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배웁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Dec 08. 2019

무시무시한 멋짐

사라 폴슨 in AHS


 
사라 폴슨 in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Sarah Paulson in <American Horror Story>)

 
-캐릭터:
샐리 in 시즌5 ‘호텔’ (Sally McKenna in ‘Hotel’)
+ 빌리 딘 하워드 (Billie Dean Howard),
Feat. 코딜리아, 래나, 애비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She is my artistic hero. 그는  예술적 영웅이야.”
[코디 , 유투브 GoldDerby 인터뷰]
 
내가 사랑하는 코디 펀이 사라 폴슨에 대해 한 말이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FX, 이하 AHS)의 아이콘 같은 배우다. 어마무시한 연기를 보며 항상 감탄 했으나, 써야겠다, 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었다. 헌데 시즌5 ‘호텔’의 샐리를 보자마자, 이거다 하고 풍덩 빠져버렸다. 앞선 시즌들에서 사라 폴슨은, 감정과 의사가 일인칭으로 드러나는, 분명한 화자의 얼굴로 작품의 중심을 잡았다. 욕심도 능력도 뛰어난 래나, 겸손하고 선한 리더 코딜리아, 예리하고 강한 도트와 따뜻하고 정 많은 배티까지.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스토리의 변두리에서, 가장 제멋대로 흐트러진 모습으로, 미스터리와 다크를 잔뜩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샐리는 한 번도 뱀파이어였던 적이 없었으나, 담배와 함께 보는 이들의 심장을 한 모금 씩 빨아들였다.
 


AHS 시즌5. popsugar.com.


아이리스가 스웨덴에서 온 관광객들을 묶어놓은 어두운 방, 고조됐던 음악이 갑자기 사라지며 시니컬하게 잠긴 목소리가 들린다. 푸르고 어두운 불빛 사이로, 담배를 든 샐리가 천천히 다가온다. 호일펌, 초커, 호피 무늬 재킷, 찢어진 스타킹, 짙게 번진 눈화장, 팔에 가득한 바늘자국. 눈은 게슴츠레하고, 다리는 휘청거린다. 산소 대신 담배연기로 숨쉬고, 혈관엔 피 대신 코카인이 흐를 것 같은 분위기다. (그렇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클리셰다) 아이리스가 자리를 뜨자 샐리의 눈은 장난기로 빛나고 입은 비틀린다. 흐느적거리며 놀리다, 속삭인다, “Run.” 그리고 다음 순간, 목이 나가도록 소리친다. “Run!!!!!!!!” 층층이 갈라진다. 일부러 강하게 뱃심으로 내뱉는, 힘을 과시하는 고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도록 취한, 어쩌면 정신이 나간, 자신과 상대 모두를 파괴하는 울부짖음이다.
 
죽기 전엔, 비슷하지만 보다 무관심하고 건조하다. 약에 취해 거울을 보며 멍한 눈으로 립스틱을 다 번지게 바르다 피식 웃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숨을 내쉬고는, 피부를 벗겨내듯 뺨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낸다. 노크가 계속되자, 휘청휘청 걸어가며 ‘Yeahaaaa!!!!!’ 하고 외친다. 대답과, 몽롱한 취기가 묻어나는 짜증을 동시에 날카롭게 지른다. 아이리스를 대하는 말투는 시니컬하고 방관적이다.
 
이 고함과 앞의 ‘Run’ 처럼, 샐리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목소리다. 사라 폴슨은 목소리를 쓰는 방식을 바꿔 그녀를 표현한다. 말투는 흐리고, 발음은 뭉갠다. 시니컬하게 씹어 뱉거나, 나른하고 흐리게 눙치거나, 꽉 잠긴 채 으르렁거리거나, 파괴적으로 내짖는다. 존에게 ‘난 진짜니, 믿어도 된다’고 하는 목소리는 나른하고, 눈은 장난스럽다. 비슷한 말을 해도 코딜리아와 샐리는 아주 다르다. 코딜리아는 온 마음을 다해 믿게 되고, 샐리는 의심하면서도 빨려 들어가게 된다. 스칼렛을 겁줄 때와,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가 돈 자랑을 할 때의 웃음소리는 비슷하다. 소위 ‘마녀’ 웃음소리다(흥미롭게도 진짜 마녀는 코딜리아.).
 
담배도 빼놓을 수 없다. ‘사라 폴슨이 폐암 걸리기 전에 에미상 좀 줘’라고 쓰인 밈이 돌아다닐 만큼, 그는 화면에서 자주, 담배와 함께 등장했고, 인물의 개성에 어울리는 ‘담배 연기’를 선보였다. 시즌2에서 래나는, 자신을 ‘tough cookie 터프 쿠키’에 비유하는 남성들에게, “I am tough, but I am no cookie. 난 터프해요, 그치만 쿠키는 아니에요.”라고 꼿꼿하게 답한다. 등을 쫙 펴고 반만 팔짱을 낀 채 턱을 들고 상대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때 손가락 사이에 고정돼 있던 담배는, 래나의 당당하고 차가운 멋짐을 완성하는 액세서리 역할을 했다. 샐리의 담배는 다르다. 매 씬마다 물고 있진 않지만, 담배를 ‘피운다’기 보단 ‘떼지 못하는’ 느낌이다. 그 거칠고 자연스러운, 몸과 일체가 된 흡연은, 샐리의 퇴폐적인 멋짐을 플러스시킨다. 담배를 이로 물고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뱀처럼 목을 빼 다가가는 모습이 한 예다.


AHS 시즌5. imdb 이미지.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일상적인 눈물이다. 샐리의 눈에는 항상 짙은 우울이 끈적끈적하게 엉겨붙어 있다. 검게 번진 눈화장 때문에 더 음울해 보인다. 마약 중독자 남자를 침대 속에 가두면서도, 존을 유혹하면서도, 입꼬리가 내려가든 올라가든 눈물을 흘린다. 캐릭터 기본 설정이라고 해도, 인물과 눈물을 하나로 만든 건 사라 폴슨의 연기다.
 
아이리스의 자살을 도우며 소파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던 샐리는, 도노반이 엄마를 부르며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는다. 기시감이 든다. 고개를 흔들며 담배를 문 채 입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고, 욕을 뱉는다. “Shit.” ‘shit’은 무성음으로 구성되어 있어 주로 짧고 센 느낌이 드는데, 사라 폴슨은 일부러 목을 울려 그르렁거린다. 자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아이리스를 살리려고 피를 흘리는 도노반을 사선으로 관전하며, 비꼬듯 “Now there’s some twisted poetic justice.” 라고 씹어 뱉는다. 담배를 한 번 빨며 고개를 흐느적거리자, 또 눈물이 떨어지는 게 보인다. 그제야 그녀의 슬픈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상하다. 샐리가 위악적으로 짓궂게 움직이거나 말하면, 처음에는 입, 손, 자세, 목소리와 같은 다른 부분에 시선을 뻇겼다가, 일 초 쯤 지나 뺨에 번지는 눈물을 보게 되고, 그 자국을 따라 올라가, 비로소 그 눈이 얼마나 우울하고 깊은지 깨닫게 된다.
 
트리스탄을 잃은 후 울고 난 상태의 리즈와 여전히 울고 있는 샐리가 함께 있는 장면은, 특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화려하고 확고한 스타일과 섹슈얼한 몸짓, 말투, 당당함 때문에 언뜻 비슷해 보이나, 사실 아주 다른 태도를 지닌 두 사람은, 묘하게 어울린다. 자신의 현재를 사랑하는 리즈는, ‘여신’의 태도를 취한다. 슬픔을 감추고 자세를 가다듬는다. 샐리는 자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혐오가 샐리의 자신감이다. 죽음이 어둠을 더해 완성된 끝없는 우울이 그녀의 기둥이 된 것 같다.
 
샐리에겐 뒤틀리고 파괴적인 소유욕이 있다.(자우림의 곡 ‘밀랍천사’가 떠오르는 분위기다.) 뭘 간절히 원하는 게 아니라, 남들을 자신과 함께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가끔 팔짱을 끼고 장난 섞인 권위를 묻혀 “Entertain me.”라고 말한다. ‘너의 고통으로 날 즐겁게 해 봐.’ 그 욕구는 폭발적이기보단 느슨하고 예측불가하다. 허나 감정에 근거한 자기 방식이 있다. 사라 폴슨은 곧고 분명한 우아함을 버리고, 아예 뼈대부터 인물을 다시 쌓은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준다.
 

AHS 시즌5. imdb 이미지.


비밀의 방으로 존을 안내한 샐리는, 방관하듯 뒤에 빠져 있다가 아주 가까이 다가와 십계명을 읊으며 서술한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시니컬하거나 유혹하듯 나른한 톤이 사라지고 감정이 고조돼 목이 멘다. 존을 똑바로 응시한다. 눈동자 가득 애정 어린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입술은 일그러지고, 눈썹은 팔자가 된다. 무너지는 존을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라, 함께 무너져 내리며 온통 감싼다. 이제까지 존을 대하던 의미심장한 태도가 풀리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코테즈에 붙잡힌 유령 샐리의 뺨에 붙은 우울의 큰 까닭 중 하나는, 자신을 잊고 또 잊고 또 잊는 존에 대한 욕구다. 관계의 불안정함이 소유욕을 키운다. 그녀의 유일한 바람은, 존이 유령이 되어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다. ‘왜 여길 나가면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멍하게 묻는 존을, 어린아이를 달래듯 쓰다듬는다. 허공을 향한 그의 눈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한다. 허나 마치가 존을 낚아채는 것은 막지 못하고, 비스듬히 기대 응시한다.
 
앨릭스와 다시 잘 되어 가는 존 앞에, 샐리가 지옥의 화신처럼 나타난다. 꽉 잠긴 소리로 험한 언어들을 내보낸다. 언성이 높아지며, 성적 긴장감이 흐른다. 말다툼을 하다 서로를 탐하기를 반복한다. 존의 애무를 받는 샐리의 얼굴은, 쾌감으로 달아올랐다가 순간 울음을 터트리듯 일그러진다. 눈물이 흐른다. 여러 종류의 고조된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분노와 흥분과 닳고 닳은 슬픔이 끓어오르는 얼굴이다. 밀쳐냈다가, 붙잡았다가, 입맛을 다시고, 이를 드러낸다.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존이 벗어나자, 고개를 돌려 이를 악물고 소리지른다. “I deserve more than this! 난 이거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칼을 들고 덤비지만, 힘으로 이기지 못한다. 바닥에 주저앉아, 완전히 가서 망가진 목청을 있는 대로 긁으며 저주의 말을 뱉는다. 한 손으론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에 든 칼로 정신 없이 삿대질한다. 존이 클레어와 홀든의 손을 잡고 코테즈를 떠나는 순간에는, 난간 위에서 내려다보며 고함을 지른다. “I’m going to kill you I swear to my soul! 널 죽여버릴 거야 내 영혼에 대고 맹세해!” 꼭 그 문장 자체가 높은 곳에서 투신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AHS 시즌5. popsugar.com


딱히 존을 아주 사랑했다기 보다, 백작부인의 말처럼, ‘버림 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잡아먹을 듯’과 ‘애원하듯‘이 섞인 자세로 속삭인다. “Promise me you won’t leave me.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을 받아내자 입술을 깨물며 순수하다 싶은 미소를 짓는다. 또 눈물이 떨어진다. 총알을 손톱으로 긁어 빼내고, 담배를 물고 (마약을 주사하듯 능숙하고 터프하며 아무렇지 않게)상처를 꿰매던 피로 물든 손과 크리피하게 조화를 이룬다. 살아있을 때, 샐리는 예술가였다. 서사가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음악도 약도 마음도 퍼주고 이용만 당하다 버림받기를 반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버림받지 않는 데에 집착하다가 끔찍한 경험을 한 후 약에 취해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아이리스와 도노반의 관계에 끼어 살해당했다. 죽은 후에도 계속 이용당했다. 제임스 패트릭 마치에게, 존 로에게.
 
결국 샐리는 존을 끌어내리는 데에 실패하고, 우울한 코테즈의 유령으로 남는다. 꽉 잠긴 목소리로 투숙객들에게 시니컬한 한탄을 늘어놓으며, 눈물을 떨어트리다, 죽인다. 윌과 함께 ‘살인적 동지애’를 형성한다. 손님들 죽이는 걸 멈춰 달라고 리즈가 말하자, 목에 힘을 빼고 비음을 섞어 허스키하고 가볍게 웃는다. 존이 떠난 후 시니컬 레벨이 최고가 된 상태로, 자학적으로 재치 있게 모두를 비꼰다. 영혼을 채우기 위해 다른 영혼들을 끌어모은다는 그녀에게 반박하기 힘들다. 그리고, 아이리스가 SNS라는 천재적인 해결책을 가져온다. 코테즈에 묶여 있던 샐리의 악마적 매력이 전자파를 타는 순간, 세상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골 때리게 설득력 있는 전개다. 납득할 수 밖에 없다. 내내, 샐리의 비뚤어지고 파괴적이며, 애처롭고 처절한 소유욕과 우울을, 사라 폴슨이 착 달라붙는 연기로 드러내고, 설득하고, 캐릭터의 매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AHS 시즌5. imdb 이미지.


 
스타가 된 샐리가 입술을 깨물며 해맑게 웃는 모습과 함께, 사라 폴슨의 이번 시즌 역할은 끝났나 싶었는데, 마지막화에 시즌1의 빌리 딘 하워드가 특별출연한다. 바뀐 건 분장 만이 아니다. 완벽하게 곧은 자세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천천히 또렷하고 부드럽게 말한다. 중립적인 태도로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유령과 사람들을 대한다. 리즈가 트리스탄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리자, 손가락을 꼿꼿하게 저으며 “Love doesn’t kill. 사랑은 아무도 죽이지 않아요.” 라고 단호히 말한다. 절망하는 리즈를 보고 슬픔이 올라오는 듯 얼굴을 순간적으로 움찔 한 후, 다시 미소를 띠고 뺨을 감싸 위로한다. 빌리는 심령술로 돈을 벌지만, 이런 모습들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신뢰가 간다.
 
그러나, 빌리 딘 하워드라는 인물의 성격은 시즌1과 달리, 변한다. 쇼를 위해 코테즈를 이용하는 일종의 안타고니스트(AHS에서 이 말이 의미가 있나 싶지만)가 된다. TV 화면 속 표정은 진지하고 담백하게 드라마틱하다. 집요하게 뉴스를 찍던 래나가 떠오른다. 확실한 명령조로 존을 부르고, 실패하자,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shit’을 뱉는다. 앞에서 설명한 샐리의 shit과 완전히 다르다. 깔끔하고, 완벽하다. 빌리가 겁에 질려 코테즈를 뛰쳐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샐리가 다시 떠올랐다. 사라 폴슨이 정돈된 금발에 빈틈 없는 메이크업을 하고 화면에 등장하고부터, 그는 완벽한 빌리 딘이 되었다.


AHS 시즌1. imdb 이미지.


분량은 적어도 등장할 때마다 화면의 중심을 꽉 차지하는 빌리와 달리, 샐리는 상당한 장면에서 비스듬히 기댄 채 흐린 배경에 존재한다. 그게 ‘호텔’(코테즈 호텔), 그리고 ‘호텔’(AHS 시즌5)에서 샐리의 위치였다. 창문에서 밀쳐져 떨어지고 시야에서 밀려 벗어났다. 자꾸 밀려나고 밀쳐졌다. 허나 사라 폴슨의 연기는 그 상태로 돋보였다. 삐딱하게 우울한 채로 마이웨이를 고수하는, 파괴적이고 예측 불가한 샐리의 독보적인 매력을 뿜어냈다. 그렇게 샐리는 내 마음에, 존의 말처럼, ‘담배연기처럼 스며들었다’. 시즌 전체의 흐름이나, 샐리의 우울이 SNS로 ‘해결된’ 것을 비롯해 이런 저런 ‘해피엔딩’들에 대한 감상은 음, 보류해야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샐리(와 리즈)가 사랑 받고 행복한 상태로 끝나서 어쩔 수 없이 기쁘다.
 
 

<캐롤>(2015). imdb 이미지.


글을 마치기 전, 래나를 다시 꺼내놓아야겠다. 사라 폴슨의 AHS 속 캐릭터 모두 멋졌고, 내 취향은 샐리였지만, 특히 뇌에 뚜렷이 박힌 연기는 시즌2에서였다. 코디 펀이 종종 쓰는 표현대로 ‘fierce 치열한’ 배우임이 와닿았다. 몰입해 속이 쓰려 울거나, 경악으로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내가 사라 폴슨을 처음 본 것이, <캐롤>(2015)에서 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의 순간들을 목격하느라 바빠 다른 배우들은 기억에 남기지 못했었다. 캐롤이 캐롤일 수 있도록 곁을 지키며 지지해 주는 친구 애비를 연기한 것이 바로 그였다. 그것을 알고 나니 신기하게도, 잊고 있던 애비의 당당하고 때론 시니컬한, 차가운 듯 따뜻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래나와 겹치기도 했다. 애비는 50년대, 래나는 60년대 게이 여성이다. 당연히, 성적 지향은 한 사람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없다. 개인의 특징 중 하나다. 애비와 래나 캐릭터가 묶이는 포인트는, 성적 지향 자체가 아니라, 성적 소수자를 섹슈얼리티로 정의해 차별하는 시대에, 스스로를 잃지 않고 꼿꼿이 드러낸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사라 폴슨은, 공개적으로 여성과 데이트하는 여성이다. 성적 소수자인 셀러브리티들의 스탠스는 다양하다.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고 관련해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커밍아웃이라는 말조차 민망하도록 당연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굳이 밝히지 않거나 딱히 숨기지 않으며 사생활과 일을 분리하기도 한다. 평가하거나 분류하려는 건 아니고, 각자 다르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애초에 시스젠더 헤테로를 인간 성의 기본 값으로 설정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성은 커밍아웃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가시화되는 현상 자체가, 차별적이다. 사라 폴슨의 경험만 봐도 그렇다. 그는 자신의 성 지향성을 숨긴 적이 없으나, 다들 으레 헤테로일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에, 2005년의 키스가 커밍아웃으로 해석됐다.
 
그는 스스로의 연애에 대해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공개적으로 여성과 데이트하기 전까지(2005 당시, 브로드웨이 배우 체리 존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폴슨은 예상치 못한 순간 커밍아웃했다outed herself accidentally. “(체리 존스) Tony Award 받았고, 내가 키스했어. 그리고 갑자기, 내가 커밍아웃한  됐지.  당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  그냥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엄청 커다란 상을 받았을   만한 행동을 했던  뿐이야. 등을 토닥거리며 ‘잘했어 이자식아dude?’ 라고 하려고 했던 거였어. 내게 그건 그런 의미였어.” 이후, 그의 섹슈얼리티는 ‘무언가a thing’ 되었다.
[notofu 인터뷰]
 
‘커밍아웃’은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하거나 누구도 하지 않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허나 앞의 문장은 현재로선 관념적이다. 아이디어는 필요하지만, 아직도 많은 성적 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현실에서, 셀러브리티가 소수의 성을 공개하는 것은 의도가 어땠든 정치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행위다. 그렇기에 사라 폴슨이 클로짓 하지 않음은 고맙다. 그게 뭐 큰 일이라고? 라는 듯한 그 태도가 더 고맙다. 그의 연기처럼 확실하고 멋지다. 샐리 덕질에서 시작해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져 수습이 불가능 해진 이 글도, 사라 폴슨이 마무리해 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그냥 말하고 싶은  말하고, 스스로가 누군지 세상에 내보일  있어야allow 한다고 믿어. 당신에겐 누구든 사랑할 자격이 있어You should be able to love whomever you fucking well please.”
[notofu 인터뷰]
 

AHS 시즌5 화보. eonline.com.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낯익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