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인 줄만 알았던] 편집위원 서로
위이잉- 책방 모퉁이에 멀뚱히 서 있는 에어컨의 소음. 그것은 이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반주와 무심히 부딪힌다. S는 시집 한 권을 집어 들고 에어컨 앞 탁자에 쪼그려 앉는다. 자리를 잡고 읽다 보니 옆 유리창에서는 여름 햇살이 한가득 쏟아진다. 제법 뜨끈한 햇살은 S가 주문한 매실차 속 얼음을 금세 녹인다. S에게는 찬기와 온기가 뒤섞인 자리가 오묘하게 느껴진다. 그가 시집을 넘기는 손길은 조금씩 느려지다 이내 멈춘다. S는 잠시 시집을 얼굴에 덮고 짧은 단잠에 들기로 한다. 여유로운 7월의 어느 날.
지난여름, 나는 라탄 모자를 머리에 얹고 부산으로 향했다. 계절학기를 마치고 비로소 종강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서였다. 첫날 부산시립미술관, 국제시장, 해운대를 구경하고 그 근방 호텔에서 묵었다. 관광객이 으레 많이 가는 뻔한 코스였다. 방문한 곳은 모두 예쁘거나 안락했다. 그래서 그곳에는 사사로운 할 일이나 뉴스에서 마주하는 현실의 문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나도 그러하기를 원해서 떠난 여행이었고, 그래서 만족했다.
흔한 이야기지만 여행지라면 모름지기 아름다움과 낭만, 그리고 자극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시대가 고스란히 담긴 고궁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대한 자연경관, 오색찬란한 도시의 야경, 미각을 현혹하는 시장의 각종 간식들, 사진으로 고이 남겨둘 만한 랜드마크…. 그것들은 모두 여행객의 ‘힐링’을, 잠깐의 ‘현실 도피’를 위해 각자의 맛과 멋에 충실하다.
그러나 둘째 날에 들어선 보수동 책방골목의 풍경은 여느 여행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골목은 걸어서 30분도 채 안 걸릴 짧고 좁은 거리였고, 그곳에는 옛 중고서점은 물론이거니와, 간판이 반질거리는 새 독립서점, 개인 카페, 그리고 사진관(!)까지 들어서 있었다. 나는 골목을 둘러보며 이곳이 과연 무엇을 여행 테마로 삼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옛 서점들의 구수한 풍경? 감각적인 독립서점들? 골목 측은 전자를 의도하고 있는 듯했지만 옛 멋이라고만 이야기하기에는 어쩐지 어설픈 감을 지울 수 없었다.
책방골목은 내게 ‘쉬운’ 여행지가 아니었다. 나는 옛것과 새것이 혼재된 골목을 계단이나 동상 같은 것으로 꾸며둔 의도를 생각했고, 그러면서 골목과 좁은 서점 안쪽을 종종 까치발을 들거나 허리를 굽히며 지나다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의하며 걷고 들여보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를 예민하게 살피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대략 다음과 같은 풍경들을 마주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였던 서점의 주인들은 무질서하게 놓인 듯한 책들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책을 노련하게 찾아냈다. 가만히 그 손길을 지켜보니 긴 사족을 붙이지 않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 서점을 운영해 온 이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편 골목 한 켠에는 백색의 공사장 벽이 둘러져 있었고 그 안에서는 이따금 챙챙거리는 금속 소리가 났다. 한여름에 칼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골목의 풍경과는 이질적이었다. 벽 위에 청테이프로 붙여져 있던 공고문에는 ‘○○ 오피스텔 신축 공사’라는 제목으로 공사 기간과 담당 업체 따위가 짧게 적혀있었다.
책방골목을 벗어나면 바로 옆 깡통시장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이 민간의 영역이었다. 깡통시장 반대편으로 올라가니 철물점, 옷가게, 조명 가게, 아파트 등 ‘세련된 여행지’와는 거리가 먼 건물들이 이어졌다. 길에서는 같은 여행객보다 부채, 시장바구니 등을 들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주민들과 더 많이 마주쳤다. 그러한 풍경을 보며 책방골목에 새 오피스텔이 들어서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책방골목에는 이전의 여행지들이 애써 숨겨온 이야기, 혹은 방문객이 그곳의 멋에 취해 조명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좁고 오래된 골목, 책이 주는 향수, 중후한 서점 주인의 노련함과 재개발을 위한 공사 소리와 같은 것들은 내게 책방이 오랜 역사를 담은 장소이며 누군가에겐 생업의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그 공간을 집어삼킬 재개발 문제가 복잡하게 엮여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옛 멋이나 책이 주는 낭만과는 다른 현실의 이야기였다. 책방골목은 그렇게 현실과 ‘맞닿아 있는’ 여행지로 다가왔다. 책방골목을 나오며 나는 이 미묘하고 긴 여운을 남긴 책방골목과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를 꼭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이후에도 보수동 책방골목의 이야기를 좇아가며, 골목 구석구석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
잠깐 스쳐가는 소낙비인 줄 알았다면
조금은 나른한 오후, 책방골목 사이사이에 드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위이이잉 대는 소리, 까드득 대는 소리, 땅땅 무언가를 쳐내는 소리. 고개를 슬쩍 내밀어보니 모두 골목 끝자락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그곳에서는 오피스텔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골목의 시작을 지키던 서점 건물이 어느새 납작한 분지가 된 지는 오래다. 그보다 조금 더 골목 안에 들어서 있는 책방의 주인 A는 이 소리에 귀가 유독 따갑다. 드릴 끝이 A의 책방을 겨누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A는 이내 가게에 틀어두었던 피아노 반주 음량을 더 크게 높이고 눈을 꼭 감아버렸다.
지난 10월 17일, 보수동 책방골목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점 3곳은 건물주로부터 ‘3개월 내로 책방을 비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다.[1] 이들이 들어서 있는 건물 2채가 상업 건물 신축을 위해 매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책방골목은 조금씩 그 영역이 느슨해져 왔다. 지난해 6월만 하더라도 책방골목의 입구 근처 건물이 통으로 매각되며 그곳에 들어서 있던 서점 8곳이 한 번에 사라지게 되었다. 골목의 한 귀퉁이가 날아간 셈이었다. 이렇게 쪼개지고 있는 책방골목에는 이제 약 31곳의 서점만이 들어서 있다. 한편 퇴거 요청을 받은 3곳의 서점은 골목 내에서도 입지가 큰 주요 서점들이다. 이들이 사라진다면 골목의 핵심구역은 더욱 흐려지게 될 것이다.
책방골목의 존속위기가 거론된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일이다. 중구청과 마을주민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위기에 맞서 책방골목을 재건할 청사진을 그려왔다. 지난 2013년, 부산 중구청은 ‘2013 보수동 책문화타운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며 낙후된 책방골목의 부활을 기대했다. 해당 계획에는 책방골목 근방에 방문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와 TMO 센터[2], 북카페를 설립하고, 어린이 방문객을 위한 어린이 도서관, 책방들이 함께 운영하는 공동 서고·판매장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중구청은 2023년까지 계획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또한 장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약 100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 측에도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목표연도인 2023년을 1년 앞둔 지금, ‘마스터플랜’은 완성되지 못했다. 책방골목 근처에 위치한 기존의 건물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이용해 책방골목 게스트하우스와 북카페 TMO 센터를 신설하고자 했지만, 이를 위한 부지는 타 상업 건물을 축조하기 위해 매각되었다. 보수동책방골목 보존 포럼[3]에서 한 시민은 이와 관련해 ‘지난 2013년의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며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9년 전 정부의 도움을 꾀하겠다는 중구청의 입장과 달라진 것이 없다. 9년의 시간 동안 보수동 책방골목은 충분한 변화를 꾀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골목의 존속 위기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리 서로 이렇듯 가깝고도 먼 서러운 별들
이튿날 아침, 여행객 B는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향했다. 8월의 무르익은 더위를 피해 책방에 들어선 B는 그곳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눈보다 한 뼘 위에 있는 칸에서 단편 소설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오래전부터 읽고 싶다고 염불을 외우다 이내 까먹어버린 소설집이었다. B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한 마음에 이 친구와 여행길을 함께하리라 다짐했지만, 문득 온라인 서점에 묵혀둔 10% 할인 쿠폰을, 호텔에 맡겨둔 묵직한 짐들을 떠올렸다. 그 위에 불필요한 낭만의 무게를 더하기가 싫었다. 그는 책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책방골목은 ‘책방’과 ‘관광지’ 사이 경계에 놓여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말 그대로 책을 구매하기 위해 오는 사람은 소수의 지역 주민들 뿐이다. 주민을 제외하면 책방골목을 찾는 인원의 8할은 여행객이다. 이들 중에는 서울·경기권에 거주하는 20대 여성의 방문비율이 가장 높으며, 방문객의 절반(전체의 48%) 가량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매체를 통해 책방골목의 존재를 알고 방문한 것으로 드러났다.[4]
이미 도서를 소비하는 플랫폼이 변화한 지는 오래다. 기존에 있던 대형 일반서점·중고서점과 더불어 이들의 온라인 플랫폼이 확장되고 전자책, 오디오북 등 책의 범주가 늘어나며 책방에서 종이책을 구매하는 것은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오프라인 서점도 이에 걸맞게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장소에서 책을 읽어볼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렇듯 오프라인 서점은 온라인 플랫폼과의 차별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취하고자 한다. 한편 책방골목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지난 10년간 쇄신을 꿈꾸던 골목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골목의 책방들은 가게 안에 책들이 느슨한 분류로 무성하게 쌓여있어 독서는커녕 도보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풍경들이 헌책방만의 멋스러움이라고 하더라도, 옛 향수와 멋만으로는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는’ 서점에 필요한 소스를 온전히 채우기 어렵다.
한편 책방은 관광지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지 못하다. 여행객이 책방골목에 머무르는 시간은 평균 20분으로 여타 관광지에 비해 머무는 시간이 짧은 편이다.[5] 이러한 문제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골목의 규모가 작고, 내실 없는 운영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해 6월 골목 입구의 서점 8곳이 대거 사라지며 골목의 크기는 거의 반으로 줄었다. ‘전국 유일, 전국 최대규모’라는 수식어로 꾸며진 책방골목이 작은 골목 한 토막이 전부라는 사실은 그곳을 마주한 여행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골목의 낙후된 시설과 복잡한 구조도 여행자에게 불편하게 다가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책방골목은 길이 좁고 투박한데, 책방 내부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쌓아둔 책 무더기 사이사이를 헤쳐 지나가야 하는 등 책방 내외로 이동이 불편한 점으로 인해 여행객은 금세 책방을 떠나게 된다. 더불어 주차장, 화장실 등 기본적인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점 또한 여행지로서의 편리함을 일궈내지 못하는 문제로 언급되었다.[6]
요새 골목을 오가는 부동산업자들이 부쩍 늘어났다. 골목 일대를 차곡차곡 개발한다는 소문이 난 지도 꽤 오래다. 골목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C의 머리를 자꾸 들락거린다. C는 책방이 들어서 있는 건물의 건물주다.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1층 서점 주인 A, 그 온정에 수년째 동결한 임대료, 점점 불어나는 땅값…. 그런 생각들이 반갑지 않게 C의 머릿속을 자꾸만 찾아든다. 옆 건물 사장은 지금이라도 빨리 건물을 팔아야 한다며 귀따가운 조언을 건넨다. 어째 마음 편한 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책방골목이 들어선 지역은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이 혼재되어 있다.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은 건폐율[7]과 용적률[8]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일반 주거지역의 건폐율은 50~60% 이하로, 용적률은 300% 이하로 규정되어 있다. 반면 상업 지역의 건폐율은 최대 90% 이하, 용적률은 1500% 이하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 주거지역에 비해 더 많은 건물을 더 높게 건축할 수 있는 것이다. 책방골목에 들어선 건물들은 상업지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낡고, 그 높이가 높지 않아 재개발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6월 매각된 책방골목 입구 근처 건물도 이와 같은 상업지역에 속해 있었다. 현재 매각된 건물은 철거되고, 분지는 여전히 비어있다. 철거된 건물의 자리에는 18층 높이의 고층 오피스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골목의 시작지점을 필두로, 상업지역으로 구획된 책방 건물주들은 부동산업자에게 건물을 매각할 것을 꾸준히 요구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동의대 신병윤 교수는 ‘이전에 책방골목이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되었다면 재개발의 범위와 용도를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부산시의 늦은 대응을 지적했다.[9]
건물주들에게 부동산업자의 매각 제안은 솔깃하게 들린다. 코로나 19 이전부터 겪어온 오랜 불황으로 서점의 임대료는 동결된 지 오래인 데다가, 건물의 가격은 유래 없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동 책방골목 상인회는 책방골목 내 건물의 평균 매입가가 6천~7천만 원 사이로, 개발 소문이 돌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고 언급했다.[10] 최근 매각된 책방 건물 중 한 곳은 1억 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건물주와 서점주는 20~30년씩 오랜 관계를 맺어오며 사이가 돈독한 편이지만, 건물 가격이 크게 뛰며 건물주들의 마음은 더욱 흔들리는 상황이다. 건물주들이 하나씩 부동산업자의 손을 잡으며 상업 건물 인근에 재개발 소식이 더욱 가열차게 들려올 예정이다.
‘사라지는 1층’은 책방골목의 존속을 더욱 위협할 예정이다.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 포럼에서 부산대 우신구 교수는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1층이 사라지는 현상은 골목의 다양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상업 건물·임대 빌라는 1층을 주차공간으로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전에는 골목마다 1층에 서점, 구멍가게, 피아노학원 등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들이 들어서 있었다면, 재개발 이후에는 그곳에 주차장이 자리 잡으며 앞서 언급한 골목의 생활양식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책방골목에도 재개발을 통해 오피스텔이 곳곳에 들어서게 된다면, 1층의 모습은 책방 대신 거주자의 편의를 위한 주차장과 일률적인 편의시설로 채워질 것이다.
A에게는 골목 곳곳에 묻은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어릴 적 새학기가 되면 용돈을 쥐어 들고 책방골목으로 향했다. 싼값에 새것 같은 헌책을 사두고는 남은 용돈으로 자주 보는 잡지 시리즈를 고르고 골라 몇 권 더 사오곤 했다. 그랬던 A는 이제 서점 한 켠 계산대에 앉아 소설집을 다시 꽂고 떠나는 B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좀처럼 줄지 않는 책들 앞에서 한숨을 폭 쉬다가도, 다음 손님을 위해 책 위에 쌓인 먼지를 털고 새 마음을 다지기로 한다.
책방골목 내 다수의 서점 주인들은 일생에 걸쳐 서점을 운영해왔다. 67년간 운영, 40년간 운영…. 인터뷰 장면에 작게 적힌 그들의 이력이다. 그들의 일생은 책방골목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학생들이 헌책을 내놓으면 그중에서도 좋은 헌책을 구하기 위해 은근한 경쟁을 벌인 서점 주인들, 그렇게 골라 모은 헌책을 신학기가 되어 가판대에 펼쳐두면 하루 만에 진열한 책이 다 나갔다는 이야기.[11] 책방골목을 방문한 손님들은 인산인해를 이뤄 줄을 지어 밀려 나갈 정도였다는 이야기. 그러나 서점주들에게 보수동은 추억으로 박제된 대상이 아닌, 생업의 공간이기도 하다.[12] 그들은 책방골목과 함께 살아온 과거를 껴안으면서도, 현재를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서점주와 더불어 보수동의 주민에게 책방골목은 추억이 서린 곳이자 생활 터전이다. 서점주 뿐만 아니라 다른 보수동의 주민들도 골목의 보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책방골목 내부의 한 카페에서는 커피 무역업체와 함께 개발한 커피 블렌딩 ‘1884 북스트리트’를 판매하며 그 수익금을 책방골목 운영에 사용하고 있다. 여행객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골목 보존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이다. 또한 골목 인근에 위치한 혜광고와 동주여고의 학생들은 각각 뮤직비디오 ‘보수동 그 거리’, 단편영화 ‘보수동책방골목’을 제작했다. 이들은 뒤이어 재학생과 시민이 책방골목을 주제로 쓴 200여 편의 시를 모아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동주여고), <보수동 그거리>(혜광고)를 발간하기도 했다.[13]
이와 더불어 번영회는 책방골목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올 2022년, 부산시와의 협력을 통해 책방골목 버스정류장을 ‘작은시민문학정거장’으로 꾸밀 예정이다.[14] 시를 써서 SNS에 올리면 정류장 전광판에 시가 노출된다. 이는 여행객들이 책방과 인근 카페에서 머물며 시를 쓰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 부산시는 이와 관련해 책방골목 앞에 정거장 모양의 조형물과 LCD 전광판을 설치하기 위해 예산 오천만 원을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부산시는 지난 2019년에 보수동 책방골목을 부산시 미래유산으로 지정했지만, 골목의 존속을 위한 구체적인 지원 대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부산시청의 지원은 책방골목의 존속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보다 골목 활성화를 위한 시민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례로 앞서 언급한 문학정거장 사업 또한 시민들의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보수동이 속한 중구청도 시청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이렇다 보니 책방골목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은 일회성이 짙다. 책방골목의 장기적인 미래를 논할 수 있도록 이전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 대책을 모색하려는 시청과 구청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이야기가 서려 있다.’ 으레 보수동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꼽으라면 그곳이 6·25 전쟁에서부터 골목에 누적되어온 보수동 주민들의 생활경험과 추억이 잔존하는 문화적 공간이라는 점이 언급되었다. 번영회와 주민 측은 책방골목이 담고 있는 세월의 흔적을 어떻게 드러내 보일 것인가를 논해왔다. 이와 관련해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 포럼에서는 책방골목을 세상에 무엇으로 내보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포럼 전반을 관통했던 것은 여행객에게 책방골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여행객이 문학인의, 보수동 주민의 자취를 좇아 책방골목 사이사이에 녹아 있는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부산학당 이성훈 대표는 그 일례로 황순원의 소설 ‘곡예사’에서 보수동 골목에서의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을 짚었다.[15] 황순원은 6·25 전쟁이 발발한 뒤 부산으로 피란을 와 경남중학교 뒤편에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피란 이후 써낸 단편소설 ‘곡예사’는 그러한 그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특히 작품 안의 화자인 ‘나’가 ‘황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작품의 핍진성이 높게 드러난다. 소설은 주인공이 피란 이후 부산의 변호사 집에서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척박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낸다. 주인공의 아내는 국제시장에서 옷가지를 팔고, 아이들은 서면 일대에서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이성훈 대표는 1953년 발간된 ‘직업별요람부’에서 당시 변호사 29명의 주소 중 황순원의 소설 속 장소와 일치하는 주소를 찾아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토성동 2가 9번지’. 그 일대를 중심으로 보수공원 뒤 황순원이 출퇴근 때 책방골목을 지나며 근무하던 서울고등학교 임시교사가 있었고, 아내가 옷을 팔던 국제시장이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성훈 대표는 소설의 문구를 따라가면 주인공의 자취를 현실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며 문학인의 숨결이 잔존하는 보수동과 책방골목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언급했다.
글을 매듭지으며, 누군가 나에게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곳이 불편하고 서글픈, 그러면서도 따스한 추억과 경험들이 녹아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책방골목은 6·25 전쟁 이후 자리를 잡으며 약 70년간 많은 장면들을 담아왔다.[16] 전쟁으로 인한 피난의 아픔부터 보수동 주민의 삶의 터전, 추억, 여행객의 낯섦, 그의 새로운 경험과 같은 장면들까지. 책방골목의 존속이 필요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서로 겹쳐지고 교차하며 여전히 골목 곳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1월과 2월은 책방골목 허리에 위치한 서점 세 곳이 철수 요구를 받은 지 약 4개월이 지나는 시점이다. 그 4개월의 시간 동안 언론은 스러지는 책방골목을 비추고, 번영회와 서점주들은 언론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골목의 이야기가 부산 너머에도 전해지기를 바라왔다. 부산을 벗어나 국내 구석구석 책방골목의 이야기가 닿고 있다. 이 글도 책방골목의 이야기를 안고 당신에게 닿았다. 그리고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 어김없이 봄이 올 것이다. 온기를 마주하려 꽃망울이 터지면 신발끈을 질끈 묶고, 서점 사이사이에 불어올 변화의 봄바람을 마주하러 보수동으로 떠나보자.
추신. 소제목들은 각각 손택수 시인의 시 <지렁이>, 황순원 시인의 시 <세레나데>, 황동규 시인의 시 <즐거운 편지>의 한 구절을 발췌해 인용한 것이다. 손택수는 부산에서 오랜 시간 생활해 온 시인이다. 그는 유년 시절 보수동 인근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책방에 들러 책을 읽고 문인의 꿈을 키워갔다. 더불어 황순원과 황동규는 부자지간으로,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와 잠시 보수동에서 생활하였다.
편집위원 서로(lilywithwd2016@gmail.com)
[1] 「보수동 ‘터줏대감 책방’ 3곳 쫓겨날 위기… 생존 기로 선 ‘책방골목’」, 부산일보, 2021.10.17.
[2] 책방골목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행정 종합 센터를 의미한다.
[3] 2021년 12월 27일에 열린 행사로, 책방골목의 존속을 위해 보수동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책방에 얽힌 역사와 부산학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유튜브롤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녹화본 또한 업로드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nSPKfLs__Y)
[4]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포럼 2021.12.27. (https://www.youtube.com/watch?v=RnSPKfLs__Y)
[5]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포럼 2021.12.27. (https://www.youtube.com/watch?v=RnSPKfLs__Y)
[6]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포럼 2021.12.27. (https://www.youtube.com/watch?v=RnSPKfLs__Y)
[7] 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의 비율.
[8] 대지면적에 대한 지상층 면적합계의 비율.
[9] 「‘개발 바람’에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일보, 2021.10.28.
[10] 「‘개발 바람’에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일보, 2021.10.28.
[11] “부산을 그리다 1편” 골목의 도시 부산_보수동 책방 골목, 2020.01.29. (https://www.youtube.com/watch?v=hz72QYY22cU)
[12]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 포럼 2021.12.17. (https://www.youtube.com/watch?v=RnSPKfLs__Y)
[13] 「‘보수동 책방골목 살리기’… 팔 걷은 시민, 팔짱 낀 지자체」, 부산일보, 2021.11.09
[14] 「“보수동 책방골목, 재개발로부터 지켜주세요”」, 한국일보, 2022.01.08
[15] 보수동 책방골목 보존 포럼 2021.12.17. (https://www.youtube.com/watch?v=RnSPKfLs__Y)
[16] 6·25 전쟁 이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당시 피난을 온 학교들이 보수동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이어가며 보수동 골목 일대는 통학로가 되었다. 본래에는 광복 후 빈터로 남았던 국제 시장에서 간이 서점을 열곤 했으나 그곳이 개인 사유지가 되며 노점상이 보수동 앞길에 새로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1960년, 골목에 가건물이 들어서며 본격적인 책방골목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