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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6호 05화

무성애자인 내가 초-성애적 사회에
던져진 건에 관하여

[끝 없이 흘러가는] 편집위원 모자

by 연희관 공일오비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005_1.jpg 웨딩피치 최종화 '라스트 웨딩' 中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웨딩피치]의 명(?)대사! 주인공인 피치가 지구에 사랑을 없애고 증오를 퍼뜨리려는 악당 레인 데빌라와 맞서 싸우며 내뱉는 말이다. 이 장면은 흔히 연인이 없는 솔로들을 조롱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곤 한다. 작중에서 피치가 레인 데빌라에게 이 말을 하게 되었던 맥락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원래 밈이란 게 앞뒤 맥락과는 상관없이 우스꽝스러운 부분만 잘라서 공유되는 거니까. 레인 데빌라에게 사랑의 힘을 알려주고자 하는 피치의 갸륵한 마음도, 지난 사랑에 상처 입어 세상 모든 사랑을 파괴하려는 레인 데빌라의 뾰족한 마음도 여기서는 중요치 않다. 왜냐면 이 글은 이 장면이 ‘사용되는’ 맥락에 초점을 맞춰 진행될 예정이니까!



초-성애적(超-性愛的) 사회

<깜짝 퀴즈1>
위험사회, 성과사회, 소비사회 -->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총 100점)

만약 당신이 ‘음... 누군가 현대사회를 저렇게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라고 생각했다면 50점밖에 얻을 수 없다. 머뭇거리는 말투 때문에 실점한 게 아니니 이제 와서 단호한 말투로 바꿔도 소용없다! 그럼 나머지 50점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느냐, 답안에 현대사회의 ‘어두운 면’이 포함되어 있다면 온전히 100점을 얻을 수 있다. 문제점, 부작용 등 비슷한 느낌의 단어도 모두 정답처리 할 테니 서운해하지 마시길.


그렇다. 세 단어는 모두 현대사회의 어느 한구석, 특히 부작용이 심한 부분을 관찰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곪을 대로 곪은 현대사회이기에, 위에 제시한 단어 외에도 분명 현대사회의 어둠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는 아주 많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진단하지 못한 문제도 여전히 많을 테니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용어가 탄생하겠지. 그럼에도 누군가 나에게 지금 이 시대에 이름을 부여할 권리를 부여해 준다면 두말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거다. “우리는 초-성애적 사회1)를 살고 있어요!”


왜 이런 이름을 붙였냐고? 출제자의 의도를 잘 파악한 독자들은 벌써 눈치챘을 것이다. 아, 이 사람이 지금 성애가 다뤄지는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구나. 정확하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온갖 곳에서 사랑을 떠들어대는 이 사회가 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모두 연애가 지상 최대의 과업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로맨스 없는 K-드라마 없고, 커플링2) 없는 K-예능도 없다. 게다가 (특히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그 안에서 그려지는 연인들의 행위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이다. 사랑에 불타올라서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찐-한 스킨십 장면을 넣지 않고서는 그들이 연인인 것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인지... 그런 꼴을 보고 있자면 누가누가 정력왕인지 대결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웃음만 나온다. 심지어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온갖 매체에서 브로맨스를 셀링 포인트로 삼아 마케팅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동성애/이성애를 막론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비롯한 행위들이 얼마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지 알 수 있다. 미디어는 사랑을 익숙하고 고정된 방식으로만 그려왔고, 사람들은 그것을 즐겁게 소비해 왔다.


이러한 메시지는 곧 사랑과 연애를 등가로 만들어 버린다. 더 나아가서는 연애하는 상태를 신성시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소위 연인들의 날이라 불리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평소엔 의연하던 사람들도 연인을 만들기 위해 작은 호감만 가지고도 고백을 시도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 평상시에도 연인이 없는 상태를 못 견뎌 하는 사람도 있다. 이쯤 되면 연애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므로 솔로는 당장 탈출해야만 하는 상태로 여겨진다. 심지어 30살까지 동정을 유지하면 (동정이라는 말도 웃기지만 어쨌든) 마법사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당연히 비하의 의미지만.


이렇게나 성애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모태솔로로 살아가는 나는 하루하루가 짜증의 연속이다. ‘그 나이 먹도록 아무도 못 만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하면서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그래도 언젠간 좋은 사람 만날 거야’ 하면서 멋대로 동정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그래! 나는 모쏠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날 슬프게 하거나 속상하게 하지는 않는다. 지금껏 애인을 만들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온전히 내 의지였기도 하고, 애초에 누군가에게 성적 끌림을 경험해 본 적도 없는데 연애며 애인이며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리도 없다. 날 슬프게 하는 것은 오직 솔로를 하자 있는 사람 취급하는 이 사회뿐이다. 그러니 이 초-성애적인 사회를 문제 삼을 수밖에!



Hoxy 내가 무성애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여느 사람들처럼 나도 ‘모쏠인 게 아무렇지도 않은’ 나를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친구들은 과거의 짝사랑 경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혹은 범성애자인지 스스로를 정의하곤 했다. 부끄럽지만 철없을 적의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성적 지향을 정체화할 수 있는 명확한 계기가 있다는 것 자체를 부러워했다. 뼈헤테로3)가 아니고서야 정체성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매우 두려웠을 텐데도. 그것을 이해했을 때에 비로소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어찌 되었건 요점은, 나에겐 견주어 정체성을 판단할 만한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지해서 폭력적이던 시절에는 (이렇다 할 경험도 없었으면서) 두루뭉술하게 남자를 좋아하겠거니 생각했다.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한계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질문에도 모두가 납득하는 대답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애해 본 적 없냐는 질문에는 여중 여고 나와서 주변에 남자가 없었다는 말로, 좋아하는 사람 있냐는 질문에는 아직 어려서 못 찾았다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기엔 이성애자라는 타이틀이 퍽 괜찮았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 주변 환경이나 나이 핑계가 먹히지 않을 때쯤 되자 누가 묻지 않아도 내면에서부터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올랐다. 내가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맞나?


이 질문은 한동안 나를 번민하게 했다.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전교생이 800명이 넘는 여고에서도 별다른 끌림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다기에는 대학에 와서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람을 깊게 사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서로의 말버릇까지 닮아갈 정도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에게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못했다. 이쯤 되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1년 정도 비슷비슷한 생각과 고민이 줄을 이어가던 중에 우연찮게 수강한 젠더 수업에서 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자신의 성정체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요? 여러분이 지난 이십몇 년간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이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 누굴 좋아해 본 경험이 없다면 무성애의 범주에 속할 수 있겠네요.”


무성애라니! 그전까지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분류가 날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좋아해 본 경험이 없다는 말은 곧 성애가 없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경험’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어떤 성별을 좋아하는가로 접근하는 것이 내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던 이유가 그제야 이해되었다. 그래, 인생이 누군가와의 결합으로만 완전해진다면 그것처럼 허무하고 허탈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인간이 천벌을 받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플라톤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면 우리에겐 인간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어버릴 뿐인 존재라는 사실만이 남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어느 한순간에 특별한 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의미화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고 해서 나에게 문제가 있다거나 내 삶이 의미 없다고 평가받을 이유는 없다.



그래서 무성애가 뭔데

<깜짝 퀴즈2>
연애, 자위, 섹스. --> 다음 중 무성애자가 경험하지 않는 행위는 몇 개일까요? (100점)

정답은... (두구두구)... 0개다! 당신이 뭔가 하나라도 골랐다면 아쉽지만 이번에는 점수를 획득할 수 없다. 단어 하나당 33점씩 배점을 부여하는 방법도 고민해 봤는데, 그렇게 하면 이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화통하게 부분점수를 없애기로 했다. 이의제기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는 무성애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그럴 것 같다고 의심하는 단계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다. 저 세 가지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숱한 의심의 끝에서야 비로소 무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할 수 있었다. ‘내가 무성애자일 수도 있겠구나’와 ‘나는 무성애자야!’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해서, 후자를 선택하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만 같았다. 무성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처럼 무성애자임을 선언하는 순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을 잃을 것 같았고, 내심 내가 진짜 무성애자가 아닐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가뜩이나 무성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섣부르게 커밍아웃을 했다가 나중에 연애라도 하게 되면 무성애가 잠시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여겨질 게 뻔했으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연애를 하는 무성애자도, 자위를 하는 무성애자도, 섹스를 하는 무성애자도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왜냐면 로맨틱한 끌림(romantic attraction), 성적 끌림(sexual attraction), 성욕(sexual drive)은 모두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로맨틱한 끌림은 타인에게 간질간질한 설렘을 느낄 때, 성적 끌림은 타인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낄 때, 성욕은 성적행위에 대한 욕망이 피어날 때 발현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감각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성욕의 경우 외부의 영향 없이 내면에서 발생하는 감각인 반면, 로맨틱한 끌림과 성적 끌림의 경우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대개 무성애자는 이 세 가지 감각을 모두 느끼지 못한다고 오해받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무성애는 기본적으로 성적 끌림의 부재로만 정의되기 때문이다.4) 따라서 무성애 스펙트럼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정체성이 포함될 수 있다. 예컨대 가장 쉬운 분류 방식을 통해 무성애를 분류하면 로맨틱 무성애와 무(無)로맨틱 무성애로 나눌 수 있으며, 로맨틱 무성애는 어떤 성별과의 관계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호모∙바이∙헤테로로맨틱 무성애로 구분된다. 정리하자면 로맨틱 무성애자는 타인에게 연애감정은 느끼지만 성적인 접촉을 하고픈 욕망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무로맨틱 무성애자는 타인에게 설렘을 느끼거나 성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말만 듣고 이해하기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아래 그림을 준비했으니 참고하시길!

005_2.jpg

※ 주의: 모든 무성애자가 위 분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를 위해 단순화 작업을 거쳤으니, 무성애 스펙트럼에 관심이 생겼다면 무성애 교육 웹사이트 ‘AVEN’에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위에서 배운 개념을 바탕으로 무성애자가 연애, 자위, 섹스 따위를 경험하는 게 어째서 이상하지 않은지 알아보자. 첫째로 연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연애는 ‘상대방을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여 사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타인에게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고 연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로맨틱 무성애자는 당연히 연애가 가능하다. 심지어 무로맨틱 무성애자도 전혀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어쩌다 분위기에 휩쓸려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연애를 이야기했으니 이제 자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퀴즈에서 자위를 고른 사람들은 아마도 무성애는 성기능장애의 일종이라 성적 흥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알았냐고? 관심법을 썼으니 더 알려고 하면 다칠지도 모른다. 하하!) 그러나 무성애자는 특정한 대상과 성적 접촉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없을 뿐, 성적 자극이 주어졌을 때는 신체적인 반응을 보인다. 가령 성인 콘텐츠를 접했거나 배란기 호르몬 작용 때문에 성적 흥분이 일었다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자위를 할 수 있다. 자, 무성애자도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으니 무성애자의 섹스 경험 또한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로맨틱 무성애자가 성적인 신체 접촉을 원하는 자신의 파트너를 위해 성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어쩌면 무로맨틱 무성애자도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잠시 누군가와 섹스를 할 수도 있다.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에겐 사실상 자위와 섹스가 다르지 않으니까.


무성애자의 연애∙자위∙섹스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예시를 들었지만 여기서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인의 정체성과 행위의 결과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향과는 별개로 상대방을 위해서, 혹은 그냥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성적인 접촉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듯 겉으로만 봐서는 유성애자와 뚜렷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무성애가 실재하는 정체성이 아니라며 딴지를 거는 사람들도 있지만, 앞에서 무성애의 정의를 배운 우리는 이제 그들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어떤 행위를 했느냐가 아니라 ‘성적 끌림’을 느끼느냐에 집중해야지, 이 바보들아!’



초-성애적 사회에서 무성애자로 살아가기

사랑이 곧 연애고 성애인 이 초-성애적 사회에서 무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은 꽤나 가혹하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당연히 연인관계로 발전해야 하고, 연애에는 반드시 섹스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이상한 사람이었다. 더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쏟아지는 무례한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변해야 했다. 나는 무로맨틱 무성애자이지만 세상에는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는 무성애자도 존재하고, 나는 연애도 섹스도 안 해봤지만 다른 무로맨틱 무성애자는 지금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무성애자라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고……. 이렇게 답변하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 나만 질문을 받고 있지? 나는 경험해보지도 않은 성적 끌림을 설명해가면서, 왜 유성애자의 입장에 이입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야만 하는 걸까. 나도 질문할 권리가 있잖아!


그래서 나는 이제 그들에게 질문을 되돌려주려 한다. 초-성애적으로 행동하는 그들이 너무 낯선 무성애자의 입장에서. ‘그런데 저기요, 죄송하지만 저도 당신들 사고방식이 전혀 이해가 안 되거든요. 누군가와 연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타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기제를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아니, 애초에 성적 끌림을 느낀다는 건 어떤 건가요? 정말로 사랑하면 무조건 연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답하던 어느 유성애자가 결국 불쾌한 티를 낸다면 그때 이렇게 말해주는 거다. 당신이 나한테 하던 질문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고.


무성애자로서 내가 들었던 가장 불쾌한 말은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 말속에 숨겨진 뜻은 아마 이성 애인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니 당장 연애부터 시작하라는 말이었을 테다. 성애는 인간성의 정수이며 낭만이고, 성애의 결실로 태어나는 아이는 축복이라고. 하지만 사랑이 그렇게 납작한 방식으로만 정의된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거절이다! 사랑은 다양한 형태와 방향을 가진, 도저히 말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무언가이다. 사랑의 개수를 셀 수 있다면 아마 이 세상엔 적어도 80억 개 이상의 사랑이 존재할 것이다. 80억 인구 각각이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인간존재와의 사랑까지 합한다면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사랑이 지구를 채우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누구도 나에게 사랑을 모르다 폄하할 수 없다! 나는 사랑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잘 안다. 난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내 삶을 지탱해주는 많은 것을 사랑한다. 생각날 때마다 안부를 묻고, 서로 건강을 걱정해주고,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타인에게 성애를 느끼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서 최근의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더 새롭고 다채로운 관계를 맺을 나날을 기대한다. 나와 함께해 주는 가족, 동료, 친구, 그리고 내 삶을 스쳐 지나간/지나갈 사람들까지. 나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여전히 무성애를 병이나 불쌍한 존재로 생각하는 초-성애적 사회에서 무성애자로 살아가는 건 참 버겁고 힘들지만, 적어도 사랑의 형태를 멋대로 재단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그들에게 피치의 명대사를 돌려주겠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깜짝 꿀팁>
글을 끝맺으며, ‘세상 모든 사람을 만나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무성애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의심 때문에 무성애자로 정체화하기를 망설이는 동료들을 위한 팁을 하나 주고 싶다. 그런 무례한 질문을 받을 때면 꼭 이렇게 맞받아쳐주자. ‘그럼 너는 태양계에 있는 모든 행성을 직접 탐사한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외계생명체가 없을 거라고 확신해?’ 이 때 그의 몰상식함과 무지함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어주는 것도 필수이니 꼭 실행하길 바란다! (그럼 안녕~)





편집위원 모자(dyj06128@yonsei.ac.kr)



1) 여기서 초(超)는 초월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주, 완전 등 뒷말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2) 커플링: 실제 연인관계는 아니지만 시청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목적으로 출연자들의 관계를 마치 연인 내지는 그에 준하는 관계로 보이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3) 뼈헤테로: ‘뼈’와 ‘헤테로섹슈얼’의 합성어로, 이성애자를 일컫는 은어

4) 앤서니 보게트, 『무성애를 말하다』, 임옥희 옮김, RSG(레디셋고),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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