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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17. 2020

You didn’t see that coming?(2)

아론 테일러 존슨(Aaron Taylor-Johnson)(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2012, 감독: 조 라이트)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고 후회한 기억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읽지 않았다. ‘욕망의 대가를 치르는 여인’ 류 고전은 취향이 아니다. 물론, 읽지 않고 이렇게 뭉뚱그리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허나 판단을 위해 읽어볼 정도의 관심은 가지 않았다. 그러니, <녹터널 애니멀스>를 보지 않았다면, <안나 카레니나>(2012)를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독특한 연기의 다른 표정이 궁금했었다. 그리고 아론 테일러 존슨은 또다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내 호기심을 차고 넘치게 충족시켰다. <안나 카레니나>는,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자꾸만 돌려 보는 (아마도)유일한 작품이 됐다. 역시 원작 있는 시대극인 <앨버트놉스>와는 다른 의미로 굉장했다, 특히 한 인물이. 온전히 아론 테일러 존슨의 알렉세이 브론스키만을 위한 글을 만들어야만 했기에(그리고 너무 길어서), 글을 나눴다.


캐릭터의 매력도 연기도, 차원이 다르게 깊어졌다. 품위 없고 생각 없고 돈 없는 조 맥킨스였던 그가, 러시아 군인 귀족이 되어 나타났다. 좋아하는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아니 ‘내가 당신에게 호감이 있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차에 깔려 죽은 노동자의 가족들에게 돈을 건네는, 목숨 걸고 살 일 없는, 헌데 사랑에 목숨 거는 남자. 알렉세이 브론스키가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공감하긴 힘든데 홀릴 수 밖에 없다. 지금부터 그 겹겹의 콩깍지를 드러내 보도록 하겠다.



<안나 카레니나>(2012)


브론스키 백작은, 등장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대상화된다. 키티가 푹 빠진, 젊고 잘생긴 귀족 장교. 특정 이미지가 떠오른다. 첫 등장에서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등장을 거듭하며 그 이상의 매력을 드러내야 한다. 똑똑하고 ‘정숙한(….)’ 안나의 정신을 흐려 놓을 정도로. 공식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을 연기하기는, 짐작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쁜 얼굴 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타고난 분위기와, 특별한 연기가 필요하다.


첫 등장은 길지 않다. 콘스탄틴이 “Count Bronsky?”하고 불러 세우자, 군인 답게 발꿈치로 휙 돌아 멈춘다. “Yes?”라고 간결하게 답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콘스탄틴이 말문이 막혀 넋을 놓고 응시하자, 의아하고 어이없으나 딱히 궁금하지는 않은 듯, 웃음을 픽 흘리고 미련 없이 다시 휙 돌아 걷는다. 내내 뒷짐은 풀지 않는다. 찰나의 표정이 눈길을 잡는다. 몇 번을 돌려 보게 만든다. 저렇게나 간단한데, 독특할 수가. 그에게만 있는 표현이었다. 약간 삐딱하게 내려쓴 모자 덕에 돋보이는 몽롱하게 푸른 눈. 곧은 자세로 뒷짐을 진 채 빠르고 정확하게 성큼성큼 걷는다. 헌데 여유있다. 속도감 있는 연출과 맞물려 리듬을 이룬다. 목소리가 굵거나 아주 풍부하지는 않은데, 높은 음이 섞인 데다 공기를 많이 넣고 힘을 완전히 주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해, 인물에게 어울리도록 감미롭다.


주인공은 안나, 소재는 안나의 ‘사랑’. 브론스키는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와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으로서 의미 있는 인물이다. 첫 등장 이후, 한 사람에 대한 한결 같은 사랑을 보내면서, 안나와의 관계, 혹은 안나의 심리와 주변 상황에 따라 태도나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 아론 테일러 존슨은, 무거울 수 있었으나 일부러 가벼웠던 조 맥킨스와는 반대로, 가벼울 것 같았으나 사실은 무거웠던 브론스키의 이면을,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게 보여줬다.



<안나 카레니나>(2012)


몇으로 나눠 묘사해 본다. 처음은, 안나에게 반한 후, 서로 끌리는 상태에서 사랑을 구하는 부분이다. 자신과 상대의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장난기는 없으나 긴장감은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 절박하나 비참해지지 않는다. 브론스키는 관심 있는 것은 놓치지 않는다. 이를 테면 안나, 아니 오로지 안나다. 객실 통로를 빠르게 지나가면서도, 안나를 똑바로 응시하여 상대에게도 관객에게도 인상을 남긴다. 소개 받은 후엔 대놓고 빤히 보며 스르륵 몸을 굽혀 손에 키스한다. 눈에 담아 놓으려는 듯 힘주어 치켜뜬다. 키티를 대하는 편안하고 가벼운 수작-이라고 하기도 힘든 몸에 밴 매너-와는 다르다. 길이나 속도와는 상관 없이, 안나를 향한 눈빛은 주위 공기의 흐름을 멈춰버린다.


안나의 집에 찾아와, 위층에 숨어 내려다보는 안나를 발견하고, 올려다본다. 눈을 피하기는 커녕 미동도 않는다.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을 알아’를 넘어, ‘당신도 내게 빠진 것을 알아’라는 메시지를, 눈빛 만으로 전송한다. 모자가 눈을 살짝 가려,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마저 가미해, 모두를 빨아들인다. 분명 상대에게 빠져들었는데, 감정을 숨기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 ‘주체할 수 없음’을 의도적으로 대놓고 표출함으로써, 상대를 오히려 빠져들게 만든다. 그 자신감은, 아론 테일러 존슨의 연기에도 있다.


<안나 카레니나>(2012)


무도회, 키티와 춤추면서도, 눈은 계속 안나를 향한다. 이번에는 잡아먹을 듯,은 아니다. 힘을 빼 간절함이 묻어난다. 키티에게 건네는 ‘아름답다’와, 안나에게 청하는 ‘나와 춤추자’엔 둘 다 힘이 빠져 있지만, 전자엔 영혼이 없고, 후자엔 가득하다. 안나를 볼 때는 보기만 해도 다르다. 안나를 만난 이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에겐 묘하게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프린세스 베치와 의미심장한 대화를 할 때는, 그 영혼 없음을 숨기지 않고, 대화 상대를 보는 대신 대놓고 안나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오히려 솔직한 영혼이 드러난다. 비밀스럽고 귀엽다. 초조한 듯 손가락을 비비고, 빠르게 담배를 한 번 빤 후, 프린세스 베치에게 다가가 담배 연기를 옆으로 내뿜으며 손에 대강 키스한다.  


<안나 카레니나>(2012)


빈틈없이 짜인 연극적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타이밍까지도, 철저한 계산이 엿보인다.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면서도, 그 틀 안에서 본인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아론 테일러 존슨이 내뿜는 연기는, 뇌 속을 꽉 채워 돌려보고 또 돌려 보게 만든다.


가장 많이 돌린 것 중 하나가 이어지는 ‘씨가렛 씬cigarette scene’이다. 불꽃 쇼를 음미하며 천장을 향해 몸을 꺾은 안나를 내려다보는 카메라, 차분하고 정중한데 아득히 유혹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브론스키가 팔을 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내리깐 채 서 있다. 한 손으로 담뱃갑을 열고, 뒤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매너 있게 돌아 똑바로 허공을 보며 성냥을 후 불어 끄고 절도 있게 다시 턴을 해, 안나의 팔꿈치부터 스르륵 쓸어 담배를 자기 손으로 옮겨 입으로 가져간다. 내리깐 눈으로 응시하며 우아하게 맛보고는, 눈은 그대로 둔 채 팔만 움직여 담배를 끈다. 몸을 숙여 안나를 사선으로 치켜떠 보다, 눈을 내리깔아 빠르게 좌우로 굴리고, 다시 도발하듯 휙 치켜뜸과 동시에 질문한다. 길게 묘사해 놓았지만, 순식간에 막힘없이 흐른다. 손끝과 눈이 향하는 방향마저 빈틈 없다. 대사와 맞물려 완벽하게 계산됐다. 계산된 연출의 대표적 예인데, 브론스키가 계산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의도나 노력 없이, 타고난 폼과 상대에 대한 감정이 낳은 계산이다. 아론 테일러 존슨의 매끄러운 연기는 감독이 원하는 톤과 템포를 이루며, 화면에 깔끔한 텐션을 부여한다.


<안나 카레니나>(2012)


계속 내리깐 눈을 안나에게서 떼지 않다가, ‘다신 날 못 볼 수도 있다’고 아주 빠르게 속삭이며 잠깐 사선으로 올려 굴린다. 바로 다시 눈을 맞추자 상대의 마음을 울리는 효과를 낳는다. “Misery or greatest happiness.절망 혹은 최대의 행복이죠.” 라는 결정적인 대사를 뱉자, 비로소 이목구비가 흔들린다. 브론스키는 이미 모든 패를 내놓았다. 갈등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안나와 달리 상대 만을 곧게 바라본다. 따라나와서는, 미간에 주름이 질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눈으로 본다. 답을 듣지 못하자, 울먹이듯 눈과 입을 움직이며 절망적으로 기분이 상한 듯 살짝 거센 동작으로 코트를 입혀 준다. 그 후에도 안나를 계속해서 눈으로 좇는다. 안나가 가지 말라고 순간적으로 외치자, 입이 약간 벌어지고 아주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전히, 눈은 그렁그렁하다. 기뻐하거나 활짝 웃지 않고 절박하게 바라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고, 장면과 캐릭터를 아름답게 만든다. 베치는 “You look desparate, not attractive.너 절박해 보여, 매력적이지 않아.” 라고 했으나, 브론스키의 그렁그렁하고 절박한 눈은, 아, 매력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안나 카레니나>(2012)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유혹당한 것이 아니라, 서로 끌리고 있음을 감지한 브론스키가 먼저 걸음을 뗀 것이다. 결혼한 여성인 안나보다 받을 비난이 적어서, 함께할 미래가 덜 캄캄하게 보여서 이기도 하겠으나, 그리 설명하고 넘기기에, 브론스키는 너무한 남자다. 자신이 누구를 원하는지, 원하는 상대가 자신을 원하는지 아닌지 마저 정확히 알고, 솔직하게 다가간다. 직접적으로, 그러나 선을 넘지 않으며. 그가 지키는 선은, 당시의 윤리에 대한 복종이 아니다. 상대의 감정과 의사에 대한 존중이다. 솔직하고 저돌적으로 다가가면서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고, 답을 받아들이고, 결과에 책임을 진다.  



<안나 카레니나>(2012)


서로의 마음과 태도를 확실히 한 두 사람이 함께하기로 한 이후, 비밀스럽고 짧은 행복이 찾아온다. 안나와 연애하는 브론스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인다. 분명하고 순수한 감정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아론 테일러 존슨의 집중력과 표현력 때문에, 자꾸 ‘세상에서 가장’ 이라는 뻔한 과장을 사용하게 된다.


비현실적으로 하얗게 내리쬐는 햇살, 흰 옷을 입고 숲 속에 누워 있는 안나와 브론스키. 안나가 “I’m damned anyway.어쨌든 난 저주 받았어요.” 라고 자조적으로 툭 던지자, 브론스키는 간단하지만 예상을 깨는 반응을 보인다. 심각하게 위로하거나 기분을 풀어 주는 대신, “I’m not, I’m blessed.난 아니에요. 난 축복 받았어요.”라고 약간의 흥분을 가미해 나른하게 말한다.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기분에 취해 대강 한 답으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다. 브론스키도 다 안다. 장난이나, 진심이다. 짐짓 아무 생각 없는 척 오히려 효과적인 에너지를 주는 고단수의 위로라고 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 곧고 허물없는 말투가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게 된다. 다음 순간 안나의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잡히는, 몽롱한 얼굴까지, 일관성 있다. 아론 테일러 존슨은, 텅 비운 상태로 그 순간의 꽉 찬 행복을 표현한다. 그와 맞닿아 있는 안나에게, 관객에게 전염시킨다. 비극의 징조를 망각하게 한다. 영원의 착각을 제공한다.    


안나와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형에게 화내지는 않으나 차갑고 단호하게 반응하고, 안나의 임신 소식에 마침내! 하는 듯 숨을 뱉곤 기뻐한다. 다른 감정이 끼어들 자리 없이. 안나가 약간 의아하게 살필 정도다. 함께하자고 말하는 입가엔 경건하리 만치 곧고 굳은 결심이 묻어난다. 브론스키는, 극소수의 타고난 사랑꾼 중 하나다. 동력은 솔직하고 분명한 감정, 상대에 대한 한결 같은 존경과 존중. 의심의 여지는 없다.  


<안나 카레니나>(2012)


경마에 참가해 말을 달리는 브론스키는, 몸을 굽히고 얼굴을 찡그린 채 소리를 지른다. 엄청난 집중력, 다른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지만, 몸 바쳐 사랑을 전하는 모습과 겹친다. 카사노바의 미소로 한 사람에게 올인 하고, 노력 따윈 않을 듯한 비주얼로 최선을 다한다. 전형적인 이미지를 깨트린 후엔 전혀 입체적이지 않다는 점이, 바로 카운트 브론스키의 매력이라는 것을, 아론 테일러 존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보다 안정돼 있고 다른 종류지만, 말을 대하는 손길과 눈빛에는, 안나를 대하는 것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존재는 안나와 프루프루 단 둘이라는 스스로의 말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말과 이별하는 상징적인 사건 이후, 틈을 기다리던 절망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프루프루와 함께 쓰러졌다, 일어나, 땀과 눈물에 젖어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맴돈다. “Get up!”. 씹어 뱉는 투박한 발음이 폭력적으로 슬프다. 말의 등이 부러졌다며 진정시키는 동료에게 붙잡혀, 그대로 기대 세상을 잃은 얼굴로 허공을 짧게 응시하다, 곧바로 총을 뽑아 단호하게 발사한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결정은 빠르다. 그 단호함이 더 아프다. 고통을 온 몸에 두르고 있다. 안나와는 관련 없는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다. 절규하는 안나가 사이사이 잡히고, 전체 맥락에서 보면 그 동요를 담는 것이 중요한 장면이었으나, 달리 보면 프루프루와 브론스키의 순간, 안나의 자리는 없었다.


<안나 카레니나>(2012)


관련해 언급할 장면이 있다. 안나와 처음 사랑에 빠진 후 집에 돌아온 브론스키는, 뭔가를 잃어버린 듯 공허하고, 피곤해 보인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서, 사랑에 빠진 자의 심란함이 엿보인다. 브론스키에겐 안나에 대한 사랑 외에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낼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또한 안나와 관련된 감정을 바탕으로 한 부분이나, 그 이상의 복잡함이 묻어난다. 이런 짧은 순간들을, 아론 테일러 존슨은 탁월하게 활용한다. 자신에게만 있는 표정으로, 브론스키의 서사와 내면을 더 알고 싶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2012)


안나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브론스키의 마음도 무너진다. 편지를 받고 안나를 찾아간 브론스키는 카레닌과 마주친 상황에 대해 언성을 높인다. 허나 절제해 이성적으로, 문제를 제기(그렇게 느껴졌다)한다. 그의 곧은 사랑은, 적당량의 자기애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잠깐 엿볼 수 있다. 허나 분노는 곧 슬픔으로 바뀐다. 안나의 불안정한 상태를 알아챈, 사랑하는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 그는 세상에서 가장 슬퍼 보인다. 화를 내거나 설득하지도,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않고, 다만 애처롭게 응시한다.


자기 아이를 낳은, 자신을 보지 않는 안나를 보고, 조용히 밖에 기대 있던 브론스키는, 차분하게 타이르는 카레닌의 말에 한 마디도 답하지 못한다. 눈도 피하지 못하고 그렁그렁 동그랗게 뜨고 있다, 마침내 견디기 힘든 듯 꽉 감고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며 카레닌의 가슴에 머리를 퍽 기댄다. 이상하게 설득력 있는 제스처다. 애매하고 어색하고 부끄럽고 슬프고 무기력할 테다. 자신의 마음은 단순한데,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의지대로 되지 않는, 복잡하게 절망적인 그 감정을, 어두운 옆모습만 으로 아론 테일러 존슨은 드러낸다.


<안나 카레니나>(2012)


이어지는 화면, 그의 엄마는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고, 브론스키는 옆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역시 옆모습만 보인다. 비난을 듣고 하는 “I would like you to go mama.가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의기소침한, 한참 울고 난 후 목이 나간, 여리고 힘 없는, 축축하게 가라앉은 소리다. 살짝 뜬 ‘mama’의 끝에 있는 빈 공간은 허무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엄마의 비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늘진 얼굴이 정면으로 잡힌다. 내리깔아 약간만 보이는 촉촉한 눈동자는 공허하고, 멍하게 침을 삼키는 입가엔 울음이 남아 있다. 세상을 잃은 사람의 것이다. 그의 절망은 엄마의 말처럼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한 수치심과 망가진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다. 떳떳하지 못함은 오로지 카레닌 앞에서만.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기운이 없어서, 말하면 울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받는 고통을 목격했고, 사랑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2012)



이 시점부터, 그에게 남은 것은 행복을 덮는 절망이다. 안나와 헤어지던 시기처럼 휘몰아치기보단 일상적인 우울과 피로를 유발하는, 더 묵직하고 전반적인 종류다. 결국 안나와 결혼하기로는 하지만, 이혼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무너지는 안나를 걱정하고, 달래고, 자신 대신 안나에게 집중되는 비난을 잠재우려 노력하며 온갖 심란함에 휩싸인다.


무도회에 참석한 브론스키는 전처럼 빠르고 정확한 걸음으로 돌아다니지만, 여유가 없다. 불안하게 뜬 눈으로 다급하게 두리번거리는 와중, 폼과 태도는 유지하며, 안나가 고립되는 것을 막으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 허나 고리타분하고 남 비난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이 움직이지 않자, 잠깐 자제력을 잃는다. 예의 매력적인 미소를 띤 채 무릎을 꿇고 있다가, 갑자기 상체를 떨며 이를 악물고 뱉는다, “For god sake! Anna isn’t a criminal!빌어먹을! 안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먼저 시선을 피하는 건 상대, 브론스키는 ‘위선자들아 두고보자’라는 듯 잠시 눈빛을 쏘고 나서야 절도 있게 일어나 휙 돈다. 단호한데 생기 없다. 눈빛은 강렬한데 탁하다. 지쳐 있다. 안타깝게도, 안나를 보는 얼굴도 그렇다. 고립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변해 가는 안나를 변함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브론스키는 걱정과 피로만 는다.


<안나 카레니나>(2012)


가장 괴로운 것은 아마도, 안나가 그가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것일 게다. 떠나자고 하다, 의심하다, 사과하는, 불안한 안나를 보며 브론스키는 불안해한다. 상대에게서 떼지 못하는 눈은 어쩐지, 초반 안나가 자신을 거부하던 때와 닮아 있다. 절박하게 확장돼 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할게요’라는 얼굴은 또,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다. “Don’t ask why about love.사랑에 이유를 묻지 말아요.”란 흔한 문구도, 브론스키가 하면 다르다. 속속들이 진심이 있어 눈물 난다.


<안나 카레니나>(2012)


또다시 언성을 높이는 안나에게 애써 설명하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절제하려는 듯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눈물 고인 눈을 똑바로 들어 응시한다. 모자를 든 손과 눈빛의 방향이 같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꼭 마지막 화해의 제스처 같은, ‘나한테 할 말 없냐’를, 꽉 쥔 모자와 함께 건네는 듯하다. 눈을 고정 시키며 함께 정지시켰다가, 안나가 답하지 않자 살짝 위로 올려 허공에서 떨리도록 움직인다. 몸통은 돌리면서도 손은 상처 가득한 눈과 함께 잠깐 그대로 정처 없이 머물렀다가, 방을 나가면서, 모자를 든 쪽 팔에 재킷을 휙 걸친다. 복잡한 슬픔과 화를 억누르고 있음이 느껴진다. 밖으로 나가 소로키나의 손에 키스하고, 안나에게 다시 돌아와, 상황을 설명한다. 방금 전과 달리 누그러진, 축 처진 눈과 힘 빠진 목소리다. 지쳐 다 포기한 것 같기도 하다. 끝에 남기는 ‘안나’는, 처절하고 차분하게 흔들린다.  


<안나 카레니나>(2012)


아론 테일러 존슨의 흰 피부는, 때때로 미세하게 붉어진다. 특히 눈 주위, 콧등과 위쪽 뺨이 그렇다. 분장의 역할도 있을 수 있겠으나, 공기의 온도와 더불어 마음의 온도도 투명하게 드러낸다. 안나에 이입해 덩달아 의심이 피어올랐다가, 그 온도, 그리고 물기 가득한 눈을 보는 순간 깨닫는다. 안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눈은 한 곳 만을 향했고, 그 방향은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었음을. 분명히, 소로키나를 대하는 태도엔 그 때 키티에 대한 것처럼 영혼이 없었다. 이쯤 되면 너무나 속상하다. 안나가 충분히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차에 몸을 던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지, 저 눈에 저렇게 분명한 사랑이 가득한데. 아론 테일러 존슨이 너무도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데.


결말을 장식하는 것은 알렉세이 브론스키가 아닌 알렉세이 카레닌, 브론스키에겐 애도하는 장면도 주어지지 않는다. 안나가 죽기 직전 무언가의 예감 때문이었는지 몸을 휙 돌리는 찰나가 마지막이다. 그러나 나는 자꾸 작품이 담지 않은 브론스키를 상상하게 된다. 자신의 말 ‘misery or greatest happiness’가, misery로 실현됐다. 원작을 읽지 않아 그의 미래가 어떻게 그려지는지, 나오기는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영화 속 아론 테일러 존슨의 브론스키라면, 평생 스스로를 저주하며 홀로, 죽지 못하고 지낼 것 같다. 단, 폼은 유지하면서.  


<안나 카레니나>(2012)



아론 테일러 존슨도 사실, 유명한 사랑꾼이다. <노웨어 보이>(2009)를 함께한 감독 샘 테일러 존슨과 결혼했고, 공동 작업도 이어가고 있다. 브론스키를 쓰며 캐릭터의 사랑과 배우의 사랑을 엮자는 구성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나, 너무나 오그라들어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었다. 아니 그런데 말이지, 진짜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 정도의 연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슬며시 든다. 언제적 가부장제 관습으로 와이프가 허스번드의 성을 따를 순 없었는데, 똑같이는 하고 싶어서 ‘Taylor-Johnson’이란 성을 만들어 낸 이 커플. 아름다운 사랑과는 별개로, 함께 한 작업물이 좋은 평가를 얻어내고 있지는 못하지만(사실 직접 본 건 지방시 광고밖에 없다), 아티스틱 파트너로서의 두 사람을 좀 더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아론 테일러 존슨 만큼은 믿을 만한, 아니 믿기지 않는, 예상치 못한 연기를 창조해내니까. 어디서 피에트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You didn’t see that coming?”


* “You didn’t see that coming?”: 자막엔 “왜, 이건 예상치 못했어요?”로 번역돼 있어, 내가 설정한 키워드와 일치하지만,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고 싶어 일부러 그냥 뒀다.


<안나 카레니나>(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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