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없이 흘러가는] 편집위원 퓨
얼마 전, 광고가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서 아빠가 대뜸 물었다. 너도 메타버스 하니? 아빠 내 주변에서 그거 한다는 사람 한 번도 본 적 없어….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어쩌니 하는 것들이 질린다는 데 백번 동의한다. 새삼스럽다는 말은 필요도 없다. 4차 산업혁명, 유비쿼터스, 버추얼 리얼리티… 모두가 열광하고는 있는데 세상 어디에도 똑바로 달라붙지 못하는 그런 이질적인 단어 한두 개쯤은 늘 우리 삶 언저리를 떠돌고 있었으니까. 이런 미래적인 명명은 매번 다른 곳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구체적으로 따져물을 수 없도록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고, 현재와는 완전히 단절된 무책임한 유토피아의 환상을 자극해 실현 불가능한 미래를 멀뚱멀뚱 기다리게 하며, 무엇보다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이것만이 진짜 현실이자 곧 다가올 미래인 것처럼 대중의 대세감을 자극한다. 너도나도 관련 사업에 뛰어들거나 투자를 한다. 상업광고와 사기업은 물론 공공의 목적을 띤 프로그램들마저 유행어를 호명한다. 멀쩡히 잘 살던 개인은 느닷없이 나타난 새로운 용어에 어리둥절해 한다. 말하자면 메타버스 같은 간편하고 피상적인 말 앞에서 모두가 래거드가 되는 것이다. 하나로 묶긴 어렵지만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는, 디지털의 무언가를 지칭하는 그 단어들이 피곤하고 또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지점은 그에 대한 대항 담론 역시 늘 비슷한 형태로 존재해왔다는 건데, 그 내용은 대개 ‘현실과는 동떨어진 가상이나 디지털 세계에 몰두하는 일은 그만두고 진짜 삶과 진정한 일상을 회복하자!’ 정도의 메시지로 일축될 수 있다. 가령 사회심리학자 셰리 터클(Turkle, 2011/2012)은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허용한 상시적 접속 상태와 멀티태스킹 등이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인간적 대화와 접촉을 가로막는다는 논지의 비판을 전개해왔다. 또 미디어 정치경제학자 빈센트 모스코(Mosco, 2017)는 저서 <Becoming Digital>에서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분석, 사물인터넷이라는 세 가지 차세대 인터넷 기술의 융합 양상과 그것이 불러올 영향을 다방면에서 들여다본 후, 디지털 기술의 부작용에 맞서는 한 가지 대안적 움직임으로 ‘아날로그’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언급한 바 있다. 네트워크 사회론을 주창한 카스텔(Castells, 2000/2003)은 또 어떤가. 그는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흐름의 공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장소의 공간’을 제시하고 거대 네트워크에 편입되지 못한 파편화된 개인의 서사나 자아의 기반을 아날로그적 일상의 자리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런 접근들 앞에서도 메타버스 같은 허황된 단어를 볼 때와 비슷한 종류의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다. 그건 아마 디지털과 아날로그 중 어느 한쪽에만 파고들거나 둘을 대비시키는 모든 편협한 담론이 내가 살아가고 경험하는 진짜 현실을 설명하는 데 별로 유용하지 못하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헛된 미래를 주입하는 용어도 질리지만, 이미 모두가 발붙인 디지털과 미디어 시스템을 단번에 벗어던질 수 있는 양, 그것이 완전한 해악의 공간인 양 구는 태도도 똑같이 우습다. 디지털은 가짜가 아니다. 0과 1의 그물은 실재한다. 가상(假像)은 잘못된 꼬리표다. 여느 현대인이 그렇듯 디지털과 아날로그 모두에 정체성을 걸치고 있는 내가 얼마나 그런 인식틀에 진절머리가 났냐면… 이 이야기로 시작해보는 게 좋겠다.
<걷기의 인문학>은 최근에 읽은 가장 흥미로운 책 중 하나로, 저자 리베카 솔닛(Solnit, 2001/2017)은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행위로 ‘걷기’라는 키워드에 주목하고 책을 통해 그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이를테면 단순한 산책부터 이족보행의 역사, 순례로서의 걷기, 혁명과 축제와 행진의 걷기, 여성의 걷기, 문학 속 걷기, 도시에서 걷기, 심지어는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서 걷기… 무척이나 두꺼운 책인데도 종이가 넘어가는 걸 아까워할 지경으로 매 페이지에서 감탄했고, 이걸 읽는 내내 나는 솔닛이 나보다 먼저 이런 멋지고 획기적인 주제를 발견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해버린 것에 엄청난 질투를 느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아는 모든 종류의 걷기를 다루는 이 책이 정작 ‘나의’ 걷기에 관해서는 조금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초반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책이나 컴퓨터 안에서 돌아다니는 일은 한정적이고 덜 감각적이다.” (27쪽)
그렇다. 저자는 처음부터 디지털의 영역을 외면해버렸다. 걷기는 당연히 온전한 신체적 행위인데 디지털이 뭐가 중요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미디어학도인 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그냥 멋대로 하는 주장이 아니다. 정말로 디지털적인 요소가 포함되지 않은 걷기는 오늘날 어디서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2001년의 솔닛은 2022년의 내가 어느 공간을 걷든 네이버 지도를 끊임없이 흘끔거리고, 에어팟을 귀에 꽂은 채 스포티파이 스트리밍을 통해 걷는 동시에 음악을 들으며, 길가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것들을 직접 다가가 들여다보기보다는 온라인에 먼저 검색하는 습관을 갖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하게 된다. 시대의 한계로 솔닛이 다루지 못한 유일한 걷기인 ‘디지털-걷기’만큼은 내가 먼저 써버리자!
요컨대 나는 지금 나의 일상과 우리의 삶을 요만큼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동떨어져 있는 모든 종류의 유행과 담론과 학문적 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고, 그 중 만만해 보이면서도 가장 탐이 나는 하나를 빼앗아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방금 공공연히 밝혀버렸다.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바라는 건 간단하다. 미래에 대세가 될 기술을 멋대로 정해놓고 모두를 현혹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용어도, 존재한 적도 없고 그래서 돌아갈 수도 없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해 또 다른 환상을 만드는 기획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옆에서 나의 현재와 발맞추어 걸으며 함께 다음을 내다봐줄, 현실성 있는 설명과 신중한 상상력. 그러니까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세상을 탈맥락적으로 설명하는 데 매몰된 피곤한 전망들은 옆에 벗어놓고 일단은 평소에 걷듯이 좀 같이 걸어 보자. 나는 여기서 출발하려고 한다.
나는 집에서 좀처럼 뭘 못 하는 사람이다. 공부를 하든 글을 쓰든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면 다른 공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 내게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 적당히 조용하고 인테리어가 너무 하얗지 않은 데다 커피와 디저트까지 맛있는 카페는 가장 훌륭한 작업공간이고, 이번 겨울 동안에는 곳곳을 걸어다니며 그런 장소들의 리스트를 수집하는 내 나름의 탐험을 해왔다. 험난하고 혼잡한 2022년의 서울에서 성공적인 탐험을 해내기 위해 그동안 터득한 몇 가지의 당연하고도 간단한 팁이 있는데, 잠시 그것들을 나열해볼까 한다. 첫째, 지도 앱 방문자 리뷰가 이삼백 개를 넘어선 곳이나 트위터에서 한 번이라도 RT가 돈 장소는 이미 너무 유명해진 카페이므로 웬만하면 작업을 목적으로 방문하지 말 것. 둘째, 지도 앱에 등록된 영업 요일은 정확하지 않고 자주 예외가 발생하니 꼭 인스타그램을 확인할 것. 셋째, 여러 개의 해시태그와 위치 정보가 달려 있는 게시물보다는 일상글에 괜찮은 카페를 지나가듯 언급하는 사람들의 블로그 포스팅을 눈여겨볼 것. 넷째, 철저한 조사를 거쳤음에도 넓지 않은 카페라면 내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니 꼭 근처의 다른 카페를 찾아 2안을 마련해둘 것.
사전 준비가 끝났다면 출발할 일만 남았다. 원하는 목적지가 있을 때 지도를 보는 것은 당연한 절차이며, 걷기만 하는 건 다소 무료하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헤드셋이나 이어폰은 꼭 챙겨야 한다. 잊지 말고 날씨도 검색해두자. 눈치챘겠지만, 구체적인 오프라인 장소에의 도달을 목표로 하는 탐험가가 여정을 떠날 때 명심해야 할 것들은 모두 디지털 공간과 엮여 있다. 단순히 카페를 찾는 과정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사파리, 인터넷 익스플로러… 유명한 웹 브라우저 이름들을 떠올려보라. 우리의 걷기는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솔닛(2001/2017)은 도구와 기계가 세계로 연장된 육체, 곧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라는 스캐리의 주장을 의외의 영역으로 가져와 “길을 걷는 일 그 자체는 마치 몸을 연장하는 도구처럼 세계로 열린다”(56쪽)는 통찰을 펼치지만, 길보다 먼저 떠오르는 육체의 연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디지털미디어와 인터넷 쪽이다. 커뮤니케이션 전공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마샬 매클루언의 유명한 인용구도 있잖은가. ‘미디어는 몸의 확장이다.’
내가 왜 굳이 귀찮은 탐색과 걷기의 과정을 거쳐 카페라는 공간에 도달해야만 무언갈 할 수 있는지는 나보다 이들이 더 잘 설명해줄 것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도시 사회학자였던 앙리 르페브르(Lefebvre, 1974/2011)는 언젠가 그렇게 적었다.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공간을 바꿔야 한다”(288쪽). 솔닛(2001/2017)도 그와 비슷한 문장을 쓴 적 있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32쪽). 현대의 일본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2014/2016)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바꿔라”(7쪽)라고 말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개인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통해 발견하고자 하는 새로운 삶, 생각, 가능성이 ‘새로운 검색어’로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이 황당한 비약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한 자유의 시대를 누리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세계를 손에 쥔 거대 빅테크 기업들이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의 활동 데이터를 축적하며 개인화된 알고리즘이나 맞춤형 추천 서비스와 같은 허울좋은 술수로 우리가 보는 세계를 점점 좁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없게도 세상의 모든 요소는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변모했고, 여기 포섭된 개인들은 전부 그 자체로 상품이 됐다. 아즈마는 그렇게 통계와 정보에 포섭된 우리의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 틀에 박힌 일상의 ‘환경’과 ‘장소’를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와 다른 자리에서 새로운 시각, 새로운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는 개인은 온라인에서도 이전과 다른 수행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번도 관심을 둔 적 없는 키워드를 검색하고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는 정보 사이를 여행하면서. 그동안 스스로 쌓아온 활동 데이터의 일관적인 패턴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으면서.
길과 장소에 더 잘 몰입하기 위해 디지털을 활용하기. 디지털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길과 장소에 몰입하기. 아즈마가 일상을 드라마틱하게 바꾸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관광’이지만, 지긋지긋한 팬데믹 시대를 견뎌내고 있는 나에게는 그저 바깥에 나가 걷고 집과는 다른 공간에 머무르는 시간만으로도 비일상, 또는 새로운 일상의 도모가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솔닛(2001/2017) 또한 보행이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으로 편입하는 ‘느긋한 관광’과도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즈마의 통찰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그가 오프라인에의 관심이 온라인에서의 행위를 축소한다거나 온라인 공간을 향한 몰두가 오프라인을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식의 이분법적 대립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자의적으로 분리된 세계가 아니다. 세상을 더 잘 살피며 걸어다니는 사람이 될수록 검색에도 더 능숙한 사람이 된다. 탐험가는 어디서든 탐험가이고, 관광객은 어디서든 관광객이니까. 설령 그 루트가 연속적인 세계와 0과 1로 분절된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시 걷던 길로 돌아오자. 어쩌면 이제는 하나가 된, 또는 처음부터 하나였을지도 모르는 두 공간을 뒤섞어가며 도달한 카페에서는 어김없이 책을 읽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겨울을 보내는 동안 우연히 <걷기의 인문학> 말고도 걷기나 산책, 조금 더 나아가 구체적인 공간과 장소를 말하는 책들을 자주 만난 것 같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의 일상적 걷기에 대한 생각도 자주 하게 됐는데, 이 모든 유기적인 과정을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돌아다닌 날이면 종종 카페와 독서와 걷기에 대한 일기를 블로그에 남겼다. 평소보다 자주 포스팅을 하다가 나는 내가 그렇게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질리지도 않고 글자로 쏟아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데 한 번 놀랐고, 그렇게 남겨둔 사유의 과정이 꼭 내가 걷는 경로처럼 연속적이고 구불구불하고 시끄럽다는 데 두 번 놀랐다. 걷기 일기에 습관을 들이자 어느 순간부터는 걷는 도중에도 이 얘기 꼭 일기에 적어야지,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서로를 보완하고 반영하며 동시에 발전하는 두 걷기의 무한한 랠리… 한때 솔닛(2001/2017)은 루소나 키르케고르를 포함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예를 들며 보행과 산책이 사색, 사유, 성찰, 글쓰기의 무궁무진한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지금, 오프(-온)라인 걷기에서 발생한 내 경험이라는 동력은 이제 꿈틀거리는 온라인 텍스트로 변환되어 네트워크 속 노드와 링크를 자유로이 떠돌고 있다.
나의 걷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기 전까지 나는 주로 땅 쪽을 보며 걷는 편이었다. 비스듬히 아래를 향하는 시선이 얼마나 익숙했는지, 길에서 아는 사람과 소매를 스쳐도 못 본 채 지나가기 일쑤인 것은 물론이요, 운전면허 시험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워했던 게 눈을 들어 신호등을 확인하는 거였다면 말 다 한 거다. 하지만 솔닛을 만난 이번 겨울을 기점으로 나는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내가-걷는다는 감각과 함께 고개를 들고 걸을 땐 본 적 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몰랐던 것들을 새삼 알게 되기도 한다. 예컨대 평생을 서울에서 산 나는 이태원 말고도 남산타워가 잘 보이는 장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자주 다니던 거리에서 건물 사이로 우뚝 선 타워와 눈이 마주치면 반가우면서도 낯선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니까… 걷기에 대한 단순한 인식의 변화만으로도 한 사람의 세계는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둘러보며 걷는 법을 몰랐던 사람의 세계가 그동안 낭비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쪽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의 노력을 투입해 최대한의 결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효율성의 가치는 지본주의 시장논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함께 과대평가되어온 면이 있다. 수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도시계획이나 공간 기획의 몰인격성은 대개 그놈의 ‘효율성’에 매몰된 결과이다. 구획에 용이한 구조, 최단거리를 위해 설계된 동선, 특정 목적에 따라 위치 지어진 구성물 등 가시적 공간 배후에 숨겨진 의도 속에서 개인들은 실제로 장소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삶을 꾸려가는 다양한 존재로 인식되는 대신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인 공산품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효율성의 추구 자체에 반기를 드는 그동안의 비판들이 그다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그간의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 비판들을 계승하는 것은 어떨까? 이를테면, 효율성의 의미를 비트는 방식으로. 이 자리를 빌려 과감히 제안해본다. 낭비되던 세계와 경관을 생산적 영역으로 가져와 효율성을 추구하자. 근시안적 목표 뒤에 가려졌던 공간의 가능성을 발굴해 최대한의 결과를 얻어내자.
마침 적절한 예시가 있다. 서울스퀘어와 남대문경찰서 건물 옆으로 뾰족이 선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서울역광장 계단을 내려갔던 겨울 초입의 어느 날. 나는 좋아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의 신작이 전시된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은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의 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구(舊)서울역사에 방문했다. 그날 관람한 전시 제목은 ‘제2회 가상정거장’으로, 물리적 장소들을 잇던 서울역이라는 공간에서 이제는 현실과 가상, 물질과 비물질을 넘나드는 확장적 공간들을 연결할 비평적 사유를 모색한다는 취지로 기획된 공공예술 프로젝트였다. 빔프로젝터를 통해 벽에 상영되는 영상, HMD 기기로 감상하는 VR비디오, 여러 개의 스피커 장치를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된 사운드스케이프, 곳곳에 자리한 다양한 형식의 미디어 작품들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단연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옛 기차역 그 자체였다. 재생(play)되는 작품들과 함께 다시금 재생(recycle)되는 정거장, 오랜 공간의 역사(歷史) 위에 덧씌워지는 현재의 역사(驛舍), 그 속을 어지럽고 무질서하게 걸을 때 쌓이는 나의 발자취와 기억. 본래 전시장을 목적으로 설계된 장소가 아니기에 모든 방을 샅샅이 훑기 좋은 효과적 동선 같은 것이 고려되었을 리 없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걷는 행위에 주목할 때 세계가 훨씬 풍부해지는 마법은 물리 공간과 전자 공간이 중첩되는 전시의 한복판에서도 작동했다. 대합실 벽면에 영사되고 있었던 <에란겔: (불)가능한 공동체>는 제1회 가상정거장에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 <에란겔: 다크투어>의 편집 비디오인데, 이 작품은 걷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디지털 공간에서 낭비되던 수많은 정경과 그로부터 나올 수 있었을 죽은 사유의 가능성에도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제목의 ‘에란겔’은 온라인 슈팅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맵으로, 여러 지형지물로 가득한 공간에 던져진 100명의 유저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이 게임에서 초원, 사막, 설원 등 다양한 콘셉트로 꾸며진 거대 게임 맵은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된다. <에란겔: 다크투어>는 바로 학살과 경쟁이라는 이 공간의 본래 목적을 깨부수기 위한 시도였다. 프로젝트 주최자들과 투어 참여자들은 함께 게임에 접속하고, 총을 비롯한 전투 아이템을 파밍해 서로를 공격하는 대신 방대한 초원 맵을 그냥 함께 ‘걷는다’. 이 이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공동체의 짧은 여행은 살육의 공간을 연대의 공간으로 재전유(再專有)하는 발걸음이자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다크 투어리즘이며, 어느 측면에서는 그저 가벼운 산책이다.
전쟁터가 산책로가 될 때, 오로지 적을 죽이기 위해 마련되어 있던 게임 공간의 모든 요소들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활용된다. 숨기 좋게 만들어진 다양한 구조물과 건축물들은 낱낱이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 관광지로, 총소리나 발소리 등으로 적의 방향과 위치를 가늠케 해주던 정교한 사운드 시스템은 여유로운 산책의 그럴듯한 배경소음으로, 빨리 뛰거나 살금살금 걷거나 엎드려 나아가는 기능은 디지털 공간 내에서의 감각적 경험을 돕는 몸짓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총을 겨누지 않으리라는 공동체의 느슨한 신뢰 속에서 쉼 없이 걷는 이들은 이전까지 누려본 적 없는 초원의 호젓한 경치와 고요한 발소리를 한껏 만끽한다. 그 한가운데서 투어를 이끌던 주최자가 말한다. “사실 저는 이걸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배틀그라운드에 새가 있는지.” 게임의 목적에 충실했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버린 풍경은 사실 늘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화면에 출력되지도 않는 숨은 적을 찾느라 눈만 들면 펼쳐지는 하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르페브르(1974/2011)의 이론적 틀을 빌리자면 사회적 공간의 본질은 ‘생산’인데, 이때의 생산은 철저히 계량되고 예측된 공간에서 발생하는 결과만을 말하지 않는다. 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공간은 구체적인 존재들의 만남, 관계, 수행, 실천을 생산하는 배경이다. 그리고 공간 역시 그러한 생산물들이 뒤얽히면서 매 순간 의미가 갱신되는 생산물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공간의 ‘효율성’은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우연히 마주치며 만들어내는 다색의 에너지야말로 우리가 공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결과이고, 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필요한 건 힘든 노동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원해서 이어가는 나의 걷기면 충분하다. 플러스가 플러스를 낳는 이 묘한 메커니즘. 한 가지 강조할 점은 때로 걷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를 통한 세계의 확장이 디지털 공간과 연계된 새로운 수행을 통해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세계를 아깝게 탕진하는 주범으로 걷는 와중에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현대인들을 호명하고 스몸비 같은 자조적 이름을 붙이는 것은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중요한 건 ‘걷기’에 대한 의식이지, 상시적으로 공존하는 두 세계의 대립이 아니다. 예스-디지털이나 노-디지털은 버릴 것. 이제는 어떻게 테크놀로지가 물리적 몸을 에워싼 장면들을 통한 오프라인 장소에의 접속과 손에 든 작은 기기를 통한 사이버스페이스에의 접속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로써 우리 삶을 풍부하게 꾸려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디지털 기기 몇 개만 빼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 만큼 텅 비어 있었음에도, 낭비되는 세계 따위 없었던 옛 서울역사처럼. 확장현실이란 이런 것이다.
<에란겔: 다크투어> 프로젝트는 ‘함께 걷는’ 행위를 통해 게임의 룰에 저항하고 연대를 만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거리 행진이나 시위를 연상케 한다. 디지털-시위! 이렇게 쓰고 보니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18년작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일상의 대부분을 ‘오아시스’라는 온라인 게임 공간에서 수행하게 된 인류를 그려내며 그야말로 ‘메타버스’와 같은 미래적 풍경의 단면을 보여준다. 오아시스의 개발자 할리데이는 자신이 게임 속에 숨겨둔 세 가지 퀘스트를 완수하는 플레이어에게 오아시스 소유권과 재산을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주인공 웨이드는 친구들과 함께 차근차근 할리데이의 미션을 풀어나간다. 인상적인 것은 영화의 클라이막스 씬인데, 오아시스를 손에 넣고자 온-오프라인에서의 끔찍한 범죄마저 감수하는 거대 기업 IOI의 횡포를 막기 위해 수많은 유저들이 전쟁을 벌이는 이 장면에서는 게임 속 전장을 달리는 아바타들과 그 아바타를 조종하기 위해 현실 공간에서 실제로 달리는 사람들이 교차 제시된다.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구축되는 평범한 자들의 전투, 혁명, 시위가 오프라인에서 걷고 뛰는 같은 종류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더욱 단단한 연대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의 장엄하고도 감동적인 투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내가 맞닥뜨린 건 질리도록 봐온 뻔한 엔딩이었다. 영화는 오아시스의 소유자가 된 웨이드가 일주일에 이틀은 오아시스를 닫겠다고 결정하는 결말과 함께 막을 내린다.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에의 지나친 몰두를 멈추고 ‘현실’의 삶에도 집중하라고. 산뜻한 해피엔딩인 양 묘사된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누구보다 오아시스라는 환경을 아끼고 사랑해서 기꺼이 걷기에 동참했던 존재들이 끝끝내 마주한 것이 오아시스 생활의 박탈이라니! 이 맥빠지는 결말이 안겨준 두 가지 감정을 굳이 설명해야 알까. 결국 룰을 좌지우지할 권력을 지닌 세력에 의해 한 공간과 세계가 특정한 방향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데서 나오는 씁쓸함과, 디지털이 삶을 장악한 시대를 그려내는 이들조차 디지털을 비현실의 지위에 올려두는 얄팍한 상상력밖에 발휘할 줄 몰랐음을 확인하는 데서 나오는 실망감. 얼마든지 입체적인 형태로 삶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던 디지털 행동의 가능성은 대중문화의 무의식 속에서 억압되며 한없이 납작한 이미지로만 남았다.
연대하는 존재들이 함께 걸을 때 발생하는 가슴 설레는 에너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넘나들며 지속되는 나의 현실에서 분명히 약동하고 있으며, 지속 가능한 우리의 현실을 만드는 데 막대한 힘을 보탠다. 2020년 6월과 2021년 6월, 바이러스가 가로막은 오프라인 광장에서의 행동이 온라인 광장으로 임포트되는 모습을 우리는 두 번이나 목격하지 않았는가. 마이너리티 가시화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미디어 단체 닷페이스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이 온라인 퀴어퍼레이드는 내게 디지털-시위의 실질적 가능성을 엿보게 해준 경험이다. 시위에 참여하려는 이들은 닷페이스 웹사이트에서 입고 싶은 옷, 원하는 헤어스타일, 들고 싶은 플래그나 강조하고 싶은 슬로건 등을 선택해 도로 위에 선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해시태그 및 자동 생성된 대체텍스트와 함께 자기 SNS에 업로드하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한때 서울광장을 뒤덮었던 축제와 행진의 기억이 0과 1의 형태로 보존되고 발전하는 이 장면에 나의 발걸음을 보탰다.
정체성 투쟁을 위한 시위가 기본적으로 함께 거리를 걷는 형태를 띤다는 데에는 큰 함의가 있다. 첫째는 발맞추어 걷는 행위가 동질감과 유대, 연대의식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고, 둘째는 시간이 지나며 확장되는 도시 공간의 점유가 그 자체로 가시화 전략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같은 곳을 향하는 물결 속에서 혐오세력 앞을 떠들썩하게 지나가본 이들이라면 그 짜릿한 감각을 모를 수가 없다. 여름의 열기와 시위의 현장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점만 감안하면 내가 지켜본 온라인 퀴어퍼레이드 역시 꽤 훌륭하게 걷기의 중요 요소들을 지켜내며 광장의 이미지를 계승했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평소 손가락 몇 번 두드렸을 뿐인데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기분을 내준다는 이유로 온라인 기반의 여러 캠페인 활동에 회의적인 사람이다. 그런 내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나의 퍼레이드 이미지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이유는 명확했다. 걷기에 참여하는 단순한 행동을 통해 시위대의 목소리 증폭에 즉각적인 영향을 줄 수 있듯, 내 포스팅 하나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디지털 도로가 더 많은 곳을 향해 뻗어나가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 선언은 덤이다. 견딜 수 없는 팔로워들은 하루빨리 나를 떠나고, 내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일 생각은 당장에 집어치워라, 하는. 길거리와 광장, 그리고 타임라인에 모습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존중은 하는데 내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발언이나 왜 그렇게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냐는 발언을 서슴없이 댓글로 남기고 다니는 자들을 한 방 먹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신기한 것은 또 있다. 나는 종종 해시태그나 하이퍼링크 같은 디지털 텍스트 고유의 문법이 걷기와 몹시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기능들이 유동적인 사유와 관심의 흐름을 즉각적으로 연결하고, 맞닿아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데 그 무엇보다 유용하기 때문이다. 솔닛(2001/2017) 말마따나 보행이라는 비분석적이고 즉흥적인 행위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비체계적, 연상적 유형의 사유가 아니겠는가. 비유하건대 이 파란 글자들은 일종의 길이다. 온라인 퀴어퍼레이드는 도로 위를 행진하는 캐릭터 이미지를 통해 걷기를 표면적으로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의 당연하고도 익숙한 기능을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시위를 걷기와 한층 가까운 형태로 발전시켰다. #우리는없던길도만들지, #우리는어디서든길을열지 해시태그는 퍼레이드 한복판으로 향하는 길이자 메타적인 의미의 디지털-텍스트-도로였다. 파편적인 개인의 걸음들이 모여 거대한 하나의 내러티브가 완성되는 광장. 나는 여기서 #Metoo, #Blacklivesmatter, #Stopasianhate 등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 정치와 인권운동의 발자국이 지나갔던 또다른 대로들을 머릿속에 나란히 그려본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길에는 분명 어두운 면들이 있다. 누군가는 걷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삶과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길을 사용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고, 또 누군가는 두 발을 사용해 걷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입할 수 없는 길들을 끊임없이 맞닥뜨리며, 다른 어떤 이들은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운 채 언제든 몸과 생명을 위협당할 수 있는 길을 억지로 통과하는 나날을 보낸다.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그저 길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매일같이 집과 터전과 목숨을 잃으면서 거리의 불청객이라는 오명까지 입는 동물들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길 위의 약자들이 다른 모든 곳에서도 약자라는 것이다. 혐오로 가득한 온라인 뉴스 댓글창에서도, 익명의 힘으로 굴러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들은 환영받지 못하며, 사회의 배제 원리를 그대로 답습한 알고리즘이나 메타버스 같은 최첨단 기술들은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말하지 않은 걷기의 다른 단면들을 계속해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끄적인 걷기의 조각들이 지나친 낙관만을 노래하는 환상으로 읽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현실의 개선이 환상과 픽션의 힘을 믿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안다. 현명한 보행자는 지금 걷는 길을 눈에 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마주할 전경과 시야 너머의 삶들까지도 상상할 줄 아는 사람. 그러니 나의 현실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시작한 이 걷기가 마지막으로 향할 길은 비관이나 절망이 아니라 현실이 나아가야 할 미래, 우리가 발견하고 추구하고 만들어야 할 다음이다. 내가 내 사유와 걷기의 방향에 확신을 갖고 책임을 지려면 길에는 분명 어두운 면들이 있다는 말 대신 열린 공간으로서의 길과 걷기는 모두의 권리로 인정되고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디지털로 향하는 길과 디지털 속에서 이어지는 길도 당연히 포함이다. 삶을 잇는 모든 통로와 이야기는 걷기의 연속으로 만들어지니까. 뒤집어서 생각했을 때, 한 존재의 삶은 곧 그가 걸어온 길의 역사와도 같다.
부쩍 날이 따뜻해졌던 지난주 토요일엔 서울역과 시청역 언저리에 갈 일이 있었다. 나는 서소문 골목께의 독립서점에 방문하고 염천교를 건너 숭례문에 다다라서 건물 사이로 크게 모습을 드러낸 남산타워를 바라보다 이런 트윗을 남겼다. ‘남산타워 앞에 가면 남산타워가 보이는 게 당연한 건데 서울 어디서든 남산타워 마주치면 반갑단 말야? 설령 그게 남산타워 앞이라고 해도…’ 최근에 알게 된 바를 특별히 귀띔하는데, 내가 사는 도시와 내가 걷는 길에 대한 애정은 언제나 소리소문 없이 불쑥 찾아온다. 걷는 사람은 그 애정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오랫동안 만끽하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이다. 온라인 공간에 상시 접속해 있는 내 친구들에게 이 감정과 감상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도 있고. 사적 욕망과 공적 생활이 교차하는 이 평범하고도 특별한 곳은 다른 장소, 다른 존재, 다른 시간과의 연결과 만남이 시작되는 배경이며, 나는 진실이 그런 구체적인 삶, 수행, 실천으로부터 스며 나온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0과 1로 분절된 디지털과 연속적인 변화로 이루어진 아날로그를 가로지르는 이 길을, 평소에 걷듯이 좀 같이 걸어 보자. 나는 오늘도 여기서 출발하려고 한다.
편집위원 퓨(rachopin329@naver.com)
참고문헌
東浩紀 (2014). 弱いつながり. Tokyo, JP: 幻冬舍. 윤동희 (역) (2016). <약한 연결>. 서울: 북노마드.
Castells, M. (2000). The rise of the network society(2nd ed.). Malden, MA: Balckwell. 김묵한, 박행웅, 오은주 (역) (2003).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서울: 한울.
Lefebvre, H. (1974). La production de l’espace. Paris, FR: Anthropos. 양영란 (역) (2011). <공간의 생산>. 서울: 에코리브르.
Mosco, V. (2017). Becoming digital: Toward a post-internet society. Bingley, UK: Emerald Publishing.
Solnit, R. (2001).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 London, UK: Penguin Books. 김정아 (역) (2017). <걷기의 인문학>. 서울: 반비.
Turkle, S. (2011). Alone together: Why we expect more from technology and less from each other. NY: Basic Books. 이은주 (역) (2012). <외로워지는 사람들>. 서울: 청림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