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실대다] 편집위원 곤지
지옥철에서 좋은 오늘을 상상하기란
염미정1)의 아침은 비포장도로를 내딛는 단정한 구두로 시작된다. 언덕 너머에 버스가 모습을 보이면, 구두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버스가 헐떡대는 그를 태우고 나면, 배경은 들썩이는 버스, 덜컹거리는 지하철로 이어진다. 하잘것없이 삭막한 이 여정은 꾸준히 등장하여 그의 아침과 저녁을 설명한다. 미정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왕복 4시간의 출퇴근에 반납한 채 늘 이동한다. ‘(교통수단을) 타다’는 본래 주어의 자의를 포함한 동사이건만, 미정의 ‘타다’에서는 도무지 의지를 찾을 수 없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그를 실어 나르는 일만 있을 뿐이다. 지하철이 서울과 가까워지면 창문 밖 옥외 광고판에는 “오늘은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를 바라보는 미정의 눈빛엔 희망인 듯, 기대인 듯, 체념인 듯, 일순간 복잡한 무언가가 일렁인다. 눈빛의 의미를 읽어내기도 전에 지하철은 그 풍경을 빠르게 지나쳐 간다. 옥외 광고판의 다정한 안부는 이동의 속도를 늦출 수 없다.
드라마는 <나의 출퇴근 해방일지>, <경기도민의 애환일지>라는 웃픈(?) 패러디를 낳기도 했다. 주인공의 거주지나 직장에 대한 설정이 시청자의 눈길을 끌긴 했지만, 작품이 향하는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해 있다. 사실 미정의 음울함은 원거리 출퇴근이나 비서울 거주지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존재를 지운 단절된 세계에 끊임없이 자신을 구속한다. 그러니 그의 해방은 결코 서울 거주나, 근거리 직장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미정의 해방일지는 타인을 열렬히 추앙하고 조건 없이 응원하며 자신의 세계를 뚫고 나가는 속에 쓰여진다. 타인에 대한 추앙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에서조차 주변화되었던 ‘나’를 삶의 중심부로 위치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극의 말미, 해방된 미정이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서울 공간에 머물게 된 설정은 꽤나 은유적이다.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그의 변화를 주변부의 ‘이동’에서 중심부로의 ‘정착’에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드라마는 한국의 지역 불평등과 망가진 도시 생태계를 배경으로 한다. 때문에 그 배경 위에 놓인 염미정이라는 인물은 필연적으로 중심부로의 이동을 강요받는 시민의 착취되고 침범되는 삶의 고통을 안고 있는 것이다. 출근길 지옥철과 콩나물 버스에 몸을 실은 시민이 옥외 광고에서 희망을 읽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중심부로 떠밀리는 이동 속에서 좋은 오늘을 상상하기란, 얼마나 힘겨운 노력이 필요한 일인가.
공간은 없고 이동만 있는
문제는 이동만이 아니다. 이동만 남고 공간은 사라진다. 경제, 정치, 문화, 교육의 인프라가 대도시에 집중된 시스템은 주변 지역의 공적 공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지역의 구매력을 모조리 본사로 빨아들이는 거대 유통 자본이 마침내 지역의 경제적 자생력을 바닥까지 고갈시키”2)는 대도시의 블랙홀형 자본 시스템은 주변 지역의 구매력과 노동력을 빠르게 흡수한다. 대다수 시민이 대도시의 일자리로 포섭되는 상황에서 주변 지역의 자생적인 생산·소비구조는 무너진다. 이제 주변 지역은 대도시의 자본에 의존해야 한다. 대도시는 노동의 공간이 되고 주변 지역은 ‘잠만 자는 공간’, 즉 ‘베드타운(Bed Town)’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직주분리형 구조는 주거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적 공간의 기형적인 집합을 만들고, 공간이 품어야 할 건강한 생태적 조화 역시 파괴한다.
「생태와 생태주의」에서 유창복은 “도시에서 진정한 생태적 조화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넘어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조화를 포함한다. 즉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하게 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들을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회복시키고 공동체적 삶이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3) 이라고 강조한다. 공간은 물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간에서 피어나는 관계, 공동체, 연대, 자생의 가능성 모두를 포함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관계가 시작되고, 관계가 모여 공동체가 되며, 그 안에서 비로소 자생의 가능성이 움튼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는 공공의 영역 대신 사적인 주거 공간의 나열로 이루어진 주변 지역에서는 관계가 시작될 공간이 없다. 게다가 사회적 관계망을 의무적으로 형성해야 했던 노동의 공간과 달리 어떠한 관계도 요구되지 않는 휴식의 공간(주거지역)에서 관계망은 더욱 게을러진다. 다시 말해 대도시의 자본구조가 주변 지역의 자생적 경제 구조를 흡수하고, 지역 경제의 부재는 비대한 사적 공간과 초라한 공적 공간의 비대칭을 야기하며, 취약한 공적 공간은 또다시 자생적 지역 생태계를 불가능하게 하고, 종내에는 공동체적 삶을 위협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이 악순환 속에서 주변 지역은 대도시에 종속된 처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의 시작으로 보이는 대도시의 거대 자본 시스템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원점에서 출발하기 어려울 땐 꼬리에서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예컨대, 공동체와 연대의식을 복원하면, 자연스레 공적 공간이 확보되고, 공적 공간이 확장되면 자생적 지역 생태계를 조직할 수 있다. 지역의 생태적 조화가 이뤄지면 대도시에 대한 자본 의존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주거 공간으로 주변화된 정체성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
이곳을 우리의 중심부로
내가 발 디딘 지역과 몸을 누인 마을을 삶의 중심부에 두는 것은 이동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이동을 통해 새로운 공간과 관계를 조우하는 것은 필연이다. 나의 중심부에서 뻗어나가는 이동은 세계의 확장이자 성장의 시작이다. 그러나 중심을 잃어버린 채 이동을 반복하는 것은 도시 공간을 둘러싼 거대한 장력에 나를 노출시킨다. 정처 없이 표류하는 무중력 상태의 정체성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동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정착이다. 나의 집이 있는 지역과 마을을 관계의 활력과 자생의 가능성을 지닌 삶의 중심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나 역시 대도시의 장력에 노출된 주변 도시에서 자랐지만, 운이 좋게도 마을 공동체의 그물망은 내 삶이 이곳에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집 주변에 위치한 마을 기업과 작은 도서관은 만남의 공간을 제공했고, 그렇게 연결된 동네 사람들은 재밌는 일들을 모의했다. 봄에는 공원에 장터를 열어 음식을 나눴고, 여름에는 서로에게 물총을 쏘았다. 가을에는 각종 창작 교실이 열리면서 도서관 안과 밖에 직접 만든 도자기며, 가방, 책갈피 등 수공예 작품들이 즐비했다. 문학반 수업이 끝나갈 무렵엔 어른들이 지은 시와 동화를 찾아 듣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겨울이 오면 공원과 도서관 뒷마당은 조용해지고, 대신 문 안의 공간들에 온기가 그득해졌다. 황량해진 도서관 뒷마당을 바라보며 따뜻한 음식과 차를 나눴다. 그렇게 함께 있으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도 그럭저럭 버틸만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마을 공간을 적극적으로 향유했다. 공간과 그 공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순간, 그곳은 대체 불가능한 고유함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마을이 그저 그런 주거 공간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때 만난 동네 어른들은 이곳에서 저마다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가고 있었다. 지역과 관계를 맺고,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자신의 밥벌이를 해가는 어른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대도시의 삶의 양식보다 먼저 우리 동네의 삶의 가능성을 터득하며 자랐다.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가장 작은 곳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내 이웃이 누구이고, 우리 동네에 남은 공유 공간은 어디일지, 우리가 도모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은 무엇일지 알아가는 일상의 과정이 관계와 공동체를 만든다. 공동체가 있는 곳은 중심이 된다. 중심이 된 공간은 착취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 꽃핀다. 그래서 더 많은 도시가, 더 많은 마을이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 중심과 주변으로 나뉜 이분법적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중심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탈중심의 세계, 그곳에선 좋은 하루를 기대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편집위원 곤지(yonzgonz@gmail.com)
1) 2022.4.9.~5.29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2) 유창복. (2018). 생태와 생태주의. 도시문제, 53(595), 12-13
3) 유창복. (2018). 생태와 생태주의. 도시문제, 53(595), 12-13