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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6호 03화

사랑하는 일은:

[끝인 줄만 알았던] 편집위원 빙봉

by 연희관 공일오비

사랑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사랑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일을 자행하게 한다. 그러다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나면 침대에 파묻혀 눈물을 흘리면서 몇 날 며칠이고 그것을 곱씹게 한다. 사랑은 나를 한없이 우쭐하게 만들다가도, 또 나를 끝없이 추락시킨다.


사랑하는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명백한 ‘넘겨짚음’이다. 내가 아는 상대의 정보를 있는 대로 끌어모아 조합하고 나서 그의 의도나 마음을 추측하는 일, 그것은 들어맞지 않을 때가 훨씬 많으며 그 자체로 시간 낭비이기도 하다.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를 애정으로 돌보는 일은 단언컨대 그를 단정하는 일이다. 여성 우울증에 대해 글을 쓴 하미나는 자신의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에서 “돌봄은 침범이어서 어렵다. 돌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에 관여해야만 한다. 선을 넘는 순간이 생긴다. 어디까지가 돌봄이고, 어디서부터는 폭력일까?”라고 묻는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돌봄은 사랑, 양육, 친절, 다정과 같은 속성과 자주 연결되지만, 현실의 돌봄은 불안, 상처, 억울함, 분노, 증오와 같은 속성과도 밀접하다.”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연인들은 시종일관 껴안고 키스하고 사랑을 속삭이지만, 사랑은 정말 그걸 가능하게 할까? 거기서 멈출 수 있을까? 그렇게 아름답게만 남을 수 있을까? 어쩌다가 사랑의 무지막지한 추악함과 잔인성을 알아버린 나는 흐느끼다 말고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감각한 사랑의 얼룩에 대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만화와 소설을 꺼내들어야 한다.



사랑하는 일은: 기대는 것


<우리는 시간문제>는 참 독해하기 어려운 만화다. 어떤 이들은 소녀들의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라고 하고, 어떤 이는 명백한 레즈비언들의 사랑 만화라고 주장한다. 후자에 따르면, 그들이 ‘사귀자’고만 결의하지 않았을 뿐 그 사랑은 기존의 문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만화의 장르가 ‘일상툰’이라는 사람들은 <우리는 시간문제>를 ‘소프트 GL(Girl’s Love)’로 읽어낸 사람들을 당혹스러워하고, 반대로 그 만화가 여자들끼리의 사랑을 담은 ‘GL’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랑으로 빼곡한 이 만화를 어떻게 ‘일상툰’으로 읽어냈냐며 역정을 낸다. 독자가 어떻게 이해했든 <우리는 시간문제> 속 배수현과 우유진은 서로 만나 유유히 애정을 나누고 온기를 나눈다.


‘탈모거북’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아마추어 소설 작가가 있다. 배수현이다. 그는 이혼한 엄마가 새로이 연애를 시작한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의 새로운 사랑을 응원하는 한편, 낯설어진 집의 풍경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때마침, 수현은 잘 모르는 대학 동기 하나가 방을 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수현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대학 동기에 연락한다. 그 대학 동기는 우유진이다. 유진은 사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배수현의 소설을 읽어왔다. 우연히 친구가 추천해 준 것이다. 그 후로 유진은 수현의 소설 <이상한 복식의 남학교>에 빠져 산다. 추천해 준 친구는 타박한다. “으이구! 내가 괜한 걸 알려줬지.” 수현과 자신이 동갑이라는 사실 정도 알고 있던 유진은 수현이 인터넷에 올린 일기들로, 어느새 그가 자신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며 같은 과 동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유진과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우유진은 배수현에게 막대한 애정을 쏟아붓는다. 유진과 수현의 관계는 위에서 아래로 모래를 흘려보내는 모래시계만 같다. 애정의 크기는 유진의 것이 커 보이고, 애정의 방향 역시 유진에게서 수현에게로 흐르는 것 같아 보인다. 유진은 수현을 늘 궁금해하고, 수현은 느리게 그것에 대해 답하는 식이다. 사실 그러한 불공평한 애정의 크기는 당연하기도 하다. 유진은 몇 년 동안 자신이 사랑해왔던 글을 쓴 작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그의 소설 <이상한 복식의 남학생들> 속 주인공들의 얼굴을 스케치까지 하곤 했으니까. 그러니 유진이 시종일관 수현에게 애정을 표하며 수현에게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건 그리 어색하게 읽히진 않는다. 그 열렬한 고백 옆에서 배수현은 우유진을 신기한 생명체 보듯 바라보며 그 애정을 유유히 받아든다.


유진이 쌓아놓은 안전한 성 안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랑의 안락함을 탐닉하던 수현은 일순 자신의 소설 쓰기에 진척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이러한 무기한의 안락함 속에선 아무것도 완성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유진의 집에서 나가기를 선언한다.


“너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너희 집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아. 나를 잘 알고 웬만한 것도 다 이해해주는 사람 옆에서 편하고 안락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쓰는 그런 인생 방식은 나한테 없어. 그러니 나갈 수밖에.”


자신과의 공간을 나서겠다는 수현에게 유진은 어르고 달래보며 눈물까지 지어 보이지만, 수현의 결심은 확고하다. 어느 날, 수현은 조그마한 짐을 챙겨 고요히 유진의 집을 나선다. 그들의 별거(別居)와 이별은 동성 룸메이트가 어쩌다 따로 살게 된 과정과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린다.


여전히 그들의 별거는 룸메이트 간의 그것이라기에는 습하고 끈덕지다. 유진은 상심하여 앓아눕고, 수현은 유진에게 연락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룬다. 이 편만 다 쓰고, 이 편만 다 올리고... 마지막 편이 올라간 이후에도 수현은 유진과의 시간을 추억하기만 할 뿐, 먼저 연락하지 못한다. 유진은 마지막 편을 몇 번 읽었냐는 남동생의 말에 수척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한다.


“몰라. 안 세봤어.”


자신을 항상 궁금해하고 애정을 퍼붓던 유진이 일상에서 한순간 없어지자 수현은 “다른 곳에 살다왔구나, 내가.” 하며 묘한 얼굴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엄마로부터 “너를 참 자세히 봐줬다. 그 유진이란 애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들의 이별 후 재회는 얼렁뚱땅 일어나는데, 소설을 완결 지은 이후 얕은 우울감과 무기력에 잠겨 살던 수현이 머리를 자르러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가 유진을 우연히 보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유진이 실망할까 두려워 도망치다가 결국 이를 눈치챈 유진에게 붙잡히는 것이다. 쫓고 쫓기는 기나긴 전투는 또 얼렁뚱땅 멈춘다. 유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울음소리”를 내며 울자, 수현이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이들은 어색한 얼굴로 마주 앉아 마카롱을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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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진정으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 봤다던 수현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 무서운 건 네가 그 아이들의 행방에 대해 무심해지는 거야. ‘아~ 소설 잘 봤어 수현아. 근데 나는 이제 별 관심이 없어. 그 학교를 다니는 남자애들의 얘기가.’ 수현은 시종일관 유진이 자신의 소설에 갖는 애정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소설이 작가인 수현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수현은 막대한 고백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난 수현이 하릴없이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고 느낀다. 수현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유진의 관심과 애정이다. ‘아~ 수현아. 그런데 나는 이제 별 관심이 없어.’ 수현이 두려워한 것은 바로 유진의 무관심이다.


그런 수현의 고백에 돌아오는 유진의 대답은 난데없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생각을 해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왜냐면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


독자로서 이 말의 연원을 반추하다 보면, 그들이 함께 살 때 유진이 언뜻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유진은 앞서 수현과 동거하던 시절, 수현과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다시 만나 친구가 되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면서도 같은 말을 수현에게 건넨다.


“네가 소설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어려운 방식으로 설명해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왜냐면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


다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호기롭게 선언하듯 뱉은 예전 그 말과, 수현의 나약하지만 애정 어린 의존을 받아들자마자 건네는 그 말은 왜인지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것만 같다. 나는 약간의 비약을 더해 수현을 “다 이해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유진의 말을 ‘부탁’으로 읽어내고 싶어진다. ‘제발 말해줘. 방금 전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줘야 해. 그렇게만 한다면 난 널 다 이해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 유진의 그 말은 결국 이렇게 사정하는 것만 같다.


타인에게 나의 내밀한 말과 생각을 건넨다는 건, 그에게 나의 몸을 조금만이라도 기대겠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에게 의존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이다. 1인분 혹은 그 이상의 몫을 해내라고 강요하는 우리네 현대 사회에서, 나의 무게를 남에게 싣는다는 건 죄악에 가깝다. 나의 무언가를 털어놓는 일, 그것은 불편함을 자아냄과 동시에 나의 약자성을 고백하는 것만 같다. 난 이렇게 네게 기대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야, 나의 조각을 멋대로 네게 건네도 되는 걸까. 이렇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선은 각자의 감정을 배제하고 상대에게 늘 같은 얼굴만 보여주는 걸까? 상대가 나서서 묻지 않는 이상 상대의 이야기만을 들어주기만 하고, 나의 이야기를 건네지 않는 건 언뜻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의존에 막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기대려고 하지 않는 상대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서도 사랑은 사그라들 것이 분명하다. 무게를 싣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두려움이 점철된 마음 아래 하릴없이 인내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인내로 똘똘 뭉친 사랑은 결국 바닥난다. 그러니 유진은 수현의 솔직함을 받아들고 나서야 너의 말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다시금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수현이 “모처럼 솔직”하고 나서야 그들의 관계는 다시 사랑으로 묶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유진의 “뭐야. 말을 하라고.”는 여상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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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문제>라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가. 우리의 애정이 아무리 험난한 물살에 치이더라도 결국에 우리의 관계는 ‘시간문제’라는 건, 독자에게 질투와 시기를 느끼게 한다. 결국 둘은 다시 함께 살며, 불쑥 찾아온 유진의 엄마에게 “지저분하게 널린 그들의 일상”을 들키기도 하고, 유진의 별장(이 단락에서 수현은 “이래서 부자들은” 하며 눈을 흘긴다.)에 놀러 가 밤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수현은 유진을 곁에 두고 글을 쓰다가 무심코 고백한다. “이런 적이 없었어. 누가 옆에 있는데 글이 잘 써지는 건 처음 겪어봐.” “아- 그래” 하고 시큰둥해하는 유진에게 수현은 말한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란 말야.”


<우리는 시간문제>라는 제목 마냥 그들의 사랑은 언뜻 시간이 해결해 준 것만 같지만, 난 사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난 이들이 다시 함께 살며 같이 여행을 가고 마지막 장면 속 절벽 앞에서 눈을 맞출 수 있었던 이유는 수현이 의존을 연습했기 때문인 것만 같다. 그리고 “말을 하라”고,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라고, 수현의 더듬거리는 의존을 지켜봐온 유진의 덕택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일은: 손해를 발음하지 않는 것


어느새, 손절(損截)은 없이 살 수 없는 용어가 되고 말았다. 포털 검색창에 ‘손절’을 검색하면 친구와 손절하겠다, 이 정도면 이 사람과 손절해도 되냐, 등 관계의 종말을 묻고 답하는 이들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사실 우린 ‘손절’이라는 단어를 관계의 끝을 알릴 때 주로 사용하지만 사실 이 단어는 주식 시장에서 파생되었다. 손(損)해를 본 주식을 절(截), 즉 잘라버리겠다는 것이다. 도통 어떻게 주식 용어에서 인간관계에까지 와닿은 단어인지 모르겠지만, ‘손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덜컹인다. 너와의 관계는 결과적으로 손해였고, 그걸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손절’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들에겐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날 따분하게 하고, 상념에 잠기게 하는 이들에게 소심히 복수하기 위해 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을 꺼내든다. 허구한 날 ‘손절’을 애용하는 사람들에게 <모래로 지은 집> 속 나비, 모래, 공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최은영의 단편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된 단편 중 최고를 뽑으라면 망설임 없이 <모래로 지은 집>을 고르겠다. 내게 <모래로 지은 집>은 그런 소설이다. 나와 닮아 분간하기 어려운 화자가 등장해 자신의 사랑을 말하는 이야기. 의도된 실수와 어색한 포옹이 반복되는 관계의 밧줄이 서서히 끊겨 나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는 그런 소설.


<모래로 지은 집>에서 공무와 모래, 나비는 통신 동호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동갑내기 친구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가보고픈 동호회 정모에서 이 셋이 우연치 않게 모인다. 그러고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계속된 우정을 쌓아나간다.


모래는 관계에 끈기를 가진 사람이다. 나비는 그것을 “모래만의 중력”이라고 표현한다. 나비의 첫인상에서 모래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외국 뮤지션에 대한 글을 게시판에 계속해서 올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글에 댓글이 달리지 않아도 가장 많은 댓글을 다는 사람. 자신에게 돌아오는 애정이 없어도 자신 안의 애정을 계속해서 퍼부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비는 모래가 없었더라면 그들 셋, 즉 모래와 공무, 그리고 나비가 다시는 서로를 만나지 않았을 거라고 단언한다. 모래가 세 명의 방을 만들어 밤마다 말을 걸었기 때문에 그들의 삼각형은 온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래는 세 명의 MSN 방을 만들어 밤마다 말을 걸고 매일 문자를 보낸다. 그러니 그들의 관계는 정말 모래가 만들어낸 어떤 것, 즉 모래로 지은 집과 다름없다.


모래와 공무, 나비는 우연히 만났다고 하지만, 난 자꾸만 그들 모두가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이들 같다는 공통점을 느낀다. 이들 모두는 사랑을 경외한다. 그리고 혐오한다. 공무는 자꾸만 강압적인 아버지와 형에게 맞는다. 공무가 그 지난한 폭력의 피해자가 된 건 나약하고 물렁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래는 자신의 사랑을 남김없이 친구들에게 퍼주면서도 자신을 ‘훈육’하고자 하는 아홉 살 연상의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건넨다. 소설의 화자인 나비가 가진 사랑에 대한 태도는 더욱 그렇다. 나비는 일평생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여자아이다. 자신을 지하철에서 자꾸 밀어 넘어뜨리며 화를 내는 엄마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숙아로 태어나 돈만 축낸다고 윽박지르는 아빠를.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나비는 그들을 이해하기 바쁘다.


나비는 그들의 첫 만남 이후 모래의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으며 모래를 어디서 보았을까, 떠올리다가 일순 알게 된다. 어느 날, 학생들이 주번 조례에 지각했다는 이유로 담당 교사가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동안 나비는 모래와 함께 교사에게 맞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는 것이다. 모래는 자신이 겪은 심각한 신체 폭력을 “잠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축하고선, 처음 본 모래에게 느꼈던 불쾌를 훨씬 상세히 서술한다.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태도”를 가진 모래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나비는 생각한다. ‘그전에는 이렇게 맞은 적이 없었나?’ 모래는 교사에게 눈앞이 번쩍할 정도로 세게 맞으면서도 ‘몇 대나 맞을까. 얼마나 더 이렇게 맞을까.’를 조용히 어림하고 있는, 폭력에 권태로운 아이로 묘사된다.


그러니 그들의 파편 같은 사랑은 좀처럼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나비가 모래에 가지는 감정은 혼란하다. 나비는 어느 순간부터 모래와 공무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그것이 나비의 객기라는 것을 안다. 나비는 시종일관 두리번거리며 모래와 공무의 관계 양상을 관찰한다. 그리고 자신이 소외될까 불안해한다.


더군다나 나비는 모래가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때, ‘우리’라 함은 가정폭력과 빈곤의 피해자인 나비와 공무이리라. 공무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공무와 마음속으로 편을 먹고 모래를 시기한다. 모래의 친절은 그의 권력이라고 믿는다. 나와 공무가 가진 친족으로부터의 폭력, 가난한 가정들이 어째 모래에게선 멀어 보인다. 사랑만 받고 자랐으니까 저럴 수 있는 거야. 나비는 모래를 사랑하는 만큼 시기하고, 동경하는 만큼 거리를 느낀다.


“공무 생각을 자주 해.”

잠에서 깬 모래가 잠꼬대하듯 말했다.

“공무, 좋아해?”

모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공무만큼 널 생각해.”

모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말을 했다. (...) 어떤 망설임도 불안함도 없는 얼굴. 내가 가질 수 없는 얼굴. 내 눈에 모래는 의사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똑똑한 동생을 둔, 동네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의 가장 넓은 평수에 사는 온실 속 화초였다. (...) 그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비는 자꾸만 모래의 낯에서 유복(有福)과 행복, 은은한 기만을 읽어낸다. 그러고는 그런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결국 화살의 날카로운 촉은 모래를 향한다. 나비는 은연중에 ‘모래가 조금이라도 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 애를 속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모래의 끝없이 관대하고 보드라운 낯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모래의 마음에 상처 낸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그러던 와중 공무와 모래의 관계마저 흔들린다. 어느 날부터, 공무는 모래의 ‘무엇을 먹고 싶다거나 어디를 가자’는 제안에 무안을 준다. 그럴 돈이 없다고 말이다. 공무는 삐딱하고, 모래는 침묵한다. 관계는 점점 어그러진다. 후에, 공무가 군대에 입대하고 모래는 고백한다. 자신의 사랑 고백에 대해 공무가 했던 답을. 착각하지 마, 단지 마음이 쓰이는 걸 그렇게 잘못 생각하지 마. 공무는 멋대로 모래의 애정을 ‘착각’ 그리고 ‘단지 마음이 쓰이는 것’이라고 단정하고는 자신이 자초한 실연에 마음 아파한다.


공무는 모래의 그 사랑에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모래의 애정을 거절하고, 나비는 그 사랑이 자신과 다른 출발선에 선 유복(有福)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기만 혹은 과시 따위로 일축한다. 그러면서도 그 둘은 모래는 나약하며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멋대로 단정해버리고 만다. 모래를 가엾이 여기고 불쌍해하면서 모래가 주는 애정으로 굳건할 수 있는 우정의 온기를 누린다.


“솔직히, 너희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나 좀 외로웠어.”

모래의 말에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여기서 외로운 사람이 너 하나였니. (...) 넌....... 내가 너보다 그렇게 더 강하다고 생각하니?”

“넌 내가 나약한 모습 보이는 걸 싫어하지. 그러면서도 내가 솔직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외로우면 외롭다고 말할 수도 없어?”

(...)

모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울고 있는 모래를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모래를 단죄했다.


모래가 외롭다고 말하면 너 혼자 외로웠냐고 쏘아붙이고, 외롭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이 모래의 유복에서 기인한 기만이라고 말하는 나비는 비열하다. 동시에 나비의 비열함은 나비의 가정폭력 피해자성에서 온다. 그리고 그런 나비를, 모래는 사랑한다. 이들의 관계는 알쏭달쏭하지만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 시기하며 연민하는 관계, 그리고 자기 비하하며 사랑받는 관계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모래와 공무의 관계가 부서지던 시절, 나비는 모래가 공무와 말다툼한 이후 “한동안 인터넷 방송을 열지 않았고 문자나 MSN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모래가 움직이지 않자 우리 셋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고. 나비는 “만날 시간과 장소를 잡는 건 항상 모래의 몫이었으니” “관계의 지속은 모래에게 달린 것처럼 보였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비와 공무는 그저 관계에 용기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 관계는 모래의 애정과 의존을 동력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나비는 변명하듯 설명한다.


결국, 나비는 모래의 타고난 관대함이자 그의 권력이라고 느꼈던 인내와 이해가 그저 모래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된다. 모래는 어느 날 수척한 얼굴로 등장해, 나비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고는 “스카치테이프로 여러 번 봉한 편지 봉투”를 건넨다. 왠지 모를 두려움에 뜯어보지 않은 모래의 마지막 편지, 그러니까 스카치테이프가 둘둘 말렸을 그 편지에는 모래의 사랑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아직 사랑이 헷갈리고 어렵지만, 모래가 나비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몇 단락은 끝나는 관계를 손해 아닌 사랑으로 닫아버리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중력과 마찰력이”있어 얼마나 다행인 세상인지 말하다가, 결국 너희에게서 받은 상처를 우회하여 털어놓고는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모래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시종일관 고백했던 편지에서의 전체 내용과는 달리 결연하고 굳건하다. 강인하다. 나비 역시 모래의 사랑이 결코 그 애의 의존증과 나약함에서 오지 않았음을 감각하고 만다.


나는 모래가 내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눈에 모래는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허약한 사람이었다. 관계에 대한 그 애의 성실함이 때때로 비굴해보이기도 했다.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상처받지 않았으므로 마음껏 다정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모래의 의존, 나약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모래의 기만이라고 생각했던 게 실은 모래의 사려 깊음에서 출발했다는 것. 생채기 없다고 믿어왔던 모래의 삶이 어쩌면 상처 나 있다는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 나비에겐 중요한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난 그저 모래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는다. 모래의 편지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미덕이 가득하다. 단언컨대, 모래의 편지에는 원망이 없다. 자신에게 냉철한 나비를 잠시 원망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설명할 뿐, 너희에게서 온 상처의 연원을 헤아리고 손해와 절단을 발음하는 내용은 전무하다. 모래의 사랑을 들여다보고 나면, 사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해를 발음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래로 지은 집>을 읽고 나선 나의 득과 실, 너의 득과 실을 손가락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게 됐다. 난 그것이 모래가 온 마음으로 지켜온 사랑이자, 나비와 공무가 후회한 사랑이자, 내가 감각한 <모래로 지은 집> 속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일은: ……


사랑이라는 말은 참 마음을 설레게 하다가도, 자꾸 헷갈리게 한다. 내가 하는 게 정말 사랑일까? 내가 하는 건 사랑이라기엔 너무 미약하지 않은가? 내가 하는 건 사랑이라기엔 너무 추악하지 않은가? 추상명사에 불과한 ‘사랑’에 사람들은 갖가지 형용사를 불어넣고 그것을 닮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공허하고, 그래서 불행하다.


의존을 배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추락하고 있는 상대의 몸뚱어리를 붙잡는 일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의존을 붙들어 매는 것도 사랑을 실행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방금 전, <우리는 시간문제> 속 자신의 결핍과 취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수현과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 하며 그 의존 가득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드는 유진을 떠올렸다.


종말한 사랑의 세계, 산산조각 난 관계의 세계를 끌어안되, 자기 연민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너와의 관계는 손해뿐이었다며 악다구니를 쓰는 대신, 관계에서의 오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실수를 계속해서 곱씹는 것도 사랑의 일종이라면? 나는 <모래로 지은 집>에서의 모래와 나비를 떠올리고 있다. 내가 가진 결핍을 타인은 절대 가늠조차 할 수 없다고 확언하는 오만한 실수. 나비는 그걸 했었고, 모래도 어렴풋이 그 어리숙하고 날카로운 마음들을 알아채지만 모래는 그들의 관계를 실수나, 혹은 손해로 명명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만 골라 떠들었는데도, 사랑은 아직도 입에서 겉돈다. 내가 떠들어댄 이것들이 정말 사랑이었는 줄은 나도 모르겠다. 기대는 것, 후회하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번지르르하게 얘기해놓고서도 확신이 가지 않는다. 세상엔 너무 다양한 얼굴의 사랑이 있어서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이 너무 많아서일까? 난 자꾸 사랑 아닌 것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지고, 결국 사랑이었던 건 내 안에서 사랑 아니었던 것으로 파스스 흩어지는 경험을 한다.


사랑이라는 건 정말이지 모르겠다.



편집위원 빙봉 (joliebin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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