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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Dec 18. 2019

쿨하게 타오르는

토니 콜레트 Toni Collette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1998, 감독: 토드 헤인즈)
<벨벳 버즈소(Velvet Buzzsaw)>(2019, 감독: 댄 길로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Netflix)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전>(2018)은, 내 선택지에 없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호러를 위한 호러’류는 아닐 것으로 짐작했으나, 만듦새와 더불어 무섭기로도 소문난 작품이었기에 지레 겁먹고 멀리했다. 작년, 감독 아리 에스터와 함께 토니 콜레트가 떠오르고, 그가 바로 <벨벳 골드마인>(1998)맨디 슬레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살짝 놀라고 말았다. 최근에 다시 보면서는, 의아해졌다. 왜 나는 이제까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는가.

흔한 생김새는 아니다. 두드러진 이마와 광대, 푹 들어간 눈두덩과 멍하게 큰 눈, 쭉 올라간 눈썹. 턱은 좁고 입술은 얇다. 웃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날카롭고 메마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웃으면 매우 사랑스럽거나 아찔하게 멋지다. 대강의 인상을 묘사한 것일 뿐,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다. 그 방식은 배우의 재량이다. 내가 맨디에 시선을 두지 않은 건, 토니 콜레트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벨벳 골드마인>(1998)


<벨벳 골드마인>은 구성이 독특하고 탄탄하며 비주얼이 끝내주는 작품이다. 허나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연기에 연기를 덧입은 화려한 모습이 한 축에 존재한다면, 크리스찬 베일과 토니 콜레트의, 섬세하게 망가지는, 보잘것없이 아름다운 모습이 다른 축에 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빠진 젊은 인간들의 복잡하고 적나라한 심리를 드러낸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영화 캐릭터 이상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관찰자적 화자로서 기꺼이 적나라해진 토니 콜레트와 크리스찬 베일이 없었다면, 이 작품도 없었을 것이다. 브라이언은 필연적으로 넘볼 수 없는 멋을 뿜어내는 캐릭터였으나, 연기의 멋은 세 배우 모두에게 있었다.  


<벨벳 골드마인>(1998)


작품 속 ‘현재’, 아서가 맨디를 찾아간다. 빛을 잃고 헝클어진 금발, 게슴츠레한 눈, 칙칙한 색상의 옷. 눈을 익살스럽게 뜨거나 고개를 흔들며 말해도 생기가 없다. 히스테릭하고 불안정하다. 술과 약 따위의 물질과 더불어 헤어 나올 수 없는 무기력 같은 것에 쩔어 있다. 미소를 지어도 끝은 씁쓸하다. 꽉 잠긴 목소리를 들릴 듯 말 듯 대강 뱉는다. 특유의 건조한 시니컬함 사이 아련함이 미세하게 비친다. 토니 콜레트의 이름을 몰랐을 때도, 어떻게 그 나이의 배우에게서 그렇게 찌든 표정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했던 기억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의 연기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능숙하면서 개성 넘쳤다.

맨디의 회상은 브라이언에게 ‘첫눈에 반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강렬한 눈빛과 센슈얼한 ‘Ladytron’ 립싱크로 ‘빠트리는’ 연기를 했다면, 토니 콜레트는 꿈꾸는 듯 몽롱한 눈과 살짝 벌어진 입으로 ‘빠져드는’ 연기를 한다. 브라이언이 춤을 청하자, 손을 맡기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언어로 답하기 버겁도록 사로잡힌 것 같다. 살짝 위를 향한 눈은 힘이 완전히 빠져 거의 감겨 있으나, 반짝인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듯 배시시 웃는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아니 머릿속이 브라이언으로 꽉 차 숨기려는 생각조차 들어설 공간이 없는 것 같다. 말없이, 짧은 제스처들을 통해 사랑의 에너지를 잔뜩 뿜어내는 토니 콜레트는, 부러 과하게 빛을 넣은 연출과 만나, 화면에 마법을 건다. 관객도 함께 브라이언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그 부분을 비롯한 -브라이언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까지 모두, 중심은 브라이언에게 있다. 허나 그 순간 토니 콜레트의 사랑에 빠진 얼굴은, 영화가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였다.  


<벨벳 골드마인>(1998)


사실 영화 흐름상 맨디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아서가 앞서 찾아간 세실의 회상 속에서다. 클럽에서 브라이언 슬레이드를 소개하는 제스처는 ‘현재’와 다르게 생기 넘친다. 코를 찡그리며 웃고 팔을 익살스럽게 내밀며, 콧소리 가득한 높고 깔끔한 목소리로 ‘my beautiful husband내 아름다운 남편’을 소개하는 맨디에겐, 나이가 짐작되지 않는 장악력과 능숙함이 있다. 토니 콜레트의 연기에도 있는 느낌이다. 귀에 꽂히는 말투와 과장된 동작으로 끌어낸 이목을, 브라이언에게 쏠리도록 만든다. 무대에서 내려온 후 손을 들어 환호를 유도한다. 목을 뒤로 퍽 꺾어 술을 마시며 눈을 치켜올린다. 맨디에게 집중하면, 충분히 독자적으로 매력적인 제스처인데, 여러 번 보면서도 시선이 가지 않았었다. 맨디가 관객의 관심을 브라이언에게 모았듯, 토니 콜레트가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에게 포커스를 넘겼기 때문이다.

첫 매니저 세실보다 먼저 브라이언을 알아본 사람이 맨디다. 한결같이 사랑과 격려와 지지를 보낸다. 관중이 야유를 보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전투적으로 브라이언을 줄곧 응시하며 리듬을 탄다. 변명하듯 격려하는 세실보다 담배를 한 번 빨고 자신 있게, ‘당신은 사랑받을 거’라고 미소 짓는 맨디의 짧은 말이 더 믿음직스럽다. 토니 콜레트는 당시 브라이언에 대한 맨디의 사랑과 재능에 대한 확신을 눈빛과 미소에 입힌다. 관객이 브라이언에게 빠져드는 핵심은 물론 캐릭터 자체와 연출에 있으나, 어느 정도는 맨디의 표정에 설득된다.


<벨벳 골드마인>(1998)


토니 콜레트는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고 비음을 섞어 당시 맨디를 표현한다. 항상 밝아 보이는 맨디는, 그 일상적인 활기로 감정을 절제하고 불안을 감춘다. 다만 감춘다는 것을 관객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낸다. ‘커트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순간부터 시작해, 커트에게 브라이언이 끌리는 낌새를 챌 때마다, 맨디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린다. 눈은 확장되고 입은 꾹 다물린다. 섀넌이 ‘두 사람이 잔 것 같다’며 주제넘게 브라이언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며 울자, 맨디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상대를 위로한다. 섀넌이 거의 폭력적으로 붙잡자, 손을 뿌리치며 일어난다. 정신을 차린 듯 진저리친다. 아무도 모르게, 뚱한 무표정으로 브라이언과 커트가 있던 방으로 향한다.  


페이크 총격 사건 이후, 자신이 브라이언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새삼 깨달은 맨디는 이혼 서류를 들고 브라이언을 찾아간다. 예의 뚱한 무표정으로 서류를 내밀지만, 미세하게 흔들린다. 빠르게 뒤돌아 걸어가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 듯 휙 돌아 울먹이며 소리를 내지른다. 어이가 없는 듯 웃는다. 스스로 진정해 비꼬고, 다시 격양되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내비친다. 섀넌이 들어와 얌전히 나가라는 둥 누군갈 부른다는 둥 경고하자, 기가 차 입을 벌리고 무릎을 굽히며 섀넌의 말을 반복해 읊은 후, 몸을 좌우로 틀고 머리를 긁적인다. 감정을 절제하려는 제스처다. 허나 이내 울상이 되어 목이 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트린다. 완전히 망가진 얼굴로 밖으로 향한다.  


<벨벳 골드마인>(1998)


줄곧 브라이언 곁을 지키다 지친 맨디지만, 돌이키면 그 자신 있고 적절한 태도에서 자체의 스타성이 보였다. 글램 트렌드에 맞춰 꾸민 비주얼도 만만치 않다. 색색의 셰도우와 립, 원색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이 몹시도 어울린다. 배경에서 짝다리를 짚고 껌을 씹으며 눈을 치켜뜨는, 인터뷰 중인 브라이언과 눈을 마주치며 턱을 한껏 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함께 화보를 찍으며 적당히 과장된 포즈를 취하는, 맨디는 멋지다. 다만 브라이언이 더 멋질 뿐이다. 배우들이 작품에서 자신의 역할을 알고 멋짐과 표현력을 조절한 까닭이다. 토니 콜레트는 감정을 관객에게 완전히 드러내며 멋짐을 다운시켰고,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감정을 애매하게 드러내며 멋짐을 폭발시켰다.



<벨벳 버즈소>(2019). imdb 이미지.


기꺼이 주변부로 빠지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전형적이기는 마다하는 배우, 토니 콜레트. 20년 후 나온, 아주 다른 성격의 작품 속 그를 보며 같은 말이 떠올랐다.

<벨벳 버즈소>(2019)에는 원탑 주인공이 없다. 굳이 꼽자면 작품들. 예술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 했던 모든 이들은 예술에 의해 예술적으로 파괴된다. 캐릭터 하나하나보다는 아이디어나 메시지에 비중이 있다. 헌데 매력은 오히려, 캐릭터에서 느껴졌다. 참신한 설정에 비해 구성이나 연출에 기시감이 들어 아쉬웠으나, 배우들이 쌓은 연기가 살렸다.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다 결국 비명을 지르며 죽는 인물이라 해도, ‘살아 있어야’ 흥미롭다. 토니 콜레트의 그레첸이 바로 그랬다.


차분하고 권위적이며 통달한 분위기를 풍기는 로도라와 달리, 그레첸은 역시 욕심 많고 당당하고 막힘없지만, 좀 더 친근하고 가볍다. 제이크 질렌할의 모프와 흔치 않은 케미를 이룬다. 어깨에 목을 걸치고 눈웃음을 보내도 성적인 뉘앙스는 제로다. (개인적인 벨벳 버즈소 꽂힘 포인트.) 비밀스럽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기대감은 굳이 숨기지 않고 ‘미술관을 그만두고 예술 자문으로 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사이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빠르게 속삭이다가, 목소리를 째지게 흘리며 마무리한다. 호들갑스럽게 상체를 움직이며 기쁨을 나누는 두 사람은 몹시도 흥미롭다. 모프에게 ‘작품을 내게만 알려줘’, 라며 속삭이는 눈은 방금 전과 달리 욕망으로 반짝거린다. 눈가와 입가는 진지했다가 웃음으로 주름졌다가 풍부하게 오락가락한다. 모프가 정색하며 자리를 뜨자, 어이없어 말문이 막히는 듯 고개를 흔들며 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가다듬고 뒤통수에 “Kisses~”라고 인사를 보내며 자동 반사 같은 미소를 짓는다. 바로 다음,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로, 웃느라 좁혔던 눈을 다시 번쩍이게 확장시키며, 입은 살짝 일그러뜨린다. 찰나의 미세한 변화로, 광기 섞인 집요한 욕망과 오기를 드러낸다.  


<벨벳 버즈소>(2019). imdb 이미지.


그레첸이 털어놓는 까닭, ‘결국 부자들이 사고 남은 부스러기만 공개되는’ 현실은 주제와도 연결된다. 포인트는, 메시지를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최대한 건조하고 아무렇지 않게 마무리하는 것이다. 눈에 힘을 빼고 이미 올라간 눈썹을 찡긋 올리며 입을 퉁명스럽게 다문다. 시선은 내리깐다. 속으로는 고민이 많았겠고, 죄책감도 들었겠으나, 그 과정을 구구절절 심각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말처럼 ‘왜 나는 안돼?’가 결론이자 태도이며,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토니 콜레트는 그레첸의 무게와 역할에 맞는 정도의 깊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그레첸은 후반부로 갈수록 소위 ‘사망 플래그’를 풀풀 풍기고 다닌다. 전형적인 밉상이 된다. 가볍고 오만하며 억지스럽게 군다. 방금 전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며 무례한 태도를 보인다. 책상에 앉아 내려다보고 선심 쓰듯 웃음을 건네며 거들먹거리다가, 한 번 거부당하자 눈에 힘을 주며 정색한다. 다시 거부당하자, 거슬리도록 높은 톤으로 비웃고, 내려와 점점 흥분해 팔을 휘저으며 빠르고 분명하게 읊다가, 마지막 순간 팔을 벌려 책상을 짚고는 거의 내지르는 소리로 쏘아붙인다. 그 목소리에는 높고 풍부한 동시에, 건조하게 허스키한 잡음이 섞여 있다. 토니 콜레트만의 폭이다. 고개와 어깨를 흔들며 웃음을 꾸며냈다가 다시 표정을 굳히기를 되풀이한다. 히스테릭하고 정신없지만, 완전히 통제되어 있다. 자연스럽다. 문을 나가기 전 고개를 휙 돌려, 평소처럼 보내는 “Kisses~”. 가식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 어조다. 그레첸은 날뛰다 죽을 것이고, 예상대로 죽는다. 오히려 죽는 연기는 일부러 평범하다. 말했듯,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토니 콜레트는 백금색 칼단발과 귀걸이를 휘날리며 ‘자 날 마음껏 미워해’라는 듯 공기를 휘젓다가 깔끔하게 사라진다. 관객이 그레첸에 집중하면서도 이입하지는 않을 수 있도록.


<벨벳 버즈소>(2019). imdb 이미지.



<벨벳 버즈소>는 시작에 불과했다. 토니 콜레트는 넷플릭스에서 날라 다니는 중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Netflix) 속, 어쩜 이름마저 멋진 그레이스 라스무센.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까닭이기도 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의 인물이기는 하나, 이 글에선 철저히 픽션 캐릭터로 놓고 설명한다.) <벨벳 버즈소>와 마찬가지로, 메시지가 중요한 작품이나, 장르도 방식도 다르다. 두 형사와 마리 캐릭터 표현 또한 중심이다. 그레첸과 달리 그레이스는, 주제와 같은 방향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멋있고 바람직하지만, 메시지를 잡아먹지 않는 선에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작품 초반 그레이스는, 캐릭터적으로 캐런과 약간 다른 위치에 있다. 화자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캐런을 통해 보이는 그레이스 또한 존재한다. 꼼꼼하고 철저하고 확실한, 형사가 인정하는 형사의 모습이다. 일단, 멋져야만 한다. 포인트는 오버하지 않음이다. 괜히 척하거나 폼 잡지 않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빠른 걸음은 모델 워킹 같다. 목걸이와 가죽 재킷, 선글라스는,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멋을 더한다. 처음 캐런과 만났을 때, 틈을 주지 않으면서도 무시하지는 않는, 걸어가며 짧게 답하다가, 동료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호탕하게 웃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모든 순간은 그레이스의 성격과 매력을 드러내기에 충분했으나, 앞으로 보여 줄 것들의 극히 일부였다.


캐런과 함께 피해자를 찾아간 그레이스는, 먼저 직설적으로 본론을 꺼낸 후, 떠나기 직전 안부를 묻는다. 인위적이지 않게 딱 적절한 정도로 마음을 쓴다. 전문적인데 사무적이지는 않고, 진심이 묻어나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당부를 어기고 캐런이 말을 꺼내자, 불편해하는 기색을 내비치지만, 피해자에게 집중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와서는 짜증이 난 얼굴로 쏘아붙이는데, 화내지는 않고 퉁명스럽게나마 까닭을 설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굳어 있으나 짜증은 걷어낸 얼굴로, 서로 협조하자는 의사와 더불어 유대감을 약간 표시한다. 일하는 방식과  표현이 확실하고, 욕심이나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작품은 그 몇 분 간의 상황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동시에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 깔끔하다. 토니 콜레트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화면과 캐런의 시선이라는 두 개의 필터를 거친 그레이스에겐, 멋지지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허나 오래 지나지 않아 깨지며, 중심 화자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된다. 그레이스는 일을 확실히 처리하면서도 일에 먹히지 않는 형사다. 스포츠 경기와 차 수리와 술을 즐긴다. 직설적이고, 시니컬하지만, 차갑지는 않다. 감정은 묻어두지 않고 그때그때 과하지 않게 드러낸다. 쿨하고, 재치 있고, 눈치 빠르다. 빠르지만, 급하진 않다. 캐런이 ‘잘했다’고 하자 ‘뭔말이야?’ 하는 듯 인상을 쓰고, 머뭇거리자 답답한 듯 눈을 키우며 “What?” 하고 묻는다. 이 부분처럼 토니 콜레트는 웃음과 무표정의 중간쯤 되는 상태로 얼굴을 확장시킬 때가 종종 있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잠입 수사만 10년이라는 그레이스는 사실, 겉과 속이 같은, 드문 사람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토니 콜레트는 많은 대사를 빠르고 정확하고 막힘 없이, 자연스럽고 적당히 풍부하게 읊는다. 화면 속 상대를, 화면 밖 관객을 본인의 페이스로 끌어들인다. 용의자에게 전등을 비추며 체포할 때, 심문하고 놓아줄 때, 시니컬하게 농담을 섞어 비꼴 때, 수사를 지휘하고 지시할 때, 그레이스의 말에는 일정한 리듬이 흐른다. ‘수사물’에서 자주 들리는 빠르고 건조한 성격의 것이다. 허나 깔끔하고 종종 허스키 섞인 목소리로 호탕하게 문장들을 쭈르륵 읊다, 마지막에 씨익 웃거나 쿨한 어조로 재치 있는 단어를 던지는 건, 토니 콜레트만의 리듬이다.  

그레이스 식 말하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욕이다. 용의자의 집을 방문한 후 무표정으로 걸어가다 얼굴 한쪽을 미세하게 찡그리며 던지는 ‘holy fuck’처럼 단독으로 칠 때도 있고, 일상적으로 말 중간에 섞을 때도 있다. D워드, F워드, S워드를 창의적으로 다른 단어들 사이에 끼워 맛깔나게 뱉는데, 자연스러워 때로 비속어임을 잊게 된다. 뉘앙스에 따라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FBI 요원 태넌트에게 확실하고 직설적으로 착착 의사를 전달할 때도, 편안하게 씩 웃으며 적절하게 농담조의 욕을 섞기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지지 않는다. 딱히 무례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그레이스의 입에 밴 욕은, 이렇듯 효율적이다. 딱 들어맞는 번역이 없어 내내 아쉬웠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원어 그대로 듣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사 구성 자체도 토니 콜레트의 언어 연기도 ‘너무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경찰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하자고 한 것도, 그것이 태넌트에게 드러났을 때 나서 언쟁한 것도 그레이스다. 눈을 고정시키는 대신 내리깔거나 굴리고, 언성은 높이지만 일부러 힘을 주지는 않는다. 상대를 이기려는 의도로 싸우는 게 아니라, 본인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캐런에게 ‘왜 저들은 화를 내지 않냐’며 분노할 때도 그렇다. 얼굴을 붉히거나 굵게 내지르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건조하게, 필요한 정도로만 표현한다. 높낮이가 일정하지만 풍부한 억양, 주름, 눈 주변 근육을 사용한다. 마지막 순간 멍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표정이 사악 풀어지며, ‘너 욕했다’고 즐거운 듯 씨익 웃는다. 이렇듯 토니 콜레트는 기습적으로 짧게 그레이스의 매력을 툭 표출해버린다. 전화를 돌리는 와중 남편을 보며 ‘나 사랑하냐’고 묻고는 눈동자를 몰거나, 침대에 누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맥주를 마신다.

그 매력의 포인트를 나는 주름에서 찾았다. 그레이스가, 토니 콜레트가 삶을 겪고 경력과 경험을 쌓으며 생긴 주름. 힘을 주지 않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꾹 다물 때 선명히 드러난다. 주름을 순발력 있게 구겼다 폈다 하면서 풍부하고 독특하게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모든 형태는 너무나 멋지다. 무표정일 때도, 찡그릴 때도, 싱긋 웃는 표정을 만들 때도, 진짜로 웃을 때도. 토니 콜레트의 그레이스 라스무센에게서 최초로, ‘주름이 섹시하다’는 표현 그대로를 실감했다. (일정 나이를 지난 배우들도 많이 좋아하고, 젊지 않아서 더 좋아하는 배우들도 있으나, 주름을 신경 쓰지 않고 매력을 느꼈던 편에 가까웠다. 주름 자체에 눈이 꽂힌 건 토니 콜레트가 처음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캐런을 만날수록, 그레이스의 얼굴은 조금씩 풀어지고, 농담을 건네거나 편하게 웃는다. 물론 처음에도 낯을 가리지는 않았으나, 점점 더 동료로 대한다는 말이다. 캐런이 사건을 조사할 방법을 제안하자, 장난스럽게 “해보자!”라고 의욕 넘치게 말하곤 처음 만났을 때 다른 동료에게 그랬듯 “하!” 하고 웃으며 친근하게 퍽 친다. 캐런은 엷은 미소를 띠며 사선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한다. 두 사람은 대조되면서 어울린다.

소위 이런 ‘쿨한’ 캐릭터는 사과할 때 멋쩍어하거나 괜히 아닌 척 뒤로 빼는 설정이 종종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레이스는 사과도 군더더기 없다. 잠깐 머뭇거리다 손을 휙 날리며 ‘fuck the lord thing’이 미안하다고 깔끔하게 던진다. 짧지만 진심이 담겨 있으며 자연스럽다. 그레이스답다. 캐런 역시 진심으로 말을 받자, 미안한 감정을 질질 끌지 않는다. 장난 섞인 대화가 이어진다. 익살스럽게 키우는 눈, 비음으로 대충 뱉는 ‘alcohol’. 담백한 씨익은 당연히 매력적이다. 진지하게 축 처진 눈으로 차분히 말을 잇는 캐런과, 얼굴 근육을 자유롭게 놀리며 툭툭 던지듯 말을 뱉는 그레이스, 꽤나 길게 이어지는 그 ‘사적인’ 대화는, 주제에서 벗어나지도, 불필요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흥미롭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나, 절대 가볍지 않다. 캐런 듀발과 그레이스 라스무센은, 성격과 방식은 다르지만, 함께 일할 줄도, 대화를 나눌 줄도 아는, 사실은 서로 잘 맞는 동료다. 두 배우는 캐릭터와 작품과 장면을 모두 이해하고 능숙하게 표현하며 매력도 살렸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사건의 막바지, 캐런이 자책하자, 그레이스는 포커를 늘어놓으며 조언을 건넨다. 무게를 잡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툭 던지지만, 충분히 조심스럽고 진정성 있다. 꼰대스럽지도 않다. 캐런이 카드를 붙잡자, 빤히 본다. 왜냐는 물음에, “그냥. 진 할거잖아?” 라고 아무렇지 않게 답한다. 괜히 자리를 깔고 ‘자 고민을 얘기해 봐’ 하지 않고, 편안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카드를 주고받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힘겹게 말을 늘어놓는 캐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그 상태를 유지하다, 캐런이 이기자, 슬며시 웃으며 “Fuck me!”라고 진짜로 억울한 듯 뱉는다. 짐짓 피곤한 듯 얼굴에 힘을 쭉 빼고 발음을 눙치며 마무리한다. 나직하고 간단한 걱정의 말을 덧붙인다. 그레이스 식 치얼업cheerup이다. 기운 낼 것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의 방식을 존중하며 마음을 풀어준다. 그 미묘한 선, 고마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감정적인 의지가 되어 주는 선을 그레이스와 토니 콜레트는 알고 있었다.

함께 해결해 놓고 범인을 혼자 잡게 만들어 성과를 캐런에게 넘기고, 축하 인사받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모르는 체 경과를 묻는다. 그렇게 멋진 미소와 쿨한 어조로 휙휙 지나다니던 그레이스는, 범인을 잡은 후에야, 남편과 편안하게 있다가 울먹인다. 미소를 채 거두기도 전에 참던 울음이 비져 나와, 입이 일그러진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그레이스에 집중하느라 적지 않았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두 개의 타임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3년 전 마리의 말을 믿지 않았던 형사에게 그레이스가 전화를 걸며, 두 타임라인이 합쳐진다. 전화 상에서도 직접 만난 후에도, 필요한 예의를 갖추나 틈을 주지 않는다. 사무적으로(이번에는 정말 사무적이다) 친절하게 대한다. 형사가 사건 파일을 본 후 머뭇거리며 변명하자, 눈을 똑바로 뜨고 말없이 마주 본다. 자책하자, 살짝 돌린다. 판단하지 않는, 비난하거나 격려하지 않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눈길이다. 그가 떠나자 심란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리고, 뒷목을 잡은 채로 걸어간다. 복잡할 것이다. 형사만의 탓은 아닌데 탓이 없다고 하기도 힘들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무턱대고 화를 낼 수도 없다. 나름 설명은 했으나, 내 짐작일 뿐이다. 형사로서 오랜 경력을 쌓은 여성만이 느끼는 특수한 감정도 섞였을 테다. 토니 콜레트의 연기는, 그 복잡성과 특수성을 이해했으며, 전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마저 파악하고 있는 배우의 것이었다. 캐릭터에 공감하는 법도, 공감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부분을 연기하는 법도, 배우마다 다를 것이다. 이 순간 토니 콜레트는 섣불리 내보내지 않고, 안으로 눅히는 방법을 택한 듯하다. 배우로서 돋보이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 조심스러움이 인상적이었다.

그레이스는 허공에 화내는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재판에 불출석한 피해자들을 언급하며 피고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요구한다. 평소의 시니컬이 들어설 자리 없이, 차분하고 진지하게 호소한다. 완전히 다물지 못한 입술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만큼 절실하다. 마침내 판사가 300년이 넘는 형량을 선고하자,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 나게 숨을 내쉰다. 웃음기가 돈다. 기쁨을 굳이 숨기진 않지만, 마냥 티 내지도 않는다. 피해자들의 삶이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감격스러운 듯 고개를 움직이다가 캐런을 보고 조용히 말하는 “Fucking A.”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약간 술에 취해, ‘오늘 아침 난생처음 기도했다’고 고백하며, 캐런에게 내용을 들려준다. F워드가 굉장히 많이 섞인 기도문이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안면 근육을 이리저리 구기며 실감 나게 읊는다. 들떠서 상체를 휘젓고, 눈을 있는 힘껏 키웠다가 가늘게 만들고, 호탕하게 웃는다. 아, 완전히 풀어진 그레이스의 시니컬은 이렇게 유쾌하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 뭔가 진지하게 말하려는 캐런을 막고, 하지 말라며 눈치 빠르게 넘기고는, 캐런이 받아들이자, “Thank you.”와 함께 쿨한 미소를 날리고 휙 가버린다. 그게 그레이스 라스무센 스타일이다. 나중에 마주치면 또 하! 하고 웃고는 욕을 섞어 농담을 던질 거다. 이토록 세상 멋진 인간에 토니 콜레트만큼 어울릴 배우가 있었을까.


그레이스는 말한다, “내가 그렇게 샤이니shiny한 사람이 아닌 건 알아, 그치만 원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토니 콜레트의 연기도 그런 느낌이다. ‘난 내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어. 이게 나니까 좋아할 사람만 좋아해’라는 것 같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레이스도 토니 콜레트도 점점 좋아진다. 그의 연기엔 건조한 마력이 넘쳐흐른다. 쿨하기 때문에 너무나 핫하다. 그리하여 나는, 글을 마치는 지금도 <유전>을 보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아, 봐야겠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Netflix).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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