터스는 눈빛과 몸의 방향, 기울기로 두 사람을 대하는 카일의 태도 차이를 드러낸다. 강아지 눈으로 조이를 보다, 키스하려고 한다. 안된다고 하니 시무룩해지고, ‘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듣고 싶다’는 말에 싱긋 웃는다. 매디슨의 키스를 받지만, 곧 눈이 조이를 향한다.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열심히 조이를 보는 창백한 얼굴에 마음이 아린다. 지켜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애초에 삼각관계는 없었다는 것을.

(8화)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얼굴을 가져다 댄 채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열심히 게임에 집중하다, 조이가 들어오자 쇠에 딸려 가는 자석처럼 슥 가서 껴안는다. 눈을 보고 천천히, 애써, 한 단어 씩 뱉어낸다. 쉽지 않지만, 참을성 있게 차근차근. “I..love….you.” 그냥 속삭이는 게 아니다. 성대 사용이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아 콧소리와 숨소리를 섞어서 내는 소리다.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애쓴 시간이 묻어나는 고백이다. 그만큼 값지고 벅찬 순간이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낸의 장례식에서도 조이의 손을 붙잡고 있고, 매디슨과 조이 사이에서 자도 소중하게 꼭 껴안고 있는 건 조이다. 피오나가 손을 쓴 뒤 전처럼 말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동물적이다. 조각이 하나 부족한 퍼즐 같다. 조이가 뭔가를 하는 동안 방해하지 않으려고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슬며시 다가간다. 강아지 같다. 매디슨이 덮치자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퍽 밀치며 “No!” 하고 외친다. 표정이 일그러진다. 매디슨이 조이를 해치려 하자 달려가 소중히 감싼다. 카일의 퍼즐 조각 하나는 조이에게 있다. 삶의 이유이자 기준이다. 그건 조이가 그를, 엄마나 매디슨처럼 장난감으로 여기지 않고, 한 사람으로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머틀의 마법에 걸린 조이가 떠나자고 재촉하자, 카일은 상체를 숙이고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는다. 낮고 깊은 목소리로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해칠까봐 두렵다고 고백하고, ‘네가 할 결정이 아니’라고 대응한다. 약간 웅얼거리지만 분명한 말투다. 밝음 대신 어둠이 감싸고 있지만, 이전의 카일로 돌아온 느낌이다.

결국 조이가 카일에게 마법을 걸고, 둘은 떠난다. 카일은 스스로를 컨트롤하지만, 조이가 연관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 조이를 위협한 남자의 목을 조르는 순간의 분위기는, 매디슨을 죽이는 장면과도 연결된다. 몸 전체를 굽힌 채 힘을 주고, 왜 조이를 죽게 내버려뒀냐고 묻는다. 테이트가 떠오르지만, 그런 혼란스럽고 정신 빠진 종류의 폭력성이 아니다. 사고가 나기 이전과도, 정신이 돌아오기 전과도 다르다. 분노의 원인과 목적이 분명하지만,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듯 낯설다. 피오나가 ‘마녀를 해치는 자를 공격하라’고 마법을 걸어 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조이를 해한 자를 해하라’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걸어 놓았다고 하면 오히려 납득이 간다. 분명하고 공격적인데 이성을 잃고 폭발하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어쩌면 더 무섭다. 목소리는 으르렁거린다. 캐릭터의 차이와 더불어, 시즌을 거듭하며 깊어진 에반 피터스의 표현력이 와 닿는 장면이기도 했다.


AHS 시즌3. imdb 이미지.


조이가 살아나고, 카일은 세일럼의 충실한 개가 된다. 내가 시즌1,2를 보며 AHS를 사랑하게 됐던 까닭 중 하나는, 캐릭터 하나하나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시즌3은 그렇지 못해 아쉬웠고, 카일도 허비된 캐릭터 중 하나로 보였다. 카일은 조이와의 로맨스를 위해 존재한다.(심지어 조이조차 후반부로 가면 흐지부지된다.) 두 사람이 속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라도 덧붙었더라면 나았겠다 싶어 아쉽다. 허나 많지 않은 분량, 그것마저도 기능적으로 소비된 장면들 속에서도, 에반 피터스는 테이트와도 키트와도 다른 카일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줬다. 동물과 좀비와 사람의 경계에서, 본능적인 로맨티스트의 얼굴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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